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달 시하늘 시합평회 주제시인과 시집이
유용주의 '가장 가벼운 짐' 이기에 지난 12월에 올렸던 내용
다시 찾아 옵니다.
* 문학의 즐거움 사이트 '문학평론' 중에서
(긴 내용이지만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가져 옵니다.
못과 나무, 삶의 두 화두 - 90년대시인론/유용주
- 홍 신 선 -
며칠째 서산 아파트로 전화했을 때, ‘유용줍니다. 밖이 아무리 춥다고 하드래도 몸 속에 봄이 왔다면 진짜 봄이 온 겁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도 봄이 왔기를 바랍니다. 말씀 남겨 주십시요’ 하는, 나지막하고 굵은, 그러나 미성인 목소리만을 자동응답기는 토해낼 뿐이었다. 그렇게 유용주는 없었다. 지난 1990년 우리 시동네로 주민등록을 옮겨온 이래 (그는 무크지 『문학과 지역』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낸 세 권의 시집을 몇 번씩 통독하면서 나는 실은 그에게 묻고 싶은 일들이 꽤 많았다. 특히 그의 첫시집 『오늘의 운세』 곳곳에 내비치고 있는 이 시인의 심상치 않은 이력도 궁금했고, 역시 첫시집 출간 무렵쯤 『현대시학』사 사무실에서든가 잠깐 인사를 나누었던 툭툭한 인상의 얼굴도 꽤는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집을 비워놓고 있었다. 작품 「겨우살이」에 나오는 그대로,
땀으로 목욕하여 일할 때에는
내 몸 하나 추스를 힘 없어
멀리서 찾아온 친구
졸린 눈으로 문전 박대하고
붙잡을 시간 없어 안타까워했는데
어허, 망치자루 놓고 시간 많아지니
정작 자주 오던 친구 소식 없고,
항아리 가득 담가 둔 술 시어빠지네
기다리다 지친 눈에 다래끼만 솟아오르네
라는 탄식어린 언술 그대로, 그는 현장의 이러저러한 일이 없는 이 겨울 한 철 보고 싶은 친구들 찾아가 술추렴이라도 길게 하고 있는지, 그도 아니면 자동응답기의 인삿말처럼 남녘 고향 가까이 봄맞이라도 나간 것일까. 그는 고향이 전북 장수이다. 1960년 생이니 이제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있다. 여기서 참고 삼아 자기 이름을 시 제목으로 삼은 「유용주」를 읽어보자.
우리 아부진 한문에 능통하셨다하나
나는 믿지 않는다
얼굴容 구슬珠가 웬말인가
아마 내 쌍판을 보고난 뒤
희망사항으로 말씀하신 것일게다
이왕이면 기왕이라고
용龍자 술酒자 이 아니 호방한가
오늘도 나는 대취했다
이처럼 이름 용주를 龍酒로 부르기를 얼마만큼은 자기 희화 삼아 작품 속에서 스스럼없이 진술하고 있는 그는 아마도 꽤 술을 많이 하는 축인 모양이다. 그 술은 또 내림인 모양이었다. 시 「1965년 겨울, 다리골」에 나오는 ‘아부지 또 주막에 갔나보다’라는 진술이나 「콩나물 비빔밥」 속의 ‘유귀동…… 그는 갔다 몇 푼의 외상값과 유행가 가락을 주막에 남기고, 삼년 동안 소를 먹이고도 농협 이자가 이백만원이나 불어난 1984년 봄을 남기고 그는 갔다’라는 언술로 미루어 보아, 대를 이어온 술로 짐작이 가는 탓이다.
아무튼, 유용주는 나이 열다섯 이래 숱한 직업을 전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금은방 세공일, 중국집 배달원, 유리공장 공원, 조경사, 중장비 기사, 건축 공사장의 일용잡부 등등 적게 잡아도 대략 20여 가지 직종을 전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때로는 중국집 명원각의 자전거를 타기 위해 키 크는 것이 소원이었던 적도 있었고, 때로는 경호제과집에서 ‘빵반죽을 잘한다고/ 가마를 기가 막히게 본다고/ 도너츠를 노릇노릇하게 잘 튀긴다고’ 혹독하게 얻어터지고 맞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숱한 냉대와 고통 속을 통과하며 그는 성장한 것이다. 스무나믄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그는 특히,
세상 끝에서도 사람이 사는 곳이면
따뜻한 피가 모여 있는가 보다
―「휴식시간」
라는, 제법 어른스런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사는 것이 곧 지옥이야
(누가 그랬더라 정들면 지옥이라고)
―「지옥에서 보낸 한 철」
하고, 삶이 바로 지옥이라는 쓰디쓴 인식을 달관한 어투로 토로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스무나믄 개의 직업을 전전했다는 말은, 말 그대로 사회 밑바닥을 험하게 마구잡이로 뒹굴어 다녔음을 뜻한다. 일종의 부랑인 셈이다. 그 부랑은 삶의 근거와 삶을 가늠하고 값을 매기는 잣대(가치관)를 상실한 일에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근거 없이 뿌리 뽑힌 삶을 추스르고 세계와 삶을 해석하고 가늠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야말로 부랑하는 이에게는 가장 절실한 일이 된다.
