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3
박 완 서
“기철씨, 김승옥의 「야행」 읽은 적 있어요?”
“글쎄, 읽은 것도 같고 안 읽은 것도 같고…….”
“이런 엉터리, 읽었으면 읽었고 안 읽었으면 안 읽었지,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게 양다리 걸치는 거, 난 질색이더라:’
“여자 문제만 양다리 안 걸치고 오로지 우리 후남씨만 사랑하면 되는 거 아냐. 대단치 않은 거 양다리 좀 결치면 어때서 그래.”
“대단치 않은 거 양다리 걸치는 버릇이 자라면 대단한 것도 슬찍슬쩍 양다리 걸치게 되는 거라구.”
“까불지 말고 하던 얘기나 끝마쳐. 김승옥의 「야행」이 어쨌다는 거야.”
“자기 그거 안 읽고도 어디 가서 읽은 척할까봐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 거기 이런 얘기가 나와요, 직장 안에서 알게 되어 연애를 하고 부부가 된 남년데 결혼식하고 청첨장 돌리고 그런 절차는 아직 안 밟았거든요. 살아봐서 수툴리면 헤어져도 그만이라는 시험결혼인가 뭔가 하는 첨단의 생각에서 그렇게 한 거라면 조금도 딱할 게 없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그 여잔 남편의 수입만 갖고는 평범한 대로 행복하게 살 자신이 없는 거예요. 사치스러운 생활이 아닌 평범한 행복이라는 데 필히 주의할지어다. 그래서 맞벌이를 해야겠는데, 이 여자의 직장은 은행인데 은행에선 기혼 여성을 안 쓰는 거예요. 청첨장은 곧 사표가 돼야 한단 말예요. 「야행」의 대강의 줄거리 끝.”
“싱겁긴. 그 얘기가 뭐 그리 대단한 얘기라고 그렇게 열을 올려.”
“고마워서 그래요. 내가 「야행」이 쓰인 시대 배경과 동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게. 그 여자보다 내가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게.”
“후남인 참 감사할 거 많아서 좋겠다. 언젠 자기 할머니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마구 감격하더니 언젠 또 자기 어머니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울먹 이더니 이젠 또 「야행」의 주인공하고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그렇게 감사해? 꼭 횡재한 사람처럼 입을 못 다무니·…‥.”
“자기 결혼 하나는 잘하는 줄 알고 감사해야 돼. 감사할 줄 아는 아내야말로 복된 아내야. 맨날 불평불만만 해봐? 집안 꼴이 뭐가 되겠어? 참 감사할 거 또하나 생겼다.”
“뭔데?”
“내가 자기하고 동사대에 태어난 거. 그런 의미로 자기도 감사할 거 하나 더 생긴 거 알고 있어야 돼. 자아, 축배.”
“까불고 있네.”
기철이는 쉴새없이 나불대는 후남의 볼을 한 번 가볍게 꼬집고 또 축배를 들었다.
결혼날짜를 일 주일 앞둔 연인들은 오늘 매우 행복했다.
그들은 S산업 입사 동기였고, 이 년 동안 사랑을 속삭인 끝에 마침내 양가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 약혼한 사이였다. 누가 보기에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은 훌륭한 학교교육을 받았고 너무 잘살지도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집안 출신이었고 건강한 몸과 밉지 않은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애써 흠을 잡자면 후남이가 너무 똑똑하다는 거였다. 어느 모로 보나 똑똑하다는 건 어리석은 것보다 미덕이었으나 여자가 똑똑하다는 건 그렇지도 않아 자칫하면 눈에 거슬리는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불공평은 똑똑하다는 타인의 판단의 기준서부터 이미 시작돼 있었다. 그들은 실력이 남자하고 대등하면 덮어놓고 똑똑한 여자로 쳤다.
그런 의미로 후남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똑똑한 여자였다. 그녀는 유능한 대학 졸업생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일해보고 싶어하는 S산업의 중견사원 채용시험에 남자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응시해서 상위권의 성적으로 합격했다. S산업 엔 많은 여종업원이 있었지만 다 연줄 입사에 직책도 끗발 없는 말단이었다. 감히 중견사원 모집에 응모해온 여자는 더러 있었지만 합격자를 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여자 합격자는 후남이 외에도 세 명이나 더 있었다.
회사측에선 이런 뜻하지 않은 이변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여자
합격자의 구비서류에만 유독 각서라는 걸 첨부했다. 결혼하면 자동 사임하겠다는 각서였다. 이런 모욕적인 각서 쓰기를 후남이가 주동이 돼서 거부했다. 입사 경쟁을 치를 때 여자라고 유리한 조건이 하나도 없었던 것만큼 입사해서 일하는 데 있어서 여자라는 불리한 조건을 감수할 까닭이 없다는 주장은 때마침 인재난 시대여서 그랬는지 그럭 저럭 받아들여졌다.
그후 그녀의 입사 동기 중에서 하나 둘 결혼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중 여자는 하나같이 사표와 결혼 청첩장을 동시에 돌렸다. 회사측에서 각서 문제에 너그러웠던 것은 각서 없어도 그렇게 되리라는 걸 미리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기철이도 결혼하면 의당 후남이도 들어 앉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남이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일을 사랑했다. 그녀가 S산업에서 맡은 일이란 그녀가 배운 것과 정열을 다 바칠 만큼 흡족한 것도, 새로운 창의력을 요하는 보람찬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선 일은, 배웠다는 것을 간판적 인 것으로 못 박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움직임 있는 가능성으로 전환시켜주었고 그것은 그녀 자신의 생명 의 리듬에 활력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일을 통해 그녀는 혼자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자 살 수 있다는 기쁨은 새롭고도 신나는 삶의 보람이었다. 혼자 살 수 있다는 기쁨과 결혼하고 싶다는 욕망과는 상반되는 것 같았지만 후남이는 그 둘을 행복하게 조화시킬 자신이 있었다.
