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눅 6:39)
=감리교의 위기, 남의 일 아니다
원래 이 글은 감리교·감신의 위기를 논하려 했던 글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쓰다 보니 한국 기독교 신학대 현실의 전반적인 정황을 얘기하지 않을 수도 없는지라 결국 논의가 더욱 확대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현재의 감리교는 정말이지 그냥 위기도 아닌 총체적 위기로 직면한 듯싶다. 물론 위기에 둔감한 자들은 인정하고 싶진 않을 테지만. 어쨌든 감리교 서울 연회(감독 김기택 목사)는 김홍도 목사에게 기소유예 결정(2006년 10월 9일)을 했고 그가 계속 목사직을 유지하도록 했다. 명백히 현감리교단의 헌법상으로 볼 때 적절치 않음에도 말이다. 종교지도자에 해당하는 목사라는 직분은 내가 볼 때 일반 사회의 기준보다도 더욱 엄격해야 한다. 그렇지만 감리교단은 분명하게도 이에 대해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록그룹 넥스트(N.E.X.T)의 <예수일병 구하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번쩍이는 저 바벨의 탑이여, 대량으로 생산되는 개나 소나 아무나 목자여, 황금의 소를 따라가는 눈 먼 양이여.”
솔직히 목사라는 직업은 매우 엄중하고 무거운 직분 아니었나. 그것은
<저 하나만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 한 사람으로 인해 그에 따른 수많은 사람들도 같이 걸려 넘어지기 때문>
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보수 측이 대다수 주류를 차지하며,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의 양태는 자기 교회 지도자의 신앙 칼라에 교인들이 좌지우지되는 원인도 한몫 작용한다고 본다.
즉, 자신이 속한 그
<교회 지도자가 얘기하는 기독교가 마치 전부 다 인줄 알고 있기에, 성도에게 당연히 교회 지도자의 선입견이나 무지 또한 고스란히 그대로 따라간다>.
바로 그래서 주께서는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말씀을 하셨지 않았는가.
결국
목사들의 무지가 곧
->그 밑에 있는 개신교 신자들의 무지로 이어지게 되고, 이들 가운데서
->다시 또 순진한 사명감으로 목사를 하겠다는 자들이 나오고,
->그 목사가 신학교를 나와 다시 또 교회를 세우고 하는 식으로, 궁극적으로는 그 교단 자체를 점점 보수화하는 데에 기여하는 치명적 악순환이 재생산하고 있다.
이번 김홍도 사건은 비단 감리교만의 위기로 봐서는 곤란하다. 늘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였다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기존 기독교의 몰락으로 치닫고 있음을 예고하는 사건이자 동시에 작금의 21세기 기독교가 결국은 전면적으로 다시 새롭게 바뀌어야 함을 예기하고 있는 징후적 사건이다.
=신학 현장과 교회 현장의 이원화 문제
내가 볼 때 현재 감리교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적인 목회 시스템이 교단 핵심 자리들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깊고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점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신학 현장과 목회 현장을 이원화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예전 감신의 신학 풍토에 비하면 현재도 많이 보수화되어 있다지만 그래도 그 신학현장 만큼은 어느 정도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여지들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
<신학 현장을 나와 목회 현장으로 들어가면, 신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라오면서 그 자신의 교회 시스템에서 익혀 왔던 것들을 뻔히 다시 재생산한다.
이러한 가운데, 작금의 신학 현장도 이제는 역공을 받게 되면서 보수적인 목회 시스템의 영향과 통제를 받는 심각한 지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참으로 감신신학의 미래에 있어서도 매우 우려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재 감리교신학대의 교수 연봉은 전국 대학들 가운데서도 매우 높은 최상위급에 속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 자리를 온전히 보존하고 싶은 게 당연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물론 그 중에는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학자님들도 계시겠지만, 내가 알기에 감리교 종교 재판의 칼날에 몸을 떠는 교수님들과 목사님들도 없잖아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분들이 어찌 감리교단에만 있을까. 장로교도에도 있고 진보적이라는 기장에도 있을 것으로 본다. 즉, 배운 대로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표명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목회 실습 교육의 문제점
신학 현장과 목회 현장의 이원화 문제는 감리교신학 뿐만 아니라 진보교단이라는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도 내가 알기에 그 이원화 문제가 심각하다. 이 점에 있어서 한몫 작용하는 게 바로 신학생들의 목회 실습 교육이다. 먼저는 이에 대해서 잠깐 얘길 해보겠다.