두번째 시집 『가장 가벼운 짐』 제 1부와 제 2부가 예사롭지 않게 읽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용주가 ‘가장 큰 목수’로 변신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평생을 막노동판에서 일하다 결국/ 그 무대에서 스러진’ 김인권이란 목수로부터 거푸집 짓는 법, 수평과 수직을 정확하게 보는 법, 해체 작업을 쉽게 하는 법 등등의 건축현장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기량을 배우고 닦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못과 목재라는 두 사물이다. 먼저 ‘못’이란 이미지는,
① 못은 그대 향한
집중파탄이다
단절과 단절 화해시키는 불가슴이다
격정의 피 단독 투신이다
못은 연결 위한 직통 노선이다
② 90㎜ 못 하나가
무게 1톤을 감당한다고 하는데
75㎏ 내 한 몸이 지탱하는
생의 하중은 얼마나 될까
옮겨온 작품 ①은 시 「못」의 일부이고 ②는 시 「아내에게」의 앞부분이다. 이 두 시구들은, 유용주가 즐겨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못이란 이미지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잘 보여준다.①에서 못은 단절과 단절을 화해시키거나 연결하는 노릇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말하자면 격절된 두 존재인 그대와 나를 연결시키는 직통 노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연결을 통하여 못은 흩어진 것들을 묶고 엮는다. 범박하게 말해서 집이나 이와 유사한 건물들은 모두 이같은 못에 의하여 묶여진 가시적인 결과물들이다.
②는 작은 못이 큰 하중을 감당하는 사실에 대한 화자의 놀람을 우선 보여준다. 그리고, 이같은 놀람은 자연스럽게 과연 나는? 하는 나름의 반성적인 물음을 끌어내게 만든다. 그것도 삶을 지탱하는 못으로서 나는 얼마만큼의 생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인 것이다. 그에게 부과된 생의 하중은 이미 앞에서 개략적으로 적은 바 있는 여느 시인과는 꽤 다르게 겪은 전반생의 무게인 것이다. 그 무게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계량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것. 오직 시인의 주관적인 체험에 의하여 가늠되고 추량될 뿐인 것이다.
이처럼 유용주에게 있어 못은 격절되고 흐트러진 모든 것을 묶고 연결하는 쇠붙이이면서 동시에 나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일찍이, 감태준이 황폐화된 삶의 상징처럼 철거된 집터에서 주워 들었던 못과도 다르다. 또, ‘못으로 하나님을 보았다’는 김종철의 초월적 기호로서의 못과도 다른 것이다. 심지어 그는, 이와같은 목수다운 마음의 움직임 끝에 나무와 별도 못으로 인식하는 데까지 이른다.
두번째 시집에 실린 그의 아름다운 시 가운데 하나인 「붉고 푸른 못」이 그것이다.
나무는
땅에 박힌 가장 튼튼한 못,
스스로 뿌리내려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만신창이의 흙은
안으로 부드럽게 상처를 다스린다
별은
하늘에 박힌 가장 아름다운 못,
뿌리도 없는 것이
몇 억 광년 동안 빛의 눈물을 뿌려댄다.
빛의 가장 예민한 힘으로 하느님은
끊임없이 지구를 돌린다
나는
그대에게 박힌 가장 위험스런 못,
튼튼하게 뿌리내리지도
아름답게 반짝이지도 못해
붉고 푸르게 녹슬고 있다.
