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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 論
삼국시기에 들어온 유교는 삼국항쟁기를 거치면서 중세적인 정치이념으로 변하였다. 통일신라는 집권적 국가를 이루기 위해 이를 권장하였으나,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본격화한 시기는 고려의 성립이후였다. 고려왕조는 사회적 종교인 불교와 함께 정치이념으로 유교를 채택하였고, 고려전기 경전의 해석에 주력한 훈고학을 중심으로 유교가 발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후기에는 유교의 주도적 위치가 성리학으로 변화하였고, 성리학이 고려사회를 지배했던 불교를 이념적으로 극복하고 조선왕조의 건국 이념이 되었으므로, 그만큼 중세사상에서 유교이념이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지배사상은 크게 보면 성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리학이 조선시대 지배사상으로서 50년 동안 항상 비중이 같았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교가 수용된 시기부터 고려, 조선에 걸쳐서 정치이념으로 어떻게 변하였고, 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Ⅱ. 本 論
1. 유교와 성리학의 수용과 정치이념의 발전
통일신라기 유교는 독서삼품과의 설치와 유교적 성향을 지닌 관료의 배출 증가로 중요한 정치 이념으로 발전하였고, 유교의 담당층은 주로 6두품 출신으로 정치적으로 그 세력이 아직 미약했었다. 물론 이 시기의 이념적 성격은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하대에 당(唐)에서 유교를 공부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정치세력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골품제에 기초한 고대적인 혈연적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중세적 사회질서를 수립하려 했다. 결국 이러한 세력 중 일부는 새 국가였던 고려왕조에 귀부하여, 유교정치이념을 실현시킨다. 고려초기 유교이념은 고려 태조의 훈요 십조와 최승로의 사상으로 대표되는데, 여기서 그 이념은 집권적 관료국가의 지향과 위민사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과거제가 실시되어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강화될 수 있었다. 이후 고려초기 유교의 기능은 국가체제의 완비에 따라 집권적 귀족정치의 정치이념으로 변하고, 11세기에 들어서자 유교는 문벌귀족의 융성에 따라 발전하였다. 12세기에 들어와서는 유학자들의 본격적인 경서(經書)연구가 사상의 발전을 촉진하였고, 그 결과 많은 경전해석서와 역사서가 등장하였다. 이후 무인 집권기에는 '무인집권'이라는 사실 때문에 유교사상 면에서 일종의 암흑기로 여겨졌다. 그 이유는 당시의 '문인'들이 무인집정자의 권력에 기생하여 성장했으며, 정치이념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문필력을 이용한 행정보조자적인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이념이나 사상성을 갖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성리학의 수용시기에 대한 의견은 다양한 편이다. 그 원인은 성리학을 곧 주자학과 동일하게 보는 관점과 그것이 아닌 중국 북송 대 성리학의 발흥단계의 것을 성리학 자체의 수용으로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에 있다. 그러나 대개는 성리학을 주자학으로 이해하여, 이것의 역사적 기능을 새로운 정치사상이라는 점에 두고 있다. 즉, 성리학의 수용주체는 새로운 정치세력인 고려후기 '사대부'이며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은 이들이 추진한 개혁과 새 왕조건립에 따른 이념적 기반 및 고려불교에 대한 사상적 극복이라는 것이다.
2. 유교의 사상적 특성과 발전방향
주자학이 들어오기 전의 유교의 성격은 대체로 한당유학과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한당유학의 세계관과 그것이 지닌 정치이념적 성격은 의미가 있다. 먼저 세계관 중에서 한당유학의 자연 내지 우주관이 정치이념과 관련깊다. 그 이유는 당시 유학자들이 자연 내지 우주의 현상을 정치현상과 결부지었기 때문이다. 한당유학에서 하늘은 초기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인격적인 의지를 갖고 정치를 평가해 자연현상을 발생시키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인간 자신의 노력보다는 하늘의 의지를 살펴야 하며, 자연재해에 대한 대책도 하늘의 노여움에 대한 제사로 해결해야 했다. 여기서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하늘의 그것보다도 왜소한 것으로 여겨졌다. 원래 한대(漢代)에 정립된 이 설은 삼국부터 고려시대까지 정치논리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정치논리는 민이 곧 하늘이라는 왕도정치로 발전하며, 결국 민본론의 기초가 된다.