내가 보기에 신학생은 목회 실습을 통해 학부시절 때부터 신학 현장에서 배운 것을 실습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교회의 목회 방침에 따른 지침에 적응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 이뤄지고 있는 기존 목회 실습의 허와 실이다. 이것은 목사 후보생 시절이라는 신학교 때부터 목회 실습이 아닌 기존 목회 현장에 대한 체제순응을 오히려 몸에 습득하고 있는 셈이며, 이것은 결국 신학 현장과 목회 현장의 이분화 현상에 대한 악순환을 끊지 못하도록 만드는 치명적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고 하겠다.
물론 목회 현장의 분위기는 그 자신이 어릴 때부터 자라오면서 체득된 분위기이기에 매우 익숙한 것으로 이미 자기 안에 자리해 있기도 하다. 그리고 목회 실습이 기존의 목회 현장을 배운다는 점에서는 좋을 수 있다. 나이 드신 어른이나 노련한 경험이 많은 선배들의 목회 방식에는 분명 배워야 할 점이 아주 많다. 그러나 그것은 동전의 양 단면이다.
그것은 노숙한 반면에 또 한편으로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한국교회를 위한 참신한 개혁의 가능성들은 이미 여기서부터 좌절되고 있는 요소 또한 없잖아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 교회라는 집단도 혈연, 지연, 출신교회 인맥을 상당히 따지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기장 교인이라고 해도 역시 사람의 정서는 벗어나지 못하는가보다.
이렇게 학부 시절부터 체제 순응적인 목회 실습을 배운 신학생이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면 다시 또 반복하는 순환을 할 확률이 높다. 특히 큰 교회일수록 신학생에 대한 사상 검증과 열씸 검증은 필수적인 항목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 교회지도자가 평생―혹은 수십 년―을 애써 세운 큰 교회체제를 애송이 신학생에 의해 섣불리 뒤흔들릴 위험천만한 신학사상을 들여놓는다는 것 자체가 금물이고 탐탁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과중한 교회 업무 때문에 신학생들은 오히려 자기 공부 시간을 뺏기기도 한다. 작은 교회 같은 경우는 오히려 신학생들의 능력 발휘가 용이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작은 교회는 그 작은 ‘교인수’ 때문에 주로 보수적인 목회 방침을 취할 때가 많다.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교인수라는 것은 목회자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능력을 판가름 받는 기준이다. 교인수를 많이 거느린 목회자일수록 능력도,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인정받는다.
그래도 기장이 그나마 감리교보다 굳이 나은 점이 있다면 교수들이나 목사들이나 사상의 자유만큼은 -물론 내부적으론 갈등이 있을지라도 적어도 드러난 표면상으로는- 철저히 보장해준다는 점이다. 적어도 엄한 소리했다고 이단이니 삼단이니 해서 그거 가지고 모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선 좋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 한신대의 진보 신학도 옛말일 정도로 많은 부분들이 보수화되어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즉, 결국 교단 정치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어딜 가나 비슷하게 직면하는 현실인 것이다.
=교인수 증가로 평가 받는 한국교회
목회를 꿈꾸는 어떤 신학생이 있다고 치자. 그는 적어도 1~20세까지는 자라왔던 가정과 그리고 자신이 속했던 모(母)교회의 분위기와 영향력을 아주 크게 받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는 젊고 뜨거운 마음에 목회적 소명 의식을 가졌을 것이고 신학대의 문을 두드렸을 것으로 본다.
