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비가 섞어 내리는 31절날 영화 보러 코엑스-메가박스에 갔다. 공자(孔子)를 보자니 집사람은 무슨 공자 같은 소리냐고 한다. 그러나 중국 당국이 “아바타 대신 공자를 상영하라” 고 할 정도면 꽤 괜찮은 영화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중국 언론들은 영화계와 극장 관계자들을 인용해, 당국이 22일께부터 아바타 2-D판 상영을 모두 중단하고 3-D판만 상영하도록 통지를 내렸다고 전했다. 중략 (中略)
‘공자’는 중국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유교 사상 재조명 붐을 타고 제작된 영화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콩 배우 저우룬파(주윤발)가 ‘(*)중화 민족의 성인’ 공자의 일대기를 연기한 작품이다. 최근 전세계 각지에 공자학원을 세우는 등 유교 사상을 강조하고 나선 중국 정부가 <아바타> 열풍 때문에 <공자>의 흥행이 타격을 입는 것을 우려해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후략(後略)..
(*) 중화 민족의 성인이라? 공자가 중화민족의 성인이면, 석가모니는 인도, 예수는 유대의 성인인가? 중화민족으로 한정(限定)하는 바로 그 순간, 인류의 사표(師表)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한다는 것을 왜 눈치채지 못 하는지?
이리하여 영화 공자를 보았지만, ‘어디 아바타에 감히 갖다 대니껴 !’ 라는 기분이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친…
영화 공자는 다음 포인트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첫째 재미
내용이 황당무계한 것은 아바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바타는 3D, 그래픽 기술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상영시간 내내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공자’도 엄청난 규모의 세트와 인원을 동원했건만 슬프게도 어설프다.
둘째 재미 대신 유교가 무엇이냐고 가르쳐 주기는 하는가?
공자의 중심사상은 인(仁)이다. 그러나….
사진은 영화 공자 포스터다. 맨위에 “천하통일을 위한 눈부신 지략” 이란 글귀가 있다.
공자가 과연 눈부신 지략가(智略家) 맞는가? 아무래도 중국 공산당은 법가(法家)와 종횡가(縱橫家) 쪽에 미련이 많은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이야기를 하면서 인(仁)을 빼 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패권주의적 스펙타클이 나오다가 유가(儒家)적 면모가 튀어 나오니 도대체 뭘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인지? 메시지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액션 장면이 짜임새있고 재미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셋째 그럼 공자의 일대기라도 성실히 나타냈느냐 ?
역시 아니다. 뭔가 노력은 한 것 같으나, 논어를 읽지 않았다면 저건 도대체 뭐지 하면서 갈피를 못 잡을 것이다.
상하사불급(上下寺不及)-윗절에도 못쓰고 아랫 절에도 못쓴다로, 이일 저일 벌여 놓았지만 아무 실속이 없을 때 쓴다. ‘공자’는 여기도 못 끼고 저기도 못 끼며, 게도 구럭도 다 놓친 영화다.
얻은 교훈은 용 쓴다고 좋은 영화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쨌던 돈 내고 (표값+기름+주차+점심에 ...거의 5만원 수준) 보았으니 몇 장면 회상해 본다.
절하는 장면
영화가 시작하면 주윤발-공자는 노(魯)나라 도읍 궁궐 대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한다. 들어가서 군주를 뵐 때 큰 절을 또 넙죽 한다.
중국 고대에는 황제와 승상이 의자에 같이 앉아 마주 보고 의론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황제는 앉고 승상은 서서 아뢰게 된다.
나중에는 황제가 앉으면 승상은 그 앞에 꿇어 엎드려 고개도 못 들게 된다. 곧 군주의 권력과 위상이 나중으로 내려오면서 절대적이 되어 간 것이다. 이점이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유가(儒家)에는 군주를 가르쳐 천하에 인(仁)을 펼치게 하는 스승, 빈객(賓客) 이라는 강렬한 자부심이 있다. 특히 맹자(孟子)는 “세상에는 군주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신하가 있다 (맹자 자신을 가리킴)” 는 말까지 하였다.
공자가 군주를 뵐 때 합당한 예(禮)를 갖추긴 했을게다. 그러나 영화의 절하는 장면을 보니 공자를 군주의 스승, 빈객의 측면 보다는 충성심에 가득 찬 신하의 면에서 접근한 것 같았다.
회맹(會盟)
영화 공자에는 제나라와 노나라가 높은 단을 쌓고 회맹하는 장면이 나온다.