주자학적 세계관은 이기론에 기초한다. 여기서는 하늘의 개념이 이전과 달리, 理와 동일시된다. 이제 하늘은 인격적 존재가 아닌 인간이 지켜야 할 '원리' 내지 '법칙'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 자체도 하늘처럼 이를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인간은 원리상 하늘과 동동한 위치를 갖는다. 그 결과 주자학 단계에서는 이전처럼 통치자들이 하늘의 뜻을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에 입각해서 하늘의 '원리'에 맞는 정치적 행위를 해야 한다. 이 논리가 유교정치이념화한 것이 천명론(天命論)이다. 따라서 한당유학의 단계에서 군주는 하늘의 지시를 받는 절대적 존재로 상징화되었다. 그런데, 고려후기에는 주자학의 영향으로 천명론이 변화하였다. 이제 군주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하늘의 법칙인 도(道)를 알고, 이에 맞도록 통치해야 하는 인물이 되었다. 따라서 군주 자신은 도를 닦아 성인(聖人)처럼 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 정치논리가 군주성학론(君主聖學論)이다.
3. 조선전기 성리학의 주체적 수용(15세기)
성리학은 당시 송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불교와 도교를 철학적으로 극복하고 성립한 새로운 유학이었다. 이기론(理氣論)은 성리학 전체의 기본이였고, 이에 바탕을 두고 인성론(人性論)과 수양론(修養論)이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사회에 구현하는 방법이 예(禮)였다. 여기에 여러 정치, 사회, 경제 정책들이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입각하여 구체화되었다. 말하자면 성리학은 중세사회의 모든 분야를 규정하고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 즉 지배사상이었던 것이다. 한편 성리학은 명분론과 분수론을 동시에 가졌다. 명분론에서는 그 이름에 따라 상하, 존비, 귀천이 정해진다고 보고 거기에 나타나는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나아가 이 차별은 지주와 전호 관계뿐만 아니라 군신, 부자, 부부관계 등에 모두 적용되었으니 그것이 곧 사회윤리였다. 이러한 성리학적 사회윤리는 이일분수론으로 뒷받침되었다. 여기에 왕도정치와 민본사상은 성리학이 기본적으로 갖는 계급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긍정적 기능을 하게 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신흥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난 것은 당연했다. 온건개혁파의 사상은 「춘추」를 중시하였으며 인간의 본성과 성리학 본연의 왕도에 충실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지배체제는 그대로 둔 채 제도운영상의 문제점만 개혁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급진개혁파의 사상은 「주례」를 중시하였으며 제도개혁과 왕도, 패도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때문에 역성혁명론에 입각해 왕조도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바로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건국세력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유학과 육학, 여학 등에 관심을 보였으며 나아가 불교와 도교, 민간신앙적 요소까지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15세기 학자들이 이기심성론 등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정도전은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피력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을 재구성해보면 우주론에서 심성론, 경세론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체계적인 성리학적 이론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도전 이후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권근이었다. 그는 조선 초기의 성리학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하고 그 속에 이기론, 사단칠정론, 수양론 등 이후 사상계의 쟁점이 되는 주제들을 모두 포괄함으로써 조선에서 성리학이 뿌리내리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세종대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의 도입과 간행은 조선의 학자들에게 성리학에 대한 지평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문물제도 정비에 힘 쏟으며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이 시기 사상계의 경향은 세조 대에도 지속되었다. 이에 비해 김시습 등 세조집권에 반대하고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성리학에 학문적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도교, 불교 등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사상적 조류를 이루는 삼교회통사상의 단초를 열어주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학자들과 교류를 가지며 서로 영향을 미쳐 그 뒤 조선 성리학에서 의리와 도덕성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며 강조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성종 대에 들어서면서 영남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김종직을 비롯한 신진사류들은 형정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으며 훈척의 비리와 전횡을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보려고 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의 수신서인 「소학」을 중시하였다. 성리학에서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도학적 성격 강화와 함께 나타나는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주자 중심, 의리 중심의 도통론이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영남사림의 이러한 사상적 특징은 조선사상계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으나 그것은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심화가 아니라 성리학 이념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였다. 더욱이 그 사회적 실천은 훈척의 강력한 반발로 일어난 두 차례의 사화로 저지 당하여 다음 시기로 미루어져야 했다.
