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우난골
정주성 ( 定州城 )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간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아주까리 : 피마자, 씨는 기름을 짜는 대극과(大戟科)의 일년생풀.
쪼는 : 기름이 타 들어가는.
한울 : 하늘.
청배 : 청배나무의 열매.
이 시는 백석이 1935년 8월 31일, 조선일보를 통해서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자라온 고향 정주의 다 허물어져 가는, 그러나 이 고장의 명소라고 하는 정주성을 소재로 삼은 시이다. 이 시에서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시인의 첫 작품이지만 이미지를 통한 시적 감수성이 퍽 반짝인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는 한갓 역사의 유물로밖에는 인식되지 않는 무너진 성터와, 헐리다 남은 문이 있는 산 중턱의 원두막은 사람이 없는지 불빛이 외롭다. 고요한 밤이기 때문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불빛과 기름 타는 소리의 시각과 청각 이미지가 다 허물어진 성터의 파란 혼처럼 나는 반딧불과 어울려 무상함과 고독감마저 느끼게 하는 시이다.
이미지즘의 시가 사물시(physical poetry)의 형태로 외관적 풍경의 감각을 수놓는 데 열중한 것이 1930년대 시단의 풍조였다. 정지용의 시를 감정의 절제라고 평가한 것도 정지용의 이미지즘이 바로 이러한 사물시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석은 마지막 연에서 하늘빛처럼 훤한 헐리다 남은 성문에 메기 수염의 늙은이를 등장시킨다. 이 노인은 결코 돈 많은 사람일 수가 없다. 청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사람일 것이다. 단순한 이미지의 풍경화가 아닌, 늙은 청배 장수를 그 배경 속에 등장시켜 떠오르는 삶의 찐득한 땀냄새는 이 시의 깊이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
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
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
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
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
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
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
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
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
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
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벌 : 매우 넓고 평평한 땅
고무 : 고모, 아버지의 누이
매감탕 : 엿을 고아낸 솥을 가셔낸 물. 혹은 메주를 쑤어낸 솥에 남아 있는 진한 갈색의 물.
토방돌 : 집채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오리치 : 평북지방의 토속적인 사냥용구로 동그란 갈고리 모양으로 된 야생오리를 잡는 도구.
안간 : 안방.
저녁술 : 저녁밥. 저녁숟갈.
숨굴막질 : 숨바꼭질.
아릇간 : 아랫방.
조아질 : 부질없이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해찰을 부리는 일. 평안도에서는 아이들의 공기놀이를 이렇게 부르기도 함.
쌈방이 : 주사위
바리깨돌림 : 주발 뚜껑을 돌리며 노는 아동들의 유희.
호박떼기 : 아이들의 놀이
제비손이구손이 : 다리를 마주끼고 손으로 다리를 차례로 세며, "한알 때 두알 때 상사네 네비 오드득 뽀드득 제비손이 구손이 종제비 빠땅" 이라 부르는 유희
화디 : 등경. 등경걸이. 나무나 놋쇠 같은 것으로 촛대 비슷하게 만든 등잔을 얹어 놓은 기구.
사기방등 : 흙으로 빚어서 구운 방에서 켜는 등.
홍게닭 : 새벽닭.
텅납새 : 턴납새. 처마의 안 쪽 지붕이 도리에 얹힌 부분. 부고장 같은 것이 오면 방 안에 들이기를 꺼려 이곳에 끼워 넣는 풍속이 있었음
동세 : 동서(同壻).
무이징게국 : 징거미(민물새우)에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인 국.
☞ 백석 우리문화의 원형탐구와 떠돌이 삶 / 박혜숙
이 작품의 배경이되는 여우난골은 백석의 일가 친척이 모여 사는 마을이름이다. 이 여우난골에 살고있는 백석의 집안이 명절 때 한데 모여 먹고 놀며 화목함을 다지는 정경이 어린아이의 눈을통해 형상화 되었다. 백석은 「여우난골」이라는 시도 썼는데 그곳은 다분히 비문명적인, 그러나 아름답고 포근한 곳으로 그려졌다. 마을 이름 자체부터가 재미있는 전설이라도 간직되어 있음직한 이곳은, 그러기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곳에서 쓰이는 언어도 외부 세계의 때를 입지않은 듯한 진한 토속성의 체취가 풍겨난다.
처음 부모를 따라서 명절에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는 작품속의 화자는 매우 들떠있다. 개까지도 따라다니는 아이들 세계의 들뜬 심정이 동화적으로 느껴진다. 아이는 들뜰 수밖에 없다. 제 또래의 친척 아이들과 모여 밖에서는 쥐잡이, 숨바꼭질, 말타기 등의 놀이를 신나게 할 수 있고, 밤이 되면 집 안에서 쌈방이, 바리깨돌림, 호박떼기 등의 온갖 놀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갖가지 명절 음식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아이는 더더욱 좋은것이다.
아이의 눈으로 관찰된 친척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얼굴에 별자국 솜솜 난(아마도 곰보일 것이다) 말수, 하루에 베 한 필 짠다는 재주꾼 新里 고무, 늙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살빛이 매감탕 같은 土山 고무, 자주 눈물을 보이던 코끝이 빨간 큰 골 고무, 그리고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삼촌은 이미 어른이 되어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는 시인에게 각인되어 있는 여우난골族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이들 집안이 그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크게 내세울 것도 없지만 크게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며, 친족간의 전통적 규범을 간직하면서 당시 급작스레 변화되어 가는 서구적 물결에 휩쓸림이 없는 사람들이다.
백석의 『사슴』에 나오는 이와 같은 전통적 세계의 시들은 임화가 지적한 시골뜨기의 시도, 오장환이 말한 유복한 어린시절의 회고시도, 아니면 시대적 조류를 퇴행한 시도 아니다. 그것은 퇴색되어 가는 공동체적 우리들 삶의 근원을 재확인한 것이자, 말살되어 가던 모국어에 대한 문학적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