소독할 생각도
파상풍 예방접종도 받지 않은 그대, 의
붉고 푸른 못
불과 열네 살 나이 때부터 세상의 이념 속을 굴러다닌 그의 삶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다보면 그가 왜 ‘못’이란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짐작케 된다. 물론, ‘못의 크기와 나무의 각도에 따라/ 가장 힘 받을 부분에 정확한 조준으로’ 못을 박는다는(「목수」2 28-29) 목수라는 직업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뿌리 뽑힌 삶을 살아온 이 시인의 심층 무의식 가운데 어떤 힘이 바로 못을 아름답게 그리고 집착할 대상으로 붙잡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첫 연, ‘나무는/ 땅에 박힌 가장 튼튼한 못./ 스스로 뿌리내려/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만신창이의 흙은/ 안으로 부드럽게 상처를 다스린다’와 같은 대목은 읽는 이에게 이 시인의 자화상 같다라는 감을 곧바로 주기까지 한다.
숱한 떠돌이의 삶 끝에 시인이 바라보는 나무는 바로 자신의 원망(願望)을, 그것도 마음 밑바닥 속에 감추고 살아온 강한 바램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호인 것이다. 짐작해 보자면, 일생을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붙박힌 채 서서 그것은 땅 속에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나무야말로 뿌리 뽑힌 채 떠돌아다니는 삶을 산 사람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또 뿌리 내린 흙은 말없이 만신창이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지 않는가. 그 위에다 못이라는, 목수로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미지까지 덧씌우고 보면 나무는 바로 시인 자신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유용주는 역시 좋은 목수답게 나무나 목재에게서 한 세상을 더 사는 아름다움을 남다르게 발견하기도 한다. 여기서, 나무가 한 세상을 더 사는 것은 집을 이루어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을 뼈 하나로 버티는 것을 의미한다.
잎의 이치로만 따져도 목수가 목재를, 나무를 좋아하는 일은 당연할 터이다. 옛날 장자(莊子)는, 무용(無用)의 용(用)이라는, 처세에 관한 마음의 움직임을 교목이 된 가죽나무를 빌어 펼쳤던 바가 있다. 그는 나무가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쓸모 없는 됨됨이 덕분이라고 여긴 것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쓸모 있는 나무인 문목(文木)은 온갖 것으로부터 이런저런 용도로 베어지거나 꺾이기 때문이다. 목수가 나무를 그것도 재목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경우는 더 일러서 무엇하겠는가. 장자의 이와 같은 나무에 대한 상상력은 사람살이나 여느 푸나무의 경우나 모두 근본이치(道)에서 보자면 서로 다를 바가 없다는 동양의 전통적인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작동된 것. 상상력의 상승과 하강의 통로로 나무를 생각한 서양의 G. 바슐라르와는 너무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아무튼, 유용주 시의 나무 이미지는, 장자의 무용의 용이란 생각을 뛰어넘어, 뼈만으로도 몇백 년을 더 사는 그래서 자기 존재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그 만의 상상력의 출발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나무가 뼈로서 한 세상을 더 사는 집이란 무엇인가.
나무 한 그루의 아픔과
벽돌 한 장의 고통이 모여
힘이 됩니다.
시멘트와 모래 자갈들의 상처가 모여
주춧돌이 되고 기둥이 됩니다.
불과 물과 땀의 분노와 절망이 모여
튼튼한 옹벽을 구축합니다.
목수와 철근, 미장과 설비와 전공들의
피와 뼈가 조화를 이루어
마침내 한 채의 집을 완성합니다.
―「집」의 일부
옮겨온 시 그대로, 집은 나무와 벽돌, 시멘트와 자갈은 물론 심지어는 그것을 짓는 자들의 분노와 절망들이 두루 모여서 이루어진 총합이고 조화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집은 각각의 부분과 요소들이 제 할 몫을 각각 다 하면서 전체의 조화를 구현하는 존재이다. 마치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모여 이룬 인간세상의 복사물 같은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모든 것이 평등한 가운데 상생 상의하는 이 우주의 상징 같은 것이다. 이 점에서 유용주의 집은 지난 1970년대 우리 문학에서 읽었던 뿌리뽑힌 삶이 떠돌기를 멈추고 안주하는 공간으로서의 집, 더 나아가 사회적 정착 내지 지위와 신분을 주는 표식(標識)으로서의 집, 정신이 깃들여 산다고 본 일련의 가치체계의 상징인 추상적인 집과도 다르다. 그의 집은 떠돌이 삶이 정착하면서 뼈로서 사는 나무들처럼 비로소 자기의 진정성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공간인 것이다.