공자의 전략가(戰略家) 라기 보다 전술가(戰術家)-연대 작전참모 정도의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회맹단 모양이 어쩐지 눈에 많이 익다. (전체가 나온 사진은 못 구하였다) 바로 마야나 아즈텍의 제단-피라미드다.
사진: 마야 티칼 피라미드. 영화 공자의 회맹단은 이와 비슷하게 꾸몄다.
마야나 아즈텍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사제들은 끌려 올라 온 포로의 심장을 돌칼로 갈라 꺼내서 불에 태웠다. 그 뒤 시체는 발로 차서 계단 밑으로 땍떼굴 굴러 떨어뜨린다. 그러면 밑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 달라 들어 살을 발라 먹었다고 아즈텍을 습격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기록을 남겼다.
이런 걸 영화 공자 제작팀은 폼 난다고 생각하여 비슷하게 본 뜬 모양이다.
이 회맹단 장면에서 영화 스펙타클이 절정을 이루는데, 법가, 종횡가, 병가(兵家) 적인 면모로서 공자를 이해하자면 그게 될 일인가?
수레 끌고 가다가 흙탕물에 드러 눕다
노(魯)나라에서 드디어 배척당한 공자는 혼자 수레를 끌고 길을 떠난다. 비는 논날 같이 내리는데 흙탕에 바퀴가 빠져 버린다. 그러지 않아도 분기탱천, 끓어 오르는 열기를 참지 못하던 공자는 말을 채근해 보지만 기어코 넘어져 하늘을 보고 드러 눕고, 억수로 내리는 빗속에서 뭔가를 깨닫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좌절과 깨달음 이런 걸 표현하려고 한 듯 하지만 공자의 평생 생애는 감정의 조절, 절도 있는 행동 이런 것이었는데 영화는 너무나 현대적으로 해석하였다.
남자(南子)
영화에 나오는 여자는 공자의 부인과 딸도 있지만 거의 부엌데기 수준이다.
사진: 공자 가족. 전원일기 장면 같다. 왼쪽 두번 째가 공자 부인이다.
영화에서 그나마 색기(色氣)가 흐르는 여자는 위(衛)나라 군주의 부인- 남자(南子) 딱 하나다.
사진: 위(衛) 영공(靈公)의 부인-남자(南子)
논어 옹야(雍也) 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공자께서 남자(南子)를 만나자 자로(子路)가 기뻐하지 않았다(不說). 이에 공자께서 맹세하셨다. 내가 만약 잘못한 것이 있으면 (予所否者) 하늘이 나를 미워할 것이다. (天厭之 天厭之)’
남자(南子)는 여자에다 평도 좋지 않았으니 상대가 될수 없는데 공자가 만나러 갔으니, 자로(子路)가 화가 났던 것이다. 남자(南子)는 위나라의 실력자니까 경륜을 펼치는데 혹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영화는 그런 면보다는 색(色)의 유혹을 공자가 뿌리치는데 초점을 두었다. 별로 감명 깊게 처리하지는 못했지만.
공자 부인 이름은 올관(兀官)씨, 병관씨 또는 기관씨로 전한다. (영화 자막 표기는 정확하게 뭐였는지 잊었지만 내가 알던 것과 다르다)
그런데 공자는 이 부인 올관씨와 이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왕 남자(南子)의 유혹을 받는 장면을 넣었으면, 부인과 갈등-이혼하는 이야기와 같이 엮었으면 스토리 텔링이 더 좋지 않았을까?
공자는 어지간히도 세력자들과 줄을 대려 했다. 군주들은 물론 평이 좋지 않은 인물들 양호(陽虎 또는 陽貨), 공산불뉴 (公山不뉴)등 과도 만나려 했다. 공산불뉴는 이번 영화에서 계강자의 부하 공산유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공자에게 자기와 손잡자고 유혹하기도 한다. 상당히 각색은 되었지만 기본은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
죽간(竹簡)
공자 일행이 천하를 주유하다가 마침내 노나라로 돌아온다. 그런데 수레 하나에는 죽간(竹簡)이 가득 실려 있다. 지나가던 연못 얼음이 갈라지고 이 죽간 수레가 물에 빠진다. 그러자 공자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 안회(顔回) 첨벙 스쿠버 다이빙해 들어가 죽간을 건져 내다가 마침내 빠져 죽는다.
말이 전혀 되지 않는 장면인데, 공자 시대까지만 해도 종이에 글을 쓰지 않고 목간(木簡)이나 죽간(竹簡)에 썼다.
(*) 종이를 채륜이 발명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종이는 채륜 나오기 1천년 전부터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단 이때는 글 쓰는 용도 보다는 포장자재로 쓴 것 같다. 채륜이 이걸 획기적으로 개량했을 가능성은 있다.