4. 조선 중기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 (16-17세기)
1) 16세기 성리학 이해의 심화
16세기 초반 사림의 사상적 경향은 성리학 이념의 사회적 실천과 도덕성, 수신의 강조였다. 그런데 도덕성과 수신의 강조가 사회적 실천을 수반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인간심성에 대한 관심이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정여창과 유숭조는 바로 이러한 관심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의 구체적인 싹이 이들에게서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 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조금 더 시일을 기다려야 했다. 중종 대 등장하는 기묘사림이 성리학 이념의 사회적 실천에 더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기묘사림의 사상적 특징은 조광조가 경연에서 주장하였던 도학을 높이고[崇道學] 인심을 바르게 하며[正人心] 성현을 본받고[法聖賢] 지치를 일으킬[興至治]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소학」은 매우 중시되었으나 기묘사림은 영남사림과 달리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보급하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여씨향약을 보급하는 운동도 김안국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벌였다. 또한 이들의 학문적 기반으로 중시된 것이 성리학 입문서인 「근사록」이었다. 성리학 이념의 구현과 개혁을 통해 지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이들의 노력은 결국 기묘사화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묘사림의 성리학 이론 수준은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의 등장은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조선사회에 확립되고 의리, 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이 이후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종 후반 사림은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지만 을묘사화로 인해 향촌사회로 돌아가 재지적 기반을 강화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더욱 힘을 쏟고 제자들을 키워 훗날을 대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서원 건립 등을 추진해 나갔다.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에서 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상사는 「성리대전」을 중시하는 경향과 「주자대전」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사상계의 주된 흐름은 주자의 학문, 주자 중심의 세계관에 충실하려는 것이었다. 주자 중심의 성리학의 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기대승과의 이기심성논쟁에서 이기호발설을 주장한 반면 기대승은 기의 작용을 강조하며 이의 자발성을 부정하였다. 이황은 성리학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주력하면서도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객관적으로 증명해내는 심성론과 수양론에 더 중점을 두었다. 서경덕과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이이는 기발리승일도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16세기 조선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하고 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렇듯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기심성론의 차이는 당시 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과 그에 대한 대응양식에서 형성된 것이기도 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구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지만 사림이 정권을 잡고 국가를 운영해 나가는 시기에는 적절하지 못하였다. 이를 수행한 것이 이이의 사상이었다.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역시 이황처럼 훈척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와 도덕성을 중시한 이황과는 달리 이들은 기 또는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상은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라는 측면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지만 사회개혁에 대한 이론 제공이라는 측면에서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6세기 중반부터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선조대 사림들이 중앙정계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각 학파를 기반으로 하여 정파가 형성되었다. 이후 학파와 정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전개되었으며 이것이 조선 중기사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 17세기 예학의 발달과 사회경제정책의 대립