나는 후배 시인과 안면도 가는 길에 언뜻언뜻 지나치며 본 서산 시가지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아니다. 지난 여름 황동규 시인의 소규모 여행단―여행단이라고 해보았자 평론가 하응백이 함께 한 세 사람만의 여행단이었다―의 일원으로 따라가며 들른 바 있는 서산시를 기억한다. 여기서, 최근에 읽은 황동규 시인의 꽤는 아름다운 긴 시 「소유언시」의 밑그림인 원체험은 바로 이 여행이었음도 밝혀두자. 서산 시가지는 충청도 지방 특유의 비산비야 지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로 신축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깊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햇볕 속에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시의 한복판 팔차선으로 넓게 뚫린 중앙도로가 잘 구획된 신흥시임을 일러두고 있었다. 그 아파트 단지 어느 동네엔가 유용주는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연애시절의 편지였겠지. ‘내 머리카락 올올이 빗자루되어 그대 마음 쓸고 싶습니다’(「미류나무 편지」 1)라고 한 그의 아내 김선희와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
세번째 시집 「크나큰 침묵」의 시 「마하티르」에 따르자면 그는 서산시 석남리에 산다. 낮은 지붕과 정다운 굴뚝들이 이마를 마주 대는 서산에서도 설렁설렁 헐거운 동네라고 한다.
서산중학교 네거리 못미쳐 대웅분식이라는 곳도
그 중 소박하고 정겨운 술집이에요
닭발에다 순대도 구수하고
배추김치에 칼국수 맛도 심심삼삼,
얼큰한 등뼈해장국에 막걸리 몇 통 놓고 부담없이
쌈박하게 취할 수 있는 곳인데
어쩌다 영업 일찍 끝나면
두 양반이 소주 한 병 놓고 권커니 잣커니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는 곳이지요
―「마하티르」의 일부
옮겨 적은 그대로, 그가 사는 서산시 석남리에도 허름한 분식집이 있고 역시 이 시의 주인공인 김명수 씨처럼 문맹 탓에 운전면허를 못따서 눈물을 흘리는 그렇고 그런 숱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살 것이다. 또 집 비운 사이 아내의 반지와 팔찌, 카메라를 털어가는 좀도둑도 있을 터이다. 게다가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나무에 관한 담론의 막바지쯤에 해당되는 열반에 든 철갑느티나무도 있는 것. 시 「구멍」에 따르자면, 서산에서 간월도로 가는 도중 부석사에 그 나무는 있다고 한다. ‘탄탄했던 살과 피 모두 시주한 뒤/ 숨이 끊어진 다음에도 바람 껴안고/ 한 세상을 더 살고 있다’고. 뿐만 아니라, 텅빈 자신의 내부에다 벌레와 새들을 보듬어 키우기도 하고 새끼 나무를 제 살 속에서 키워내기도 한다. 아마도, 이렇게 보자면 넉넉한 이 나무는 여느 사람들이 선망하는 이상적 삶의 기호라고도 하리라.
아무튼, 서산 역시 유용주의 시가, 비록 작품을 통해서 들려주는 것이긴 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그런 공간인 셈이다. 서너 해 전, 시인 양애경이 「남원 가는 길」에서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준, ‘조그만 동네에도 있을 건 다 있지/ 여기 살 수 있을 것 같지/ 북부 농협에서 예금을 찾고/ 농협상점에서 식료품을 사고/ 오수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며/ 당장 오늘부터라도 살 수 있는’ 그런 고장이리라. 그러나, 그와 같은 서산이라 할지라도 유용주가 터 잡고 사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따랐을 터이다.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어려움과 고통을 이렇게 작품 속에다 적어 놓기도 했다. 곧,
낯선 땅 속에서도 싱싱하게 뿌리를 키워
허벅지에 피멍이 드는 줄도 모르고
무릎이 까지는 줄도 모르고
발바닥이 다 닳는 줄도 모르면서
―「긴 하루 지나고」의 일부
라고, 한 고장에 삶을 정착시키는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이 땅을 지키는 나무들처럼 이제 서산에 뿌리내리고 정착한 것이다. 그는 그곳 서산에서, 서산의료원 증축 공사장에서도 일하고 서호 냉동창고 현장에서도 땀 흘려 노동했다. 흔히 막노동이라고도 하고 그 일판을 왜말로 노가다판이라고도 부르는 공사현장의 일은 매우 힘겨운 육체노동이다. 이를테면, 땀과 눈물이 반죽이 되는 일이며 이마에서 김칫국처럼 땀을 쏟아내는 일인 것이다. 오죽하면, 하루 노동을 마감하는 시간 기다리기에 겨워,
저놈의 해는 머슴살이도 해보지 않았나
저놈의 해는 술 처먹을 줄도 모르나
쓰러질 줄을 모르는구나
―「서산의료원 증축 공사장에서」의 일부
라고, 애꿎은 해만을 직설적으로 원망하겠는가. 노동은 그것도 육체노동은 매우 힘드는 일이다. 일찍이 M.베버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은 직업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자아를 있게 만든 더 높고 큰 섭리를 완성하는 길이라고.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버텨준 직업윤리의 대표적인 예라고 알려진 이 담론처럼 막노동도 바로 자아 실현의 길일 수 있으면, 아니면 ‘나’를 깨닫는 화두같은 것이라면 얼마나 바람직스러울 것인가.
