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구리하라는 백제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준 왜왕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왕 해서공(海西公)이 칠지도를 제작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증여했다고까지 주장한다.
‘후왕’에 대해서는, 1975년 진보 기미코(神保公子)가 <칠지도의 해석을 둘러싸고>를 통하여 한대(韓代) 이후 금석문에는 ‘의후왕(宜侯王)’이란 단어가 관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신분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라기보다 통상 사용하는 길상어로서의 의미가 강하다고 주장한다. 즉, ‘후왕’은 일반적으로 신분이 높은 유복한 사람을 가르키고 있을 뿐이며, ‘의후왕’은 고귀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용어로 상하관계를 직접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1976년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는 <칠지도의 명문을 읽다>에서 공공(供供)이란 문자가 공공(恭恭)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공손하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이 부분을 ‘공손한 후왕에게 잘 어울립니다’라고 읽었다.
1983년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는 <이소노카미신궁칠지도명에 대한 일시론>에서 ‘왜왕지’는 증여 주체인 ‘백제왕세자’ 다음의 ‘기(奇)’를 인명으로 보고, 당시 세자였던 귀수(貴須 뒷날 근구수왕)를 이 한 문자로 표현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왜왕 '지'와 백제왕세자 '기'는 똑 같은 형식이며, 어느 쪽의 우위를 표현한 말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를 일컫는 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1년 요시다 아키라(吉田晶)는 <칠지도의 수수께끼를 풀다>에서 동아시아 세계에선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지위나 칭호만 부를 뿐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말했다. ‘지’와 ‘기’ 모두 인명이 아니며, 왜왕과 백제왕세자라는 호칭을 통해 대등성을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왕이 아니라 세자와 왜 왕을 대등한 상대로 삼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백제는 스스로를 우위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한 성진(聖晋)에 대해서는 명문의 문자 해독에 힘써온 무라야마 마사오(村山正雄)는 ‘聖音’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불교 용어로 이해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는 1989년 <고대의 일조관계>에서 기무라 마코토(木村誠) 는 2000년 <백제사료로서 칠지도명문>에서 도교와 관련 지어 설명했다. 그리고 요시다 아키라는 ‘백제왕세자기생성음’을 ‘백제왕의 세자, 이상(奇)하게도 성음으로 살고’로 읽었다.
◆일본은 '백제의 후국'이다
어쨌던 칠지도 명문에는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복속되었다는 증거로 삼을 만한 내용은 전혀 읽어낼 수가 없다. 따라서 제작과 증여의 주체인 백제의 관점에서 명문의 내용을 근거로 다시 살펴봐야 한다. 다음과 같이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칠지도가 조작되었으며 칠지도는 분명 하사품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1. 징구왕후에 관한 기록은 일본학자들도 인정했듯이 칠지도와 관련된 년도와 약 120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 ‘임나일본부’에서 밝혔듯이 일본 학계의 정설은 5세기까지 일본열도는 100여 개로 흩어져있던 부족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철을 생산할 수 없는 역사의 여명기(黎明期)였다고 한다. 이 시기 백제는 오오진(應神) 태자의 스승인 아직기, 일본문화의 시조로 불리는 왕인(王仁)박사를 일본열도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한자와 한학을 전파하는 등 수많은 백제의 선진문물을 일본열도에 전파시켰다. 이리하여 일본열도에는 아스카문화를 꽃피워 제1차 한류열풍인 '구다라나이(百濟無り)’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구다라나이를 직역하면 '백제는 없다'라는 뜻이다. 이 말의 본 뜻은 백제의 물건이 아니면 필요없다. 즉 '백제의 모든 것이 최고다'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 제1차 한류열풍인 ‘구다라나이(百濟無り)=くだら ない’ 열풍은 4세기경부터 시작으로 7세기 정도 약 4백 년간 일본열도에 불어 닥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다라’라는 발음과 뜻에 엄청난 역사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 고구려를 일본말로 표현하면 고우쿠리(こうくり). 신라는 시라기(しらぎ). 가야는 가라(から)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백제라는 한자를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햐쿠사이(ひゃくさい)’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로 굳이 발음하고 있다. 이에대해 교토대학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은 ‘구다라’라는 뜻은 큰나라(大國)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이더라] 저자 김향수씨는 '구다라'는 말의 어원은 ‘큰나라(大國) → 군나라 → 구다라’로 변천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국사사전에는 매우 의미 심장한 기록이 있다. 즉 ‘구다라’라는 뜻을 찾아 보면 ‘그 뜻에 일본과 백제의 역사적 관계의 수수께끼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음미해보면 일본 역사학자들이 고대 한일 간의 역사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밝히지 못하는 속내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일본은 백제를 ‘큰나라’로 섬겼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구다라'는 최고라는 의미의 최상위 형용사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백제가 일본보다 위에 있는 상위 개념을 넘어 선다. 