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봉[重九峯 , Junggubong]
인천광역시의 계양구에 위치한 산이다(고도:288m). 경인교육대학교 북서쪽에 위치하며 계양산과 천마산을 잇는 산줄기의 중간 지점이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모두 아홉 개이고 고려 시대에 중구절(重九節)을 치렀다는 유래로부터 중구봉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부평부읍지」에 "부평부에서 서쪽으로 3리에 있다. 계양산 산기슭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 봉우리 아래에 이규보의 자오당(自娛堂)의 옛터가 있고 또한, 냉천(冷泉)이 있다."고 되어 있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일러두기
출처:(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중심성사적비[衆心城史蹟碑]
「세우면 쓰러뜨리고 쓰러뜨리면 세우는 중심성 사적비」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에서 중심성 사적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세우면 쓰러뜨리고 쓰러뜨리면 세우는 중심성 사적비」는 구로가 부평부에 포함되어 있던 개화기를 배경으로 계양산 징맹이고개[景明峴]를 중심으로 쌓은 중심성의 사적비에 관한 이야기이다.
채록/수집상황
1949년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에서 간행한 「인천고적조사보고서」에 설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
시대 배경은 구로가 부평부에 포함되어 있던 개화기 때이다. 중심성은 길이가 8㎞에 달하는 계양산 징맹이고개를 동서로 쌓았다. 이 성은 역사적으로 볼 때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1883년(고종 20)에 부평부사 박희방이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국방시책으로 축성하였다. 성의 이름에는 고귀한 뜻이 담겨 있다. 이 성을 중심성이라고 한 것은 군민들의 마음[중심을 모아]을 모아 축조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을 쌓고 군민들의 요청에 따라 성을 쌓은 사적에 부평부사 박희방이 이 중심성의 깊은 뜻을 새겨 넣은 비석이 바로 사적비이다. 전해지는 사적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양산 서쪽에 고개가 있으니 이르기를 경명이요, 곧 연해관문이다. 내가 이 고을에 원으로 와서 관문의 방어를 마음먹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해 9월 그믐에 조칙이 있어 성을 쌓을 제 아전과 백성에게 관문을 막아야 고을이 평안한 점을 설명하였더니 백성들이 즐겁게 역사에 응하여 주어서 서쪽에 장대를 쌓고 군사 훈련하는 곳으로 삼았다. 문은 지명을 따라 경명이라 부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방어토록 하고, 중심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것은 읍민의 마음으로써 성을 쌓았은즉 이것은 우리말로 여럿이 마음과 힘을 모아 성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고로 이름을 중심성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때에 군기를 중수하고 모든 나루에 포사들이 이를 굳게 지키는 방법으로 했다. 성을 다 쌓는 날 고을 사람들이 이 업적을 글도 잘 못 쓰는 나더러 역사의 개요를 간략히 쓸 것을 청하므로 특히 읍상하동에서 60금을 연출하여 성 쌓는 자금을 마련한 것을 기특하게 여기며 이 글을 쓰노라.”
그런데 바로 이 장엄한 뜻을 새겨 넣은 비석과 관련한 허무맹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야기인 즉, 이 비석이 서 있는 것을 바라본 양갓집 며느리는 이상하게도 바람이 나서 놀아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이를 막기 위해 몰래 비석을 쓰러뜨려 버렸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누군가가 이 비석을 본래 대로 다시 세워 놓았다. 이처럼 세워 놓으면 다시 쓰러뜨리고, 쓰러뜨리면 다시 세우곤 하는 것을 수십 차례나 되풀이 했다 하니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기가 막힌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이 비석은 해방 후에 인천시립박물관에 이관되었고, 한국전쟁 때에는 전화를 입어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모티프 분석
「세우면 쓰러뜨리고 쓰러뜨리면 세우는 중심성 사적비」의 주요 모티프는 ‘외세의 침입을 막은 중심성’, ‘쓰러지고 일어서는 사적비’ 등이다. 이 설화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모티프가 존재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심성을 축조하여 나라를 지켰다는 애국설화의 모티프이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민중이 단합하여 국가를 수호하고, 이 뜻을 기리기 위해 사적비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애국설화의 전형이다. 다른 하나의 모티프는 풍자이다. 군민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고 애국의 자부심과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중심성의 사적비와 연루된 바람난 아녀자 이야기는 해괴망측하기까지 하다. 이 비석을 바라보는 양갓집 아녀자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를 쓰러뜨리고, 누군가는 또 쓰러뜨린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이것은 조선 말기에 특정 이념을 직접 전파하기 보다는 구전되던 설화를 빌려 우회적으로 충·효·열이라는 주제를 확산시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세우면 쓰러뜨리고 쓰러뜨리면 세우는 중심성 사적비」에 대한 부족한 자료로 인해 다른 지역의 비석과 바람난 유부녀의 설화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장대동 분명부락의 비석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곳에서는 개비석이 기우는 쪽에 흉년이 든다고 해서 매번 똑바로 세운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또 황해도 안악군 남정면의 개비석은 기우는 쪽 부락의 과부나 처녀가 바람난다고 하여 비석을 절대로 흔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비석과 관련하여 비슷한 의미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하지만 「세우면 쓰러뜨리고 쓰러뜨리면 세우는 중심성 사적비」는 이것과는 사뭇 다르다. 사적비의 의미가 장엄하게 논의될수록 이와 관련된 바람나는 아녀자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더욱 더 우스꽝스러워진다. 혹시 국가적 중책을 맡은 남성들의 부역에 대한 여인네들의 은밀한 사적인 욕망이나 풍자, 아이러니를 담은 해학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참고문헌
「인천고적조사보고서」(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1949)
두창구 외, 『영동지역민요설화설』(국학자료원, 2006)
「개항 전후 인천의 연안방비책」(『기호일보』, 2007년 11월 5일)
출쳐:(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4-09-1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