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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일본의 근현대사 흥망사
7. 두 번의 성공과 두 번의 실패
1차 성공시대
l 막부시대와 발전의 기반
- 12 ~19세기 일본만의 독특한 정치〮사회제도.
- 참근교대 제도, 제한적 서구 문물 유입, 조총, 난학 등 상업혁명과 산업혁명이 사회적 기반
- 19세기 말 이후 일본이 융성해 가는 토대
l 개항과 메이지 시대
- 서구문물이 급속히 유입, 막부 중심의 봉건제가 해체되고 근대국가로 도약.
- 탈아입구의 목표는 1985년 플라자합의까지 100년간 유지
l 제1, 2차 세계대전과 일본
- 근대화된 일본은 조선침략(1875년),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을 통해 서구형 근대
국가로 빠르게 성장
- 메이지유신 이후 1차 산업화가 19세기 후반 마무리되면서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크게 하락.
- 20세기 초 일본경제는 만성적인 불황에 시달림
- 1차 세계대전은 공급과잉 상태의 일본에게 도약의 발판
1차 실패시대
- 1차 세계대전 직후 과잉성장과 국내적 혼란을 적절히 관리하지 못하면서, 1854년 개항 이후 대공황까지 76년간 이어진 일본의 고속성장은 막을 내리고 경제가 급속히 냉각됨
- 군국주의의 팽창과 대공황이 결합되면서 만주사변(1931년)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에 돌입
- 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15년간 전쟁을 치른 일본은 첫 번째 실패 경험
2차 성공시대
- 2차 세계대전 후 발 빠르게 친미파로 전환한 인사들은 지금의 일본 엘리트 계층의 핵심이 됨
- 미국은 일본을 전쟁 능력이 없는 농업국가로 만들려 했으나 냉전이 심화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미국의 세계전략을 지원하는 후방 세력으로 격상시킴
-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 일시적으로 극심한 불황. 그러나 전후 복구사업의 시기가 시작되면서 불황은 마무리되고, 1989년 까지 34년간 역사상 유례없는 고성장
- 미국을 따라잡자(catch up) 구호 하에 사회제도의 정비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구
l 일본의 2차 성공요인 8가지
1. 뚜렷한 목표의식: 탈아입구, catch up
2. 인구 급증: 단카이 세대(1947~1949년 생), 1979년대는 일본이 고도성장기. 청년기에는 노동력, 중년 이후에는 소비계층으로서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역할 수행.
3. 높은 사회, 문화적 수준
4. 파워엘리트 그룹의 개발독재식 리더십
5.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6. 과학기술의 발전과 세계화
7. 기업 중심의 복지 : 기업이 종신고용, 보통교육, 의료 등을 담당하면서 보편적 복지를 실현
8. 자산시장의 꾸준한 성장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1990년 이후 장기불황의 원인이 되었다.
2차 위기의 원류
l 성장의 한계에 빠지다 : 1985년 서구를 따라잡자는 목표를 달성한 후
- 심층적, 장기적인 비전 필요
- 합리성에 기초한 선진문화를 완전히 갖추지 못함
- 개발독재로 권력과 부를 독점했던 리더그룹이 다원화 세계화에 부적응
- 미국이 쌍둥이 적자로 보호무역, 환율절상 요구
- 과학기술 발전의 가속화로 보수적인 리더그룹과 기업의 적응력이 현저히 떨어짐
- 관성적인 성장요구로 자산가격의 버블을 방치
l 부동산버블의 시작 : 다나카 총리(1972~1974년)의 '일본열도개조론'에서 출발
- 1차 오일쇼크로 경제성장률이 역성장한 기간으로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내수 투자를 크게 늘렸다. ->부동산 가격 상승 초래
- 나카소네 내각은 민활정책을 도입해 재정이 취약한 상태에서 대외(미국) 경제 마찰을 해소하고 내수를 확대하려 하지만, 부동산 투기를 불러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버블로 향하는 기관차
l 기업들도 버블에 동참
- 기업의 뛰어난 경영실적, 풍부한 사내 자금 등 여유 자금을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도록 유도
l 중산층의 투기 열풍
- 1990년대 초반까지 높은 저축률과 경제 호황과 종업원에 대한 평생고용으로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하자 일본의 중산층은 부동산을 비롯한 투기 대열의 선봉
l 금융자유화
- 미국은 일본에 금융자유화를 강하게 요구하여, 1984년 엔-달러위원회가 21개 항목의 시장개방 정책에 최종 합의, 이후 일본의 금융자유화가 빠른 속도로 진전되며 금융시장의 탈선을 유도
l 과학기술의 발전과 투자의 시대
- 새로운 기술개발로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설비투자로 경기회복이 확산되자 재차 내수소비가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 형성. 자산가격마저 급등하면서 버블로 가속화.
