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굴되기전 1980년대 무관심 상태에서의 중원 루암리 고분의 모습

고신라말기에 조성된 이 고분군은 신라 진흥왕이 충주지방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 후 중원소경을 설치하고자 귀척(貴戚)들을 이주시켜 한강유적을 경영하고자 하였던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으로서, 누암리 일대에만 230여기의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발굴된 26기의 고분 가운데 주류를 이루는 것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墳)이고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 石槨墳) 2기, 소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 石槨墓) 3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외방무덤(單室墳)임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짧은굽다리접시, 바리, 합, 항아리 등의 후기신라양식 토기류와 쇠손칼(鐵刀子), 덩이쇠(鐵鋌) 등의 철기루, 청동제띠끝장식(靑銅制帶端金具丘), 금동제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가락바퀴(紡錘車) 등의 토제품이 있다.


루암리 고분군 3번의 조사를 통하여 신라시대 횡혈식 석실봉토분 17기, 횡구식 석실봉토분 2기, 소형 석곽묘 3기, 고려시대 석곽묘 1기 조선시대 무덤 3기등 모두 26기를 실시하였다.
횡혈식석실의 평면 형태는 대체적으로 방형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장방형으로 분류되는 것도 평면비의 커다란 차이는 없다. 이들 고분에는 모두 시상을 설치하였는데, 시상을 1개만 만든 것과 추가장을하여 제1시상에 잇대어서 2∼4개의 시상을 만든 것이 있다.
특히 21호분에서 시상의 동측에 두침석이 있고 이 두침석의 바로 아래에 인골이 있는 점으로 보아 머리를 그대로 두침석에 올려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21호분에서는 시상이 마련된 벽부분과 시상에 회를 두텁게 발라서 견고하게 함은 물론 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 하였다.

제사유구로 확인된 것은 7호, 13호, 17호분으로 7호에서는 석실에서 서쪽 방향으로 호석이 끝나는 부분의 아래에 작은 구덩을 파고 유물을 부장하였고, 동쪽으로는 호석과 바로 잇대어서 할석을 이용하여 2개를 만들었다.
이 속에서 조사된 고분은 석실의 구조, 횡혈식·횡구식석실의 구분, 묘도의 위치, 시상의 배치등으로 보아서는 단기간에 조성된 것으로 해석 되며, 횡혈식석실분과 횡구식석실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두 형식의 석실의 시기적인 선후관계가 뚜렷하지 않고 거의 동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시상은 거의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고 출토된 유물로 보아 6세기 반경에 고분이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