즉 일본열도가 백제의 후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3. 당시 백제는 남하하려는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2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의 근초고왕은 세자 귀수에게 명령을 내려 반격을 시도했다. 371년 고구려가 다시 공격해 오자 백제는 3만여 명의 병사로 반격하여 오히려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 고국원태왕을 죽였다. 이는 백제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는 잣대이다. 일본측 주장대로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다면 동아시아를 제패하고 있던 고구려를 침공할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보유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위치에 있던 백제왕이 왜왕에게 복속(服屬)해서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하는 것은 동아시아 및 백제쪽 정세를 살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 중국의 역사서를 살펴보면 진나라가 건국된 다음해인 266년에 히미코의 뒤를 이은 이요(壹與)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413년 왜5왕(五王)이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간까지 약 150여 년에 걸쳐 왜는 중국의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이를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주장하듯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할 정도로 강성했다면 150년 동안이나 중국역사서에서 사라질 이유가 없다. 또 일본측의 주장대로 진나라가 백제로 하여금 일본에 하사하도록 지시했다면 더더욱 중국의 역사에는 왜에 대한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일본측의 헌상설은 설득력이 없다.
5. 일본에는 중요한 역사 사실을 밝혀주는 청동거울이 있다. 현재 와카야마현(和歌山縣) 하시모토시(橋本
市) 쓰다하치망신사(隅田幡神社)에 보관되어 있는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다. 고대에 있어 거울이란, 상왕이 하왕에게 주는 신임의 표시였다. 인물화상경이란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청동거울로써 뒷면에 9명의 왕족들이 양각돼 있어 붙여진 것이다. 이 인물화상경은 일본국보로 지정되어 그 동안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왔다. 그러나 일본은 이 청동거울에 새겨진 명문이 조작된 일본역사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 하여 최초로 발견된 쓰다하치망신사에 최근 비장(秘藏)시켜버렸다.
인물화상경은 지름이 19.8cm인 둥근 청동제 거울로써 바깥 둘레를 따라 빙 돌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계미년8월10일 대왕년 남제왕 재의자사가궁시 사마 염장수 견개중비직예인금주리2인등 취백상동2백한 작차경(癸未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沙加宮時 斯麻 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旱 作此鏡) : 서기 503년 8월10일 대왕(백제 무령왕)시대 남동생인 게이타이(繼體)일왕이 자사가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의 이름)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노라. 개중비직(왜의 왕 다음 권력을 가진 자)과 예인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여 최고급 청동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 이 명문은 상왕인 무령왕이 친동생 하왕 게이타이일왕의 건강과 장수하기를 기원하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왕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에 있는 2인자에게 거울을 만들도록 지시했다는 것은 일본이 백제의 후국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6. 일본서기 29대 킨메이(欽明) 일왕기에는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킨메이기에는 速古王으로 기재), 구수왕(仇首王: 킨메이기와 신공왕후기에는 貴首王로 기재)의 치세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 교수 등은 백제 성왕이 일본열도로 건너와 킨메이일왕이 되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7. 아스카무라(明月香村)에는 아스카의 심볼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돌무덤 이시부다이고분(石舞台古墳)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아스카사를 창건한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야마토왜에서 약 100년 간 세력을 떨쳤던 백제계 호족이었다. 소가는 31대 요오메이(用明), 32대 스슈은(崇峻), 33대 스이코(推古)여왕을, 소가의 아들 蘇我蝦夷의 대에는 34대 죠메이(舒明) 일왕을 옹립하는 등 막강한 힘을 가진 가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백제무왕의 아들 교기(翹岐) 왕자가 일본에 오자 조정은 교기 앞에서 힘센 자를 명하여 씨름을 시켰고 백제 사신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또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대신은 백제의 교기와 친히 대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백제왕자에게 정치보고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왜가 백제의 후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즉 백제왕 → 백제왕자 → 왜왕의 관계임을 증명하고 있다.