17세기 사상계는 초반부터 주자 중심의 성리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상조류들이 촉진되었다. 나아가 이 시기는 성리학의 의리명분적 측면과 사회경제적 측면에 관심을 두어 왕실의 전례문제와 북벌론, 그리고 사회경제정책을 둘러싸고 각 정치세력 사이에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벌였다. 광해군 대 북인정권은 임란의 사회경제적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들은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북인의 사상은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에 크게 구애받고 있지 않으며 서경덕, 조식의 사상과 양명학, 노장사상 등을 수용하였다. 이후 북인정권은 인심을 잃으며 반정의 명분을 제공했고, 결국 인조반정으로 이이학파의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북인들은 정치적으로 축출 당하고 그들이 수용한 사상 또한 배척 당하였다.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이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경덕, 조식의 사상과 양명학, 노장사상 등이 영향력을 아주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적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대명의리론의 강화는 병자호란을 불러일으키고 조선은 이적인 청에게 무릎을 꿇지만 격렬한 주화, 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말엽부터 서인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오히려 척화론과 대명의리론이 대세를 잡았다.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으며 두 차례의 예송을 비롯해 많은 전례논쟁들이 벌어졌다. 이미 15세기말부터 사림들에 의해 삼대의 예에 의한 교화가 강조되기 시작하고 중종 대에 들어오면 기묘사림에 의해 전례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어 16세기 중반 「주자가례」중심의 생활규범서인 제례서가 출현하고 동시에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7세기에 들어와서도 예는 양란으로 인해 해이해진 예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예치가 바로 그것이다. 예가 치국의 방도로 대두하면서 예학연구가 심화되고 각 학파 예학의 차이가 전례논쟁을 통해 표출되었다. 예송에서 이이학파의 서인은 「주자가례」와 「의례」 등을 강조하며 신권의 입장에서 왕사동례를 주장하였다. 반면 서경덕, 조식학파의 학문을 계승한 근기남인은 「주례」와 「예기」 등을 강조하며 왕권의 입장에서 왕사부동례를 주장하였다. 결국 예송은 근본적으로는 17세기 사회에서 각 학파 내지 붕당들이 나름대로의 학문적 기반 위에서 자신들의 노선의 정당성을 주장한 전형적인 '정치형태로서의 전례논쟁'이었다. 나아가 예송의 사상적 차이는 중세 사회체제에 대한 관점차이로 연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송은 조선후기 사회체제가 변화해 가는 상황에서 반드시 겪어야만 했던 하나의 과정이었다. 인조대의 사회경제정책 논의는 크게 적극적 개혁론과 소극적 개혁론으로 나눌 수 있다. 대체로 서인공신, 관료와 북인관료들은 대동법의 즉각 시행과 병농일치적 군제개혁, 상공업 장려에 의한 국가 재정 증대 등 적극적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반면 서인산림과 영남남인은 대동법과 호패법의 즉각 시행에 반대하고 화폐유통과 염철의 국가관장에도 반대하는 등 소극적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소극적 개혁론이 주류를 이루어 민의 삶의 향상, 국가재정 확보, 국방강화 등에서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효종 전반가지 서인관료들은 주로 대동법과 화폐유통의 시행을, 서인산림들은 대동법의 시행을 유보하고 공안(貢案) 개정을 선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현종 대에 가면 서인산림들이 서인관료와 북인관료의 적극적 개혁론을 수용하면서 당시 사회경제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어 2차 예송으로 근기남인이 권력을 장악하자 적극적인 개혁론자였던 윤휴가 호포론 등을 주장하면서 사회경제정책을 둘러싼 논의는 격렬해졌다. 서인도 호포론을 주장하였으나 이는 신분제 유지를 전제로 한 것으로 윤휴의 호포론과는 차이가 있었으며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숙종 초반 활발하였던 호포제 등 양역변통의 대변통론(大變通論)은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소론이 주도하는 숙종 중반에 가면 군제를 개편하는 등 양역제의 모순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소변통론(小變通論)으로 바뀌어갔다. 이후 결국 영조 대 균역법으로 귀결되었다.
5. 조선후기 성리학의 경향
1) 18세기 새로운 사상경향(실학)의 대두
이이학파의 서인은 인조반정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을 절대화함으로써 자신들의 학문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주자의 본뜻에 충실함으로써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면 주자의 학문을 상대화하고 육경(六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등에서 모순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도 17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되었다. 윤휴와 박세당이 그 대표 인물이다. 이들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강한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기까지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적으로 위기를 느낀 이황학파의 영남남인과 이이학파의 노론사이에 성리학의 이기론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사상계는 다시 심성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人物性同異〕, 발하지 않은 마음의 본체가 선한가〔未發心體有善惡〕,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은가〔聖凡心同不同〕를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이 벌어졌다. 인성과 물성의 문제로 시작된 호락논쟁은 뒤에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은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변동에 대한 노론 집권층의 사상적 대응성격을 지녔다.