유용주의 시에는 기이하게도 자신의 노동일에 대한 분노나 증오와 같은 짙은 감정이 묻어 있지 않다. 또 노동이나 현실에 대한 생산관계나 계급구조를 따지고 그에 따른 이른바 과학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80년대에 흔히 본 그 도식적인 내용이나 구호같은 것도 없다. 일반적으로,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이들은 분노와 억울함, 또는 자기 삶에 대한 넋두리나 푸념들을 툭하면 제 말 가운데 섞기 마련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섣불리 사회과학 책 몇 권을 읽고 나서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앞명분으로 앞세워 도식적이고도 추상적인 담론으로 일관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그동안 띄엄띄엄 읽었던 시집들을 다시 통독하면서 나는 그의 시에서 주목되는 이 점이 유난히 궁금했다. 요행히 그를 만나서 대웅분식점쯤에서라도 소주 몇 잔 나누며 그의 시와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나는 모르기는 해도 이 문제부터 물었을 것이다. 과연 그에게 우리 노동시들이 빠지기 쉬운 이 두 함정을 피하게 만든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어찌보면 대단히 놀라운 그 정신적 절제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앞으로도 어느 기회에 그를 만나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지난 80년대 초반, 집안 아우이자 시인인 홍일선이 보내준 동인지 「시와 경제」를 읽다가 나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야 할 시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박노해 시인의 등단작품이 된 「시다의 꿈」을 비롯한 다섯 편의 시가 그것이었다. 마침, 그때는 노동문학 논의가 작품생산의 주체문제를 따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말하자면, 노동시는 노동현장의 일꾼들이 써야 하는가, 아니면 먹물 든 전문시인들이 그대로 써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따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논의는 일의 이치 그대로, 노동시라고 불리는 시는 현장체험을 작품의 밑그림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현장일꾼 몫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누가 현장일꾼으로서 과연 고도한 시의 미학성을 담보하면서도 노동현장을 담론으로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실질문제에서는 논의 일체가 뜬소리처럼 겉돌았던 것. 그만큼 시의 문학성 내지 미학성을 일정 수준 성취하면서도 현장문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있는 시인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와 같은 때에 박노해의 노동시들이 출현했던 것이다. 그 출현은 시의적절한 것이었고 그만큼 시동네의 반응 또한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1973년 신경림의 시집 「농무」가 우리시의 지평을 새롭게 연 것과 같은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물론, 박노해 출현 이후 김해화, 박영근, 백무산 등등 직접 작업현장에서 일하며 시를 쓰는 시인들이 뒤이어 등장하였다. 그러나, 홍정선이 일찍이 지적한 바 그대로 ‘대부분의 노동시들은 자신들의 교사를 시와 일상적 삶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 가르쳐주는 텍스트에서 구했고’(「노동시의 위상과 과제」) 그 때문에 시 작품에서 언어의 탄력성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용주는, 이들 노동자 시인들의 영광과 실패를 함께 누릴 만큼 그 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에도, 물론 그를 만나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섣부르게 단언할 처지에 놓여 있지 못하다. 유용주는 그의 세 권 시집 모두 프로필에다 정동제일교회 배움의 집 3기를 수료한 것으로 적고 있다. 이 배움의 집 수료가 그에게는 유일한 학력인 셈이다. 그러면, 그의 시쓰기 훈련 내지 문학공부는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역시 그의 첫시집을 통해서 이 궁금사항들을 짐작할 수밖에는 달리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작품 「그 일당들」이 일러주고 있는 그대로,
그들은 목요일 오후
중학동 마음 한 켠에 모여
역적 모의 아닌 역적모의를 한다
와 같이, 작은 동인모임을 만들어 작품합평을 열면서 시 습작을 했던 것같다. 아니면, 몇 편의 시에서 한껏 존경의 염을 내보이고 있는 정진규 시인에게 도움을 받았었을 수도 있으리라.