l 신흥공업국(NIEs, ASEAN)의 역할
- 1980년 중반 이후 엔화 강세로 일본기업들은 생산비 절감과 시장개척을 위해 해외 투자 확대로 증가한 기업이익이 자산시장으로 유입되면서 자산버블 가속화
l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과 세계화
-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우려하던 일본인들은 공산주의체계의 몰락으로 심리적 안도감으로 일본 사회 전반은 버블을 만드는데 몰두
버블의 정점을 찍다
l 주가버블
- 1983년부터 20%가 넘는 주가상승이 7년 남짓. 풍부한 경상수지 흑자, 저금리 정책, 국토개발계획, 자본시장과 금융시장 자유화 등으로 1989년 말까지 일본의 주가는 상승 지속
l 부동산 버블
- 지가 급등은 1983년 도쿄 도심부터, 도교 전역, 지방으로 전파, 1991년까지 9년간 계속
- 자산버블이 빠르고 과도하게 나타나면서 주식과 토지의 1년 내 가치 증가 금액이 일본 전체 GDP를 상회하는 경우까지 발생
- 자산 가격의 상승이 새로운 산업의 발전과 국제경쟁력의 강화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투기적 자산 버블로 전환되었고, 1989년 12월 폐장일에 주가버블은 정점에 도달(38,915P)
장기불황의 출발
- 모든 버블은 저금리에서 시작되어 금리 상승으로 마감하며, 버블 붕괴의 최초현상은 주가 폭락
- 1989년 5월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상승 지속.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행이 9년 만에 금융긴축 실시.
- 통상 금리인상은 신속하고 소폭으로 움직이는 것이 기본이나, 1989년 5월 재할인율을 일거에 0.75% 인상해 3.25%로 올리고, 1990년 8월에 정점인 6%까지 대폭 인상.
- 그러나 적절한 시기를 놓친 금리인상은 오히려 버블 붕괴 속도만 가속화
- 1992년 8월 18일 63% 하락, 2003년 4월 28일 주가지수는 최고치 대비 80% 하락한 7,607P
- 금리인상 이전인 1989년부터 일본정부는 나름대로 자산시장 과열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왔다. 그러나 단기적 미봉책
- 1991년부터 대도시권 지가의 본격적인 하락 시작
- 일본사회는 부동산 가격 하락을 금리인상과 부동산대출 총량규제 등 다양한 부동산 안정대책을 써온 결과로 이해. 즉 정책효과로 부동산시장이 하락하는 것으로 판단(오판)
치열한 정책 대응 그러나
1990년 버블 붕괴로 2차 세계대전 패배와 맞먹을 정도의 불황에 빠진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10년 만에 경제의 역동성을 되찾았으나, 지금의 불황은 25년을 이어가고 있다.
l 안일한 대응(1990년 초반~중반)
1996년까지 일본은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써서 경기가 회복되면 다시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원상복구될 것으로 안일하게 생각 -> 경기부양책은 금리인하와 도로를 만드는 등 토건적 정책에만 치중
l 부실한 부실채권 처리
일본이 경제성장만을 추구하고 있는 사이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동반 하락하면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가 현실화. 공적자금 투입이 결정되고 부실채권 회수 체제가 정비되었지만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부실채권 처리 속도는 완만.