노론집권층이 심성논쟁을 통해 자기반성과 이론적 재무장을 하는 사이 1694년 갑술환국 때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경기지방에 정착한 근기남인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경제적인 모순해결에 더 관심을 갖는 새로운 사상경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났으니 근기남인실학이 그것이다. 근기남인실학은 이미 17세기 후반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을 계승하고 육경과 제자백가를 학문적 바탕으로 삼았던 유형원ㆍ허목ㆍ윤휴 등에 의해 그 이론적 체계가 갖추어지지만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는 것은 18세기 전반 이익에 이르러서였다. 이들은 주로 농촌에 생활 근거를 두어 토지개혁을 강조하였으며, 농업기술의 발전과 농기구 개량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수령과 향리의 농민 수탈을 막기 위한 행정기구 개편과 양인농민을 확보하기 위해 신분제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기론 등 철학적 기반을 볼 때 근기남인실학은 대체로 기(氣)를 강조하기보다는 이(理)를 강조하고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기라는 현상적 측면이 아니라 이라는 본질적 측면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토지개혁론 등 근본적인 개혁론으로 표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전반에는 근기남인뿐만 아니라 소론에서도 양명학과 노장사상 등을 수용하여 성리학을 절대시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정제두와 유수원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제두는 성리학에 비해 민에 대한 인식이 적극적이고 심(心)을 중심으로 주관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을 체계화시킨 인물로 왕양명의 친민설(親民說)을 적극 지지하여 일반 민을 도덕 실천의 주제로 상정하였으며 이을 바탕으로 양반신분제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유수원은 신분제 개혁을 통한 사ㆍ농ㆍ공ㆍ상의 비신분적 개편과 그에 기초한 전문화된 분업의 수행만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일반 민을 편안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문벌 타파와 교육의 균등, 관료제의 합리적 운영을 주장하고 화폐의 유통과 도매업의 육성을 통해 국부를 증진시킬 것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소론의 새로운 사상경향은 18세기말에 이르러 고증학을 수용하면서 더욱 풍부해졌다.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노론 안에서도 현실사회를 개혁해보려는 새로운 학문경향이 나타났다. 북학(北學)이 그것으로 홍대용과 박지원, 그리고 서얼 출신인 박제가ㆍ이무덕ㆍ유득공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청에 사절로 가 청의 선진문물을 접하고 조선의 낙후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기존의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화이론을 극복하고 화(華)와 이(夷)가 차이가 없다는 인식을 가졌으며 여기에 도시의 성장과 상공업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에 맞닥뜨리면서 상공업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상공업 발전론뿐만 아니라 신분제와 토지제도, 농업기술 등에 관한 개혁책도 제시하였다.
근기남인실학이 철학적 기반으로 理를 강조한 데 비하여 북학은 상대적으로 氣를 강조하였다. 북학도 기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기론(氣論)을 확립하려 했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자연계까지 확대하고 경제지학(經濟之學)과 상수학(象數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개혁론을 개진하였다.
18세기의 이러한 개혁사상은 탕평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추구하였던 정조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 정조의 학문은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동시에 고증학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경향을 수용ㆍ정립하여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문체반정(文體反正)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조의 새로운 사상경향의 수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2) 19세기 성리학의 경직화와 극복 노력의 좌절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상계의 경(景)ㆍ향(鄕)의 분화는 두드러졌으며 근기남인, 소론, 노론 낙론계 학자들에 의해 중앙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19세기를 전후하여 서울 지역 학자들이 가졌던 학문적 공감대는 북학이었다. 당시 급격한 사회변동에 직면하여 사(士), 즉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재인식하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청의 과학기술과 문물제도를 도입하여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노론 집권층이 분화되면서 이러한 노력은 굴절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세도정권하에서 활약한 문인들의 사상은 현실과 유리되고 보수로 회귀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개혁성향을 지닌 대다수의 학자들은 학파에 상관없이 중앙정계에서 밀려났다.