이와 같은 학력과 시 습작과정이 그에게는 이른바 저 노동시의 한복판에까지 이르지 못하게 했을 수도 없다. 어쨌거나, 그의 시는 노동현장체험을 밑그림으로 삼으면서도 넋두리거나 과학적 인식을 가르쳐주는 텍스트, 곧 「자본론」을 비롯한 사회과학서에 나오는 구호들을 담고 있지 않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의 시의 시적 울림을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의 시에는 우리의 대중가요 노랫말이거나 노랫말을 패로디한 것들이 꽤 나온다. 이를테면, 제목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는 「미아리 눈물고개」 「보옴나알은 가아안다」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와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그의 집안 내력인 술과 한 짝패를 이루는 이 대중가요란 그러면 무엇인가. 아마도 실제로 그의 노래 실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굵고 저음인 그의 타고난 목소리도 꽤는 미성이지만 시 작품 속에도 노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글동네에서의 소위 명창(?)은 고 朴在森 시인, 조정권, 權五云 시인, 그리고 평론가 홍기삼, 정현기를 꼽을 수 있다. 김현의 한 글에 따르자면, 역시 작고한 소설가 한남철(그는 소설가인 이순의 남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과 이문희, 박재삼이 60년대 글쟁이 중 명창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즈음의 명창들을 꼽자면 더 기라성 같은 면면들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들 명창과는 다르게 유용주의 대중가요는 단순히 취미나 취향의 하나로 보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에게 노래는 현실고통을 가라앉히는 진통의 한 방법이자 신명내기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김윤식에 의하여 규명된 ‘藝’의 하나인 셈이다.
실제로 그러한 예를 우리는 신경림의 「농무」에서 본 바 있다. 알려진 그대로 「농무」는 노여움과 신바람이란 두 축으로 짜여진 시이다. 그 노여움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란 언술처럼 짓눌린 현실의 질곡에서 오는 것이다. 이와같은 현실의 질곡을 해결하는 길의 하나는 진보사관이 말하듯 새로운 변혁에 의하여 세상의 판을 가는 일이다. 그러나 이같은 개벽에 맞먹을 사회변혁이 막힌 자리에서는 현실 모순을 해결하는 길이―이 경우는 해결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터이다―바로 ‘藝’의 신명으로 푸는 길이다. 그 신명은 샤머니즘의 담론이 말하는 신들린 상태의 유토피아 체험이자 현실세계의 분노와 한을 녹이는 장치인 것이다. 유용주는 작업현장의 고통을 바로 이같은 신명이자 ‘예’인 그의 노래를 통하여 녹이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그의 다소 묵직하고도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때가 된 것 같다.
일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품을 판다는 것인데
우스운 것은 품보다 포옴을 파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야
정당하게 품을 팔아야 바른 삶을 일구어 나갈 것인데
포옴부터 먼저 팔려고 드니 한심한 일 아닌가
먼저 정직하게 품을 팔 것
품 파는 데 자신 없는 사람이
포옴을 전저 팔려고 든다는 것을 명심하게
땀냄새가 얼마나 구수한 줄 아나
그 냄새를 진짜 맡을 때까지
치열하게 자신을 밀어붙일 것
건투를 비네
―「막노동을 하고 싶다는 후배에게」 전문
옮겨온 이 작품은 다소 교훈적인 구석이 있지만 그가 생업인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노동도 그것이 궁극에 있어서는 삶의 이치나 세계의 근본 물리를 깨닫게 만드는 화두같은 것이란 생각이 그것이다. 어찌 노동뿐이겠는가. 시업(詩業) 또한 제정신 박힌 시인에게는 이와 한가지가 아닐 것인가. 하루 노동이란 곧 ‘온몸으로 시를 쓰는/ 하루 한편’의 작품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가 터득한 다음 목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만은 않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일까.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서져 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시멘트」전문
■유용주 1960년 전북 장수 출생. 정동제일교회 배움의 집 3기 수료. 1990년 첫시집 『오늘의 운세』를 간행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199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목수」 외 2편의 시를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