20~30대에 이르면 그때까지 속해왔던 교회의 영향에다 20대에 접한 신학대에서 배운 학문적 영향들이 새롭게 개입된다. 그런데 진보 진영의 신학대의 경우일수록 이 괴리가 매우 크다. 한때 내가 다녔던 한신대 신학과의 경우는 80년대뿐만 아니라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새롭게 만난 신학교 현장과 그때까지의 교회현장 간의 이 괴리로 인해 심각한 고민을 하던 학우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아예 사회운동을 하는 투사로 돌변하던가 아니면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떠나던가 했을 정도다. 들어가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학교’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으니.
특히 성서비평이나 정치 사회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한 민중신학 혹은 우리 전통문화와 종교다원화 시대를 숙고하게 하는 토착화 신학 등등 이러한 성과들을 진중하게 고찰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주는 심각한 도전들을 피해가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현장에 들어가면 신학현장에서 배운 대로 제대로 소화해서 나눠주질 않는다. 오히려 그러면 교인들이 교회를 나가버린다고 하는 볼멘소리나 한다.
그렇기에 30대 이후에는 다시 이전에 받았던 교회의 영향이 다시금 드세게 자리하게 된다. 특히 이즈음에는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들, 나 외에도 가족들에 대한 걱정들로 인해 그 진로에 있어서도 현실적인 고민과 선택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20대의 불같은 청춘의 신학적 열정도 다시 기존 교단이 요구하는 시스템의 자리에 귀속되기도 한다.
이후로는 교회현장의 자리에선 특히 ‘교인수’를 고민한다. 목회적 성공을 위해서는 신학교 시절에 배운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그것은 나이가 들수록 한때의 방황으로 치부되기 십상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에게 ‘교회 성장학’이라는 과목은 매우 각광받고 있는 현실인데, 나는 이들에게 기꺼이 냉소를 보내드리는 바이다.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교인수제일주의’만큼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도 없잖은가.
‘교인수제일주의’는 ‘교회제일주의’와 동일하게 여겨지고 마침내 이것은 ‘하나님제일주의’로 둔갑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교인수제일주의는 오히려 교단에게는 교세확장이라는 선물을, 목회자에게는 자기 가정의 밥줄 해결과 능력 과시에 대한 명예 그리고 교계 안의 상위권력 확보의 용이성이라는 흐뭇한 ‘종합선물세트’를 안겨주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께선 의인 열 명이래도 충분하다고 하셨잖은가. 그렇기에 깊숙하고도 끈질긴 이 폐단은 끊을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기독교계 안에 매우 만성적으로 고질화되어 있는 형편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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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수 제일주의'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교회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는 현상이다.
즉,
교인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면서 가지는 '우상'을 목회자가 깨뜨려 주어야 하는 것이 '목회'라고 할 수 있는데,
오히려, 목회자가 먼저 '교인수'를 의식하는 '부흥' 제일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이 한국교계의 가장 큰 난맥상인 것이다.
정말 '부흥'을 꿈꾸는 목회자라면, 교인수을 의식하는 이벤트성 부흥회등으로 시간낭비, 돈낭비 하지말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교인을 가르쳐, 그들이 하나 하나 전도사가 되어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가르쳐 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즉, 교회는 하나 하나의 주의 군병을 양성하는 '훈련소'와 같다. 지도관인 목회자나 중직자는 훈련병들을 훈련시킨 후, 세상속으로 내보낸후, 그들의 '간증'을 통하여 실제경험을 재교육함으로서,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지, 유명 부흥사 누구 누구를 불러다가 쓸데없는 몇 마디 듣는다고 나아진다는 것은 아마도 지도자 당사자도 믿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부흥되려면
1.교인을 양육해야 한다.
거의 달란트에 따라서는 '전도사'수준으로... 그래서 교인이 목회자나 전도사보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00교회는 교육인적자원이 풍부했었다.
사경회나 프리셉트등의 가능한 성경공부반을 운영하고, 주일학교에 투자하여, 그들이 한국 또는 세계 어디를 가든지 '역량있는 일꾼'이 되게 하는 것이 00교회의 사명이고 달란트라고 본다.
2.주일학교를 양성해야 한다.
수입원천이 되는 장년은 목회자들에게는 '현금'으로 통하고, 주일학교는 언제 '빼먹을지 모르는 '공수표'로 통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목회자가 아니면, 거의 주일학교에 관심이 없다.