l 동아시아 외환위기로 치명상을 입다(1990년대 후반)
일본 대형금융기관의 연이은 파산. 누적되고 감춰졌던 부실자산이 표면화, 국제 금융시장에서 일본의 신임도가 급락
l 버블붕괴 후 2차 위기
- 금융 시스템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금융안정화 2법 제정 등 금융 재편 시작
-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일본의 장기불황은 구조화
l 갈지 자 구조개혁
l 소비세 인상의 오판
소비세 인상 전의 가수요로 1996년 경기가 회복된 것을 본격적인 경제회복으로 파악한 것은 오판이었다. 성급하게 재정지출을 축소하면서 내수시장과 경제전체가 회복될 수 있는 싹을 제거
l 장부상 평가이익에 현혹
- 부동산 가격이 정점 대비 1994년에는 50%, 2004년에는 1994년 대비 80%까지 하락
-> 부실채권 처리는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 당시 은행이 수십 조 엔의 토지 및 주식 평가차익을 보고 있던 탓에 안일 대응, 장부상 대규모 잉여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달리 공적자금 투입이 지연됨
- 1996년 하시모토 총리는 부실채권 문제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재정건전화를 위한 긴축예산을 편성했으나, 재차 일본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부실채권이 재등장했다.
l 고이즈미의 질주 ( 2001.4~2006.09 집권)
- 구조개혁과 정책조합 : '개혁 없이 성장 없다’
주요 은행의 부실채권 비율은 2001년 말 8.4%-> 2004년 말 2.9%로 하락
l 중국과 신흥국 부상의 수혜
2002년 이후 일본은 경기회복으로 부실채권 등 버블의 상처가 서서히 치유, 그러나 디플레이션은 지속되면서 이를 타개하고자 일본은행은 추가적인 금융 완화 정책 실시.
l 근본적 위기의 발생
부실채권이 절반 이하로 줄면서 일본경제는 안정감을 확보-> 그럼에도 내수경기는 수출경기에 비해 여전히 침체. 개인 소비나 주택 투자도 여전히 침체.
è 정책이나 대외 여건의 변화에도 일본의 내수소비는 미세한 변화, 제로금리에도 자산 가격은 부동. 일본의 구조적 변화가 표면화되고 있었다
l 아베의 등장
- 아베노믹스의 3개의 화살
1) 대담한 금융완화정책
2) 과감한 재정정책
3) 민간투자를 촉진하는 성장전략
=> 거의 모든 국가에서 행해진 경기부양책을 총망라하면서 그 강도를 가장 세게 하는 것이 특징
l 실패의 연속인가, 세 번째 성공의 출발인가?
-현재 일본은: 엔화 절하, 물가상승, 2014년 소비세 인상 후 경기회복 주춤, 지나친 우경화로 정치적 입지 약화
왜 일본은 장기불황에서 탈출하지 못할까?
<일본 내부적 구조>
l 파워엘리트의 과거 지향, 계층 이익 추구
l 고령화와 재생 효과
-2차 재건의 최초 주역은 1920~1930년대 생, 패전 후 일본의 도약을 이룬 중심 세대
1990년에 일어난 버블 붕괴를 이 정도 위기쯤이야 하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쪽.
l 무책임 정치 : 1987년~2000년 14년간 10명의 총리가 바뀜
l 미국 이해 중심의 대응
l 선단식 사회구조
- 발전지향형 국가로서 신중상주의형 국가 모델로서 상생으로 포장해서 특정 집단만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결과 당연히 리스크 관리도 어렵고 구조조정은 더욱 힘들어진다. 기득권 계층과 토건국가의 문제는 이런 사회 분위기의 결과물
l 관료와 기업 간의 결탁
- 이들의 결탁은 일본이 토건국가로 치닫게 되는 기초환경을 제공
l 토건국가
- 고도성장에 따른 개발 수요와 부동산 투기 붐이 일본을 완벽한 토건국가로 만들었다.
<구체적인 정책 실패>
결론 : 구조적 위기를 일상적인 경기침체로 인식해서 평범한 대책을 남발한 것으로 요약
첫댓글 에공!! 꼼꼼하게 했네!!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는데~
정리해서 보니 다릅니다
오늘 발제 때도 마무리가 이리 어려울 줄이야!! 도서 추천자로서 심히 미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