혼자 살 수 있는데도 같이 살고 싶은 남자를 만남으로써 결혼은 비로소 아름다운 선택이 되는 것이지 혼자 살 수가 없어 먹여살려줄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결혼이란 여자에게 있어서 막다른 골목밖에 더 되겠느냐는 게 후남이의 생각이 었다.
후남이는 결혼하기 원했으나 예속되길 원하진 않았다. 사랑받고 사랑하길 원했지 애완받고, 애완받기 위해 자기를 눈치껏 변경시키고 배운 걸 무화시키길 원지는 않았다.
일과 결혼을 함께 가진다는 건 그 일이 잘되더라도 양손에 떡을 쥔 꼴밖에 안 된다고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후남이는 안 그렇게 생각했다. 일은 다만 여자가 혼자 설 수 있다는 걸 의미했고 여자나 남자나 혼자 설 수 있다는 건 결혼하기 전에 갖춰야 할 자격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기철은 후남이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했기 때문에 후남이의 이런 생각까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그의 가족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난처해했다. 그러나 후남이는 그 일도 잘 해냈다. 그런 뼈대 있는 주장을 결코 주장답지 않게 지극히 여자답고 유연하게 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저런 여자가 일을 가져봤댔자 며칠이나 가질 수 있을까 싶어 ‘오냐 오냐, 너 좋은 대로 해보렴’ 하는 식으로 너그럽게 나왔다.
소위 여자다움이란 걸 충분히 이용해 가장 여자답지 않은 주장을 관철시킨 것이었다.
남은 문제는 직장이었다. 각서는 거부했지만 결혼하면 사직한다는 건 아직도 여사원간의 불뮨율이었다. 후남이는 기철이와 공모해서 배짱으로 나가기로 태도를 정했다. 두 사람이 같이 각기의 부서의 부장을 우선 찾아가 결혼할 뜻과 결혼날짜를 알리고 가능하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방계회사의 하나로 전근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부탁은 쾌히 받아들여지고 부장은 결혼식날, 회사 차를 몇 대나 내주면 좋겠느냐는 둥, 주례가 아직 안 정해졌으면 회장님께 부탁드려줄 수도 있다는 둥 각별한 호의를 보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기고만장, 퇴근 후 회사 건물의 스카이 라운지에서 빛깔 고운 술로 축배를 들었다.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 할머니 시대에, 어머니 시대에 안 태어난 행운을 위해서, 김승옥의 「야행」의 시대에 안 태어난 걸 감사하기 위해서 그들은 축배를 들고 또 들었다.
연인들은 행복했고 행복한 연인들의 눈에 온 세상은 축배를 들 거리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결혼식을 끝마치고 삼박 사일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기철은 속초 지사에, 후남은 진주 지사에 각각 전근 발령이 나 있었다. 부장은 그들의 결혼에 대해 이것저것 세심한 걱정을 해줄 때와 다름없는 인자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이 발령은 절대적인 것은 아닐세. 단 두 사람 중 하나가 사직한다면 말일세만…….”
속초와 진주…… 얼마나 악랄한 음모인가. 부부간에 그렇게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건 서울 제주 간보다 더 가혹한 이산이었다. 회사측에서 뭘 윈하나 하는 것은 자명했다.
기철이가 먼저 후남이의 사직을 권고했다. 그러나 후남이는 기철이를 설득해 먼저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며칠 무단결근을 하며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대학 출신보다는 여상이나 여고 출신 여사원들이 이번 일을 자기 일처럼 분개해서 회사를 상대로 같이 싸울 것을 다짐하고 나섰고 그녀가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단체에서도 법적인 문제까지 담당하고 적극 후원해줄 테니 투쟁을 하라고 부추겨주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미리 투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졸지에 아들을 지방으로 좌천시킨 며느리에 대한 시집 식구의 비난쯤은 그래도 견딜 만했다. 견딜 수없는 건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애걸이었다. 이 두 늙은 여자들은 후남이가 이번 일로 남편이나 시집 식구 눈에 나 시집을 못 살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들의 여생의 유일한 낙은 후남이가 그들처럼 팔자 사나운 여자가 안 되고 아들 딸 잘 낳고 살림 잘하고 풍파 없이 사는 거였다. 그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네가 빨리 사표를 내서 기철이를 서울로 불러오도록 애원을 했다. 실상 후남이를 지금만치나 줏대 있는 여자로 키워준 건 경숙 여사였다. 아들을 못 낳아 남편을 Ⅱ배앗긴 한을, 외딸을 아들 못지 않게 떳떳하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우는 걸르 달래면서 산 경숙 여사의 이런 애원은 후남이에게 있어서 배신처럼 뼈아픈 것이었다. 어머니의 배신으로 후남이는 걷찹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매사에 자신을 잃었다.
후남이는 혼자서 결혼 일 주일 전, 기철이와 함께 철모.르는 기쁨에 들떠 철없이 축배를 들던 스카이 라운지로 갔다. 그때와 같은 빛깔 고운 술을 시켰지만 혼자 드는 술은 고배였다.
후남이는 거듭한 고배로 의식은 더욱 명료해져 눈 아래 거대한 도시, 그 갈피갈피에 여자 길들이기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가 공룡처럼 징그럽게 도사리고 있음까지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칼아, 투지야, 되살아나렴.” 그녀는 주문처럼 이 소리를 외며 거듭거듭 고배를 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