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것은 지휘관이다. 중대장 이상을 지휘관이라 부른다. 인연은 아름답다. 가운데서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찾는 장교가 대대장 김화중 중령이다. 맨 왼쪽은 이종현 대위로 부산 출신(당시)이다. 한데 지난해 12월 24일 역시 안보 강사로 121기보대대로 갔는데, 세상에 그가 소령으로 진급하여 그 대대 작전과장으로 와 있지 않은가?
벽에 게시되어 있는 역대 대대장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김동률 대령이 중령 때 대대장으로 근무했었기 때문이다. 중령으로 진급하면 첫 보직이 대대장이라던가? 김화종 중령과 이종현 대위 사이의 장교는 정용문 대위. 전라남도 장성 군수지원 부대 **작전참모로 근무. 키도 엄청나게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지만 단련된 몸이다. 북한 군 장병과 맨몸으로 싸운다면 서녀 명쯤은 능히 해치우리라. 물론 카톡으로 수시로 연락이 오간다. 만세! 조국의 산하를 지키는 26사단 장병들. 참, 구겨진 베레모의 대위 계급장이 찬란하다>
드디어 12월 16일이 되었다. 26사단 73여단 123기보대대로 가는 날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부대에 도착햇다. 위병소에 신분증을 맡기고. 대신 출입증을 받아 가슴에 패용했다.
에버랜드에 나가는 사위 돈 보스코가 하루 연가를 내서 실어 준 게 얼마나 고마운지--.아니면 용인에서 택시를 타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차 안에서 참 행복한 노인, 아니 老兵이라고 생각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가톨릭 신자라서 자랑스러웠다. 그리운 母部隊에 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다리를 놓아 주시지 않았는가?
위병소에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받아 가슴에 패욤했다. 장병들은 군데군데서 거수경례를 올려부치고 부르짖었다.
"공격!"
대대장실로 가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대대 간부들이 전부 모여든다. 작전과장 (소령)/ 줃대장 및 참모/ 주임 원사 등등. 김화종 중령은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게다가 교우라서 더 믿음이 갔음은 물론이다. 의령 출신, 앳돼 보이는 여자 부사관이, 총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가까운 데서 병사들을 돌보고 있었다. 어김 없이 공격!
교육장은 유감스럽게도(?) 대대 교회(대대 규모에는 교회는 있지만, 성당은 없다/ 앞으로 가톨릭의 과제랄 수밖에). 내가 세상에 나고 나서 처음으로 300-400명 장병들 현역 앞에 서는 순간이었다. 위는 흔히 장병이라 하는데 장교와 병사를 합해서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론에서도 병사 하나만 보고도 장병이라니 참으로 답답했던 차--.그야말로 중령에서 부사관 이등병까지 모였으니,
"將兵 여러분!"
하고 마음 놓고 부를 수 있었다.
노래부터 불렀다. '전우야 잘 자라' / '전선 야곡'. 움츠리거나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내 목소리는 크고 싱싱하니까. 그리고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목에 담았다. 애간장을 녹이는 슬픈 표정으로 바이브레이션을 넣어 허공에 띄웠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임)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감옥 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 십 년이 가도----
왜 하필이면 이 노래일까?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배가 있었다. 배에 탄 사람 중에 누가 숲에서 원숭이 새끼를 붙잡아 실었더란다. 어미는 슬피 울고 몸무림치며 끝까지 따라 왔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어미가 뱃전에 오르더니 그대로 숨을 거둔다. 하도 이상하여 배를 갈라본즉 창자가 한 치 끊어져 있더라는 것! 미물도 자식을 잃거나 자식이 다치면 창자가 끊어지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반야월이 미아리 고개에서 딸을 잃었다. 포연이 자욱한 가운데서 어쩔 도리 없이 나무가지로 땅을 파고 시신을 묻었다. 겨우 흙으로 그 위를 덮었다는 얘기다. 그러고 쓴 가사가 '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 했다. 그걸 구연하고, 나는 덧붙였다.
"다치지 말아요. 손가락 하나라도 군에서 다치면, 엄마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면서 들먹인 건 <효경>의 한 구절이다. 身體髮膚는 受之父母라 不敢毁傷이 孝之始也요(내 몸과 터럭과 피부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는게 효의 첫걸음이니라.) 그 다음에 이어지는 立身行道--는 제대 후에 할 일이니 덧붙일 필요가 없고. 엄청나게 노래를 뒤섰었다. 老軀를 마구 흔들어 제끼며 막춤도 췄다.
이제 훈련을 마친 이등병들이 수두룩해서 그들을 불러 내어 노래를 시켰다. 단체로 개인으로. 그런데 녀석(워낙 사랑하기 때문에 이 호칭을 서슴없이 쓴다.)들은 제창곡으로 '땡벌'을 택했다. 隔世之感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6-25 한국 전쟁 때의 그야말로 눈물 나게 하는 또 다른 감동 실화를 들려 줬다. 중공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이는 현장. 어느 병사가 중상을 입었다. 양쪽 팔다리는 물론 시력도 청력도 잃었다. 오직 남은 건 몸통과 울부짖음뿐. 병사는 엄마만 찾았다. 시골에서 엄마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군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 줃대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마는 말 없이 저고리를 벗는데--.