冊 (책) 은 이 목간 또는 죽간의 생김새를 상형(象形)한 글자다. 卷(권)은 종이 두루마리를 상형(象形)한 글자다.
공자 일행이 수레 한가득 죽간을 실었지만 거기에 실린 정보의 양은? 오늘 날 A4 용지 책 한 권 분량이나 되었을까?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남자라면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 는 소리도 오늘 날 서적으로 치면 몇 권 되지 않을 것이다.
순장(殉葬) 장면
노(魯)나라 중신 계환자 인지 계평자 인지가 죽자 노비들이 줄에 묶여 끌려 간다. 가는 곳은 무덤으로 묘 안에서 노비들을 무사들이 칼로 쳐 죽인다.
어린아이 하나가 어머니가 품으로 감싼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어느새 무덤 문이 밖에서 드르륵 닫쳐 버린다. 산채로 무덤에 갇친 것이다.
죽어서 순장(殉葬) 당하는 것 보다 더 끔찍하게 되어 버렸다. 영화는 거기서 장면이 바뀌지만 그 어린애 어떤 식으로 죽어 갔을까?
또 끌려가던 노비 중 하나가 도망을 가다가 한 칼 맞지만 간신히 주윤발-공자의 집으로 숨어든다. 공자는 이 어린 노비를 궁궐로 데려가고 순장을 금지하자는 주장을 공론에 붙여 통과시킨다.
순장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 차츰 줄어 들면서 사람대신 인형-도용(陶俑) 으로 대신하다가 진(秦)나라 때 없어진다. 공자 혼자 나서 없앤 것은 아니었다.
노(魯)는 전국칠웅(戰國七雄)에 끼지 못한 작은 나라였다.. 또 계손씨의 권세는 군주를 능가했지만 어디까지나 노나라의 신하였다. 그것 감안하면 무덤 안이 너무 크지만, 보는 즐거움 때문인듯.
중국 은나라 시대에는 순장이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커다란 묘 하나에 3-400 명에 이르는 노예들이 순장되곤 했다
고고학적 증거를 가지고 추정하면 노예들은 10 명이나 20 명씩 한 줄로 뒤로 묶여 묘도에 들어와 바닥에 꿇어 앉혀져 하나씩 목이 잘려 나갔다. 그 다음 머리가 없는 시신을 매장하여 흙을 덮어 평평하게 한 후 사람의 머리를 하나씩 묘실을 바라보게 하여 줄을 맞추어 늘어 놓았다. 대부분 스무 살이 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주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산 채로 묻힌 경우도 있었다.
순장은 대강 진(秦)나라 이후 없어지나, 황실(皇室)에서는 면면히 내려와 명(明)나라 때까지도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을 따라 죽이곤 했다. 이 중국 황실 순장 정황이 엉뚱하게도 우리나라 조선왕조 실록에 남아 있다.
명나라 초기 조선에서 간 공녀(貢女)가 영락제(永樂帝)의 총애를 받다가 순장 당하였는데, 그 공녀를 시중 들던 여자가 돌아와 전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1424 갑진, 명 영락(永樂) 22년) 10월 17일
…. 황제가 죽자 궁인(宮人)으로 순장(殉葬)된 자가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작은 평상을 놓아 서게 하고,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어져 죽게 되었다. 한씨가 죽을 때 김흑(金黑)에게 이르기를, “낭(娘)아 나는 간다. 낭아 나는 간다.” …..
위 한씨란 바로 한확의 누이동생으로써 공녀(貢女)로 갔다가 일을 당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순장을 했다. 부여에서는 귀인이 죽으면 많을 때는 100명을 순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도 왕이 죽으면 남녀 각 다섯을 순장하다가, 지증왕 3년 (서기 502년)에 와서 금하였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있다.
얼마전 CT 촬영, 3D에 뭐 디지털 기술, 법의학 기술, 학제간 연구 등등으로 복원에 성공했다고 한참 떠들석 했던 가야 소녀도 실은 순장자 였다.
사진: 창녕 15호분에서 발굴하여 최근 복원한 가야소녀.
이 소녀는 가야 정권의 핵심인물이 죽자, 다음 세상에서도 섬기기 위해 독약을 마셨거나 질식사 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산채로 묻히지 않고 먼저 죽인 뒤에 묻었을 것이다. 여러가지로 보아 노비는 아니고 지배계급에 속한 여자 같다고 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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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룡초부 원문보기 글쓴이: 구룡초부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항상 즐겁게 보고 많은걸 배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