그냥, 나이든 연금나오는 노년층 교인들을 만족시키는 이벤트나 벌이고, 일년 몇 번 경치좋은 곳에서 말만 번드르한 '친목모임이나 단합대회'등을 열면 환영을 받는다.
하지만, 주일학교는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되질 않는다.' 그래서 진정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목회자가 아니면, 하지 않는 부분이다.
3.시각을 교회밖으로
한국교회의 병폐는 모든 교인의 관심을 교회건물 안에다 묶어놓는 것이다.
교회밖에서 벌어지는 시사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되는지...어떻게 성경적으로 자녀를 교육해야 하는지...직장에서 어떻게 신앙인의 모습을 유지하는지..에 관한 집중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4.일하는 교인으로
허드렛일이나 단순노동과 같은 일은 교인에게 맡기고, 중직이나 목회자는 정신적인 기획이나 지도만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다.
중직에게도 정신적인 것보다 몸을 써서 하는 일에 달란트가 잇으면 그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고, 교인이라도 정신적인 일에 은사가 있으면 그는 정신적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려면, 교회제도가 위원회 중심으로 바뀌어야 하고, 교인이 단순 복종하는 일에서 창조적이고 실제적인 달란트를 활용하는 일을 함으로서, 하나님이 부여한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지도자가 할 몫이고, 중직이 할 일이다.
어떤 교회는 기획이나 교회운영은 부목회중심의 교직자위주로 운영을 하는 모습을 본다. 언제부터 목회자가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재정과 운영 기획에 중점을 두었는지는 몰라도, 혹 그런 교회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교회가 <절대로 교인을 성장시키지는 못한다.> 그런 구조는 교인은 일개 '하부구조'의 멤버일 따름으로 취급할 뿐이지, 역량있는 '어른 교인'으로 자라게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여할 기회가 없는 교인이 어떻게 성장이 되겠는가?
5.언로가 개방되어야 한다.
한국교계만큼 썩은 곳도 없다할 정도로 최근 감리교의 김모 목회자의 추문은 악취를 풍긴다.
그의 법원판결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여야 할 총회는 오히려,그에게 면죄부를 주고, 목회직을 유지하게 하였다. 한 마디로 돈줄이 나오는 곳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의 개인적인 '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감독이 감독할 일을 면죄부를 주어버리면...교회의 감독기능은 어디로 가는가? 한마디로 교인이 불법으로 횡령을 해도 그를 다스릴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강변할 것이다.'아, 목사도 간통하고 멀쩡한대, 돈 몇푼 챙겼다고 문제될 게 있냐요?'라고...
이러한 것은 언로가 보장되어 있지 않고...교인들이 '신앙의 양심'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고 하는데...천만에...또한, 그러한 교인의 지적에 대해 목회자들은 '창피'한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 목회자들은 '창피한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을 '철면피'라고 한다. 거기에다가, 영적인 눈이 감긴 맹종교인들은 무조건 '목사편은 하나님편'이라는 공식으로 무비판의식으로 일관한다.
사람의 목소리가 없는 게시판...이것이 00교회의 현실이다.
그곳에 '살아있는 신앙의 양심'은 없다. 있더라도 '질식'할 것이다.
첫댓글오늘날 교계의 현실을 알아 간다는 것은 가슴 답답한 일입니다.. 성도 개개인이 전도자가 될 능력을 갖추는게 정말 중요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선교원은 `돈`이 안된다고 없애는 추세입니다.. 갑갑한 현실속에 한영혼이라도 더 깨어 있기를 바라며 나자신부터도 더욱 말씀에 서며 기도에 힘써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모든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현실입니다~~
첫댓글 오늘날 교계의 현실을 알아 간다는 것은 가슴 답답한 일입니다.. 성도 개개인이 전도자가 될 능력을 갖추는게 정말 중요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선교원은 `돈`이 안된다고 없애는 추세입니다.. 갑갑한 현실속에 한영혼이라도 더 깨어 있기를 바라며 나자신부터도 더욱 말씀에 서며 기도에 힘써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모든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