<병사들을 모아 보니 이등병이 대부분(?). 녀석들에게 노래를 시켰다 '땡벌'을 제창하기에 나는 당황했다. 아직 그 노래를 익히지 못해 부끄럽지만, 곧 내 걸로 만들어야겠다. 대신 '사단가'는 그들보다 내가 더 잘 부른다. 김동진 선생이 작곡한 거다. 눈부신 햇살 아래 옥토 삼천리/ 짙푸른 향내나는 내 조국 강토/ 어둠이여 사라져라 찬란한 아침/ 지켜서 억만년을 누려 보리라/ 아아 우리는 불무리의 용사/ 지칠 줄 모르는 불무리 용사
촌 늙은이가 서울엔 자주 간다. 부대에서 귀가할 때는 서울 역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을 한다. 하릴없는 사람처럼 서울 역 광장을 휘젓고 다니거나, 매표창구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 롯데 매장인지 뭔지 거기에도 들어가 본다. 행여나 26사단 병사를 만날꺼 싶어서. 따끈한 어묵이라도 대접해야겠는데, 그 기회를 주님께서 아직 한 번도 안 주셨다. 역전에 담배 피는 공간이 있다. 거기 가면 병사들이 많이 모여 있다. 거기서도 만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 꼭 피워야 할 처지라면 두어 갑 사서 건네 주고 싶어서다. 대신 여성 흡연자가 그리 많은지들이 놀랄밖에.
윤성필 행정 부사단장(대령)을 14년 12월 31일 별도로 만났다. 곧 제대한다나? 그가 군복을 벗으면, 안보 강사로 제 역할을 나가겠단다. 우리 둘은 의기투합(?). 26사단신병교육대에서 그가 강의하고, 나는 사단가를 가르쳤으면---.놀라지 마시라. 그는 혼자서 부사단징실에서 마술 공부를 틈틈이 하고 있다. 3월에 그를 찾아 사단에 간다. 그도 진정한 군인이다. 사단장 이하 만나는 모든 간부(하사 이상)들이 촌늙은이에게 '선배님'이라이라고 깍듯이 부른다. 나는 26사단과 더불어 여든까지 늙어갈 것이다.>
그렇게 거의 두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벌어진 출입문 틈으로 대령 계급장을 단 사람이 불무리 성당의 최승호 주임신부와 나란히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약간 긴장될 수밖에. 마지막으로 대대장/ 작전과장/ 중대장 / 참모 등을 불러세웠다(?). 노래 한 곡을 시켰음은 물어보나마나. 나는 호기롭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사단 사령부에 근무할 때,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었다. 대대장도 마흔 두서너 살이니, 내가 제대하고 나서 한참 있다가 고고의 성을 울렸을 터. 하물며 다른 장병이겠는가! 그러나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먼저 경례를 부치는 대령은 예외였다. 그가 두어 살 때, 나는 제대 후 교단에 복직하였으니--.어쨌든 대대장은 내게 그를 소개했다.
"여단장님이십니다."
나는 놀랐다. 여단장이라면 스타 즉 준장인 줄 알았는데, 대령이라는 거다. 내가 군에 있을 때는 당연히 연대장이었으니. 그런 의아심을 가질밖에. 군의 계급 편제는 그렇게 바뀌어져 있었다.하여튼 다시 대대장실로 옮겨 차를 한 잔씩 나누고 나는 귀로에 올랐다. 김동률 여단장은 군인 중의 군인이다. 그 바쁜 중에 카톡을 보내면 바로 회신한다. 물론 그가 먼저 소식을 전할 때도 있다.
26사단 맹호 여단을 이끄는 여단장 김동률 대령! 굉장한 군인이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고 했다. 26사단장 양병희 소장이 그의 직속 상관이다. 사단장을 만나는 이야기는 차라리 극적이다. 13년/ 14년 사단 사령부 간부들과 함 자리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26사단 모든 장병들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한다. 노병은 아직 살아 있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지금은 김동률 대령이 자리를 옮겼지만, 후임 오재균 대령도 그에 못지 않다. 그런 군인이 있는 26사단 만세!
<우리는 흔히 장병이라면서 병사 혼자를 보고도 그렇게 부른다. 아니다. 장병은 장교와 병사다. 중령과 이등병까지 다 모였다. 그 속에 한 노병이 섞여 있으니, 참으로 왜소하고 꾀죄죄하다는 자평을 내린다. 그래도 주님의 보살핌으로 안보 강사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해가 바뀌어 13년 겨울이 되었다. 나는 일반 예비역 하사로서 前無했었고, 後無할지 모를 사단장과의 만남을 갖는다. 머릴 깎고, 군복을 입고, 부대 숙소에서 이틀 자고---.14년 말에는 용인에서 새벽 6시에 출발, 도중에 공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장병들 앞에 섰다. 16일(전곡 소재 121공병 중대 및 정비 중대) 22일(57전차대대) 24일(121기보대대-파주/김신조 무리가 내여 왔었던 그 코스 근처) 31일(오전/ 오후-여단 본부와 12기보대대)이 세상을 떠날 날이 그리 머지않은 노병에게 진정한 소명이 무엇인가? 강변하자. 주님께서 나를 심부름 시키신 거다. 주님께 감사를 드릴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