이들은 모두 북학의 세례를 받았으나 사상적 경향이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대체적으로 두 부류로 나뉘어 지는데 고증학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경세지학(經世之學)을 중시하는 계열과 성리학에 대한 신뢰를 견지하며 고증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지녔던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또한 한 세대 아래로서 청의 문물과 고증학의 수용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계열도 있었다. 이처럼 세도정치의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사상계는 청의 문물을 수용하는 데서 나아가 청의 학문인 고증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면서 경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조선사상계의 고증학 수용은 일단 성리학의 자체적 반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따라서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주자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동요시켰으며 금석학ㆍ음운학 등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또한 고증학의 폭넓은 학문범위와 박학적 경향은 방대한 백과사전식 저술이 나오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상경향을 주로 중앙의 세도가문과 경화사족 출신의 관료학자들이 주도하게 되면서 당시 현실모순을 해결하는 데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였다. 한편 서울 지역 학자들 가운데 성리학적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극복해보려는 노력도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과 최한기였다. 근기남인이면서 근기남인실학과 북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는 정약용은 지주소작제와 양반신분제의 철폐, 인민주권 주장 등 중세체제의 전면적 개혁을 지향했다.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최한기는 북학과 고증학뿐만 아니라 서양의 자연과학까지 수용하였다. 그는 과학적 진리의 인식론적 근거로서 기 개념(기학)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기학은 가치론 중심이며 직관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성리학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사유방식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선진적인 사상이 세도정권에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였다.
18,9세기에는 이전까지 학파를 기준으로 형성되었던 조선사상계가 서울과 지방이라는 지역을 기준으로 새로 재편되면서 지방학계는 서울학계가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 데 반하여 호락논쟁에서 제기되었던 이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방의 재지학자들이 주로 관심을 쏟았던 것은 호락논쟁에 잇닿아 있던 심성론이었으며 이는 명덕주리주기논쟁(明德主理主氣論爭)으로 전개되었다. 논쟁과정에서 낙론계 산림은 명덕주기론을 주장하는 계열과 명덕주리론을 주장하는 계열로 분화되었다. 명덕주기론 계통은 세도정권과 타협하는 계열과 성리학적 실천기능을 강조하는 계열로 나뉘어졌던 반면 명덕주리론 계통은 이를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위정척사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사회변동이 급격히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모순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일반 민들의 의식도 점차 성장해 나갔다. 이들의 의식이 성장하는 데는 지식을 습득하기 쉬워지고 생활의 폭이 넓어진 것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장시의 발달로 정보유통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두레나 초군(樵軍)같은 노동조직을 통하여 공동체의식이 성장하였다. 천주교의 전파와 미륵신앙으로 표출되었던 이상사회론은 일반 민들로 하여금 변혁을 꿈꾸게 하였고 나아가 이러한 일반 민의 의식성장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동학은 한말 변혁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세도정치기는 사상적으로 암흑의 시기는 아니었다. 다양한 사상이 출현하였지만 세도정치라는 현실에 억눌려 좌절되었다. 세도정치하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개혁적인 요소를 가진 사상은 가혹하게 탄압하거나 체제유지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허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 민들의 전면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Ⅲ. 結 論
불교가 수용되어 찬란한 개화를 시작하자 유학은 종교의 지위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란 내세관을 포함하는 협의의 종교적 역할을 뜻한다. 이후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시대로 내려오면서 불교는 주로 종교적 영역을 담당했고 인간의 기본 윤리나 일상의 도덕, 나아가서 국가의 통치철학은 유학이 전적으로 맡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숭유억불책을 정책의 기조로 삼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사실은 유학을 가지고 나라를 세운다는 열띤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영역은 여전히 불교가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조는 실은 유불이 공존했으며 도교도 정신생활에 상당히 깊이 침투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여튼 유학은 국교의 지위를 누리면서 정치이념으로서 사상계 전반을 지배했다.
─참고문헌─
고영진, 1997 「성리학의 이해와 왕도·민본」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상사의 과학적 이해를 위하여』청년사)
김인호, 1995 「유교정치이념의 발전과 성리학」『한국역사입문』(2) 풀빛
성균관대학교, 1997 「유학사상」
최영성, 「한국유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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