김치의 발명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주식이 된 곡물의 영양 균형을 위해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채소를 먹게 되었는데, 곡류는 건조로서 보존이 가능하였으나 채소의 보존 방법으로는 미흡하여 채소의 영양분을 보존하면서 장기간 이용이 가능한 소금을 염장이라는 저장방법이 개발되었으며 단순한 염장에서 발효과정으로의 발전은 인류 식품가공 역사상 큰 의미를 지닌다.
김치의 유래
상고시대에는 김치를 '저(菹)'라는 한자어로 표기하였으며 김치류를 총칭하는 우리 고유의 옛말을 '지' 또는 한자로 '침채(沈菜)' 라고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침채(沈菜)'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딤채'로 발음되며 이 한자어가 중국에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인 듯 하다.
침채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침채→딤채→김채→김치로 변화하면서 김치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김치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위지동이전」고구려조로 "고구려인은 술빚기,장담그기, 젓갈등의 발효음식을 매우 잘한다"고 씌어 있어 이 시기에 이미 저장발효식품을 생활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치의 역사
우리나라의 김치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정착된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뚜렷한 사계절이라는 기후의 특성으로 인해 동절기 식생활에 대비한 산채류나 야생채류의 저장법이 발전되면서 오늘날의 김치에 이른 것이다.
1.삼국시대
삼국시대의 식생활에 대한 문헌은 극히 부족하여 로 고대의 김치 발달과정은 확실히 규명하기 힘드나 우리민족이 고대부터 채소를 즐겨 사용하였고 젓갈,장 등의 발효 식품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할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김치무리가 제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기에는 정착생활이 보편화되어 채소류의 저장성을 높이기 위한 단순한 소금절임이 성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중국 북위 때(6세기)의 책인 "제민요술"과 익산미륵사지 출토물에서 그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제민요술"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김치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것이 중국 김치류와 한국 김치류 연구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제민요술"중의 김치류를 검토해 보면 산미료에 담그는 '엄초법' 소금과 발효 기질을 이용하는 '발효지법' 그리고 오늘날의 장아찌에 해당하는 '엄장지법'이 소개되어 있다.
백제문화인 익산미륵사지에서 출토된 토기를 보면 100cm 이상되는 대형토기들이 있다 이것의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는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땅을 파고 묻어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토기는 겨우살이를 대비한 김장독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고려시대
고려 때는 그 당시의 김치에 관해 구체적으로 기술해 놓은 문헌들이 있어서 김치의 발달사를 엿볼 수 있다. '한약구급방'에 처음으로 배추에 관한 기록이 나오며 이규보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에는 "순무를 장에 넣으면 여름철에 먹기 좋고, 청염에 절이면 겨울 내내 먹을 수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순무를 장에 넣었다는 것은 장아찌형의 김치로 해석할 수 있고 청염, 즉 맑은 소금물에 절였다는 것은 국물째로 먹는 동치미류의 김치로 생각할 수 있다. 이 13세기 초에 쓰여진 이 문헌의 기록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그 이전 시대부터 있던 장아찌류 외에도 동치미류의 새로운 김치가 이미 상용음식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러한 김치류가 저장식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즐겨 먹는 상용식품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밖에도 〈음식디미방〈수운잡방〉과 같은 문헌들에서 나박김치, 산갓김치, 죽순김치와 같은 김치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는데 고려사회의 김치는 단순 절임 형 김치가 일반적이었을 것이며 장아찌형, 나박지형 김치와 양념이 가미된 김치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대 김치는 단순히 겨울용 저장식품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즐겨 먹는 조리가공식품으로 변신하기 시작하였다.
3.조선시대
산업의 발달과 인쇄술의 발달로 농서의 폭넓은 보급에 힘입어 채소 재배기술이 향상되었고 외국에서 여러가지 채소가 유입 되면서 채소와 과수 원예작물과 약초가 널리 보급되고 이것이 김치의 주재료, 부재료로 이용되면서 김치의 재료가 다양해졌다.
지금과 같은 우리 김치의 형태가 시작한 것은 외래 채소들, 특히 결구배추가 도입 재배되어 이를 주재료로 사용하면서부터 이다. 단순히 소금에 절여 겨울에 대비한 야채저장 방법이 였던 김치는 조선 중기(임란이후)이후 고추가 유입되면서 일대 혁명을 맞이하게 되나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시기는 200년이 지난 18세기에 들어서고 난 후에야 김치 양념으로 적극적으로 쓰였다.
조선후기에 고추를 조미료로써 사용하면서부터 김치의 담금이 다양해지고 이때부터 김치는 빨간색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궁중의 김치
조선시대 수라상은 임금이 평소에 받는 반상으로 김치는 배추김치(젓국지)와 송송이(깍두기), 국물김치 세 가지가 오른다. 젓국지는 궁중에서 담근 통배추 김치인데 조기젓이나 황석어젓을 많이 넣고 담가 붙인 이름이다.
『조선무쌍산식요리제법』에서는 "젓국지는 배추와 무를 씻어 한치 길이씩 썰어 소금에 절인 다음 외를 불려서 짜개어 대강 썰어 넣고 고추, 마늘, 미나리, 갓은 채쳐 넣고 청각도 조금 넣고 조기젓국에 물을 타 끓여서 식인 후에 간간하게 많이 붓고 뚜껑을 잘 덮어 익힌다."고 하였다.
동치미는 보통 소금과 무와 물이 기본이지만 옛날부터 궁중에서는 고명을 더 많이 넣어 향미를 더하였다. 동치미를 담글 무는 잘고 모양이 예쁜 것으로 골라 씻어서 하루 삼 절인 다음 독을 묻고 넣는다.
그 산뜻한 맛에 반한 고종은 겨울철 야참으로 동치미 국물에 육수를 섞어서 메일국수를 만 냉면을 즐겼다고 한다. 이를 위해 배를 많이 넣어 담근 냉면용 국물김치를 따로 담갔다고 한다.
농어촌사랑방 까페에서 퍼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