8. 일본서기 또 다른 항에서는 백제왕자 부여풍이 귀국할 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제왕자 풍장 솔군오천여 위송어본향(百濟王子豊璋 率軍五千餘 衛送於本鄕) : 백제왕자 풍장. 즉 부여풍이 귀국할 때 군사 5천 명을 보내 백제로 돌아가는 길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일본열도는 백제왕자 부여풍의 귀국 길을 5,000명이나 보내 호위할 정도로 성대하고 화려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9. 일본서기 641년 3월 기록에는 백제 무왕(武王)이 죽자 그 해 11월에 일어난 무왕의 배다른 두 아들 의자(義慈)와 교기 사이에 치열한 왕권 다툼이 빚어진 정치적 혼란에 대해 무왕의 장례에 참석한 일본열도 사신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금 백제는 큰 난리에 휩싸여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대좌평(大佐平백제의 최고관직) 사택지적(砂宅智積)이 죽었다. 올(642년) 정월에는 국왕의 어머니가 돌아가고, 왕자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 여동생 등 여자 넷, 내좌평(內佐平궁궐 내관 관직) 기미(岐味) 등 고관 40여 명이 ‘섬(일본)’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 642년 4월에는 섬으로 추방되었다는 백제왕자 교기가 35대 고오교쿠(皇極) 여왕과 만나고 일본 고관의 환대도 받는 내용이 나온다. 7월에는 백제에서 죽었다는 대좌평 사택지적까지 고오교쿠(皇極) 여왕과 만나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주장대로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0. 일본서기는 백제가 신라에 패망하게 되자 백제왕족 복신(福信)이 일본열도에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 지원 요청을 했다. 35대와 37대를 동시에 왕좌에 오른 사이메이(齊明) 여왕 조정은 백제복국군 파병을 결정한다. 그녀는 출정에 앞서 직접 몸을 씻고 기원제를 올린다. 그리고 그녀는 아스카에서 직접 군사를 거닐고 오사카 나니와궁(難波宮)으로 거처를 옮긴다(오사카 일대의 옛날 명칭은 ‘백제군(百濟郡)’이었다).
그녀는 다시 백제와 가까운 하카다(博多)로 이동 아사쿠라(朝倉)궁터에 거주하며 군사훈련을 직접 관장했다. 그러나 사이메이 일왕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이어 38대 일왕에 오른 텐지(天智)는 상복을 입은 채로 군대를 지휘한다. 드디어 663년 4백 척의 군함과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 2만7천 명이 백제를 향했다.
여기에서 백제는 660년 이미 멸망한 국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본열도의 제반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일본열도는 분명 백제의 후국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동맹국 관계라면 백제의 왕이나 왕자도 아닌 왕족의 요청에 대규모 군사를 파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일왕이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나라에서 하카다까지 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국상 중에 후임 왕이 해외 파병이라는 엄청난 결단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1.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서기 38대 텐지(天智) 일왕기 2년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유(州柔-백제의 최후의 보루였던 주유성)가 항복하였다.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百濟)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중략…처자들에게 일러 나라를 떠나갈 것을 알렸다.”
12. 구당서(舊唐書) 왜인전에서는 백제가 백촌강 전투에서 패한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위왕자충승충지등솔…왜중병탐나국사일시병항(爲王子忠勝忠志等率… 倭衆竝耽羅國使一時竝降) : 왕자가 된 충승.충지등은 ..왜군과 탐라국사를 함께 인솔하여 투항했다.’ 이는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직접 통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한 동맹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이상과 같은 제반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분명 일본열도의 왜는 백제의 후국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칠지도 재해석
교토대학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교수는 그의 저서(倭王の世界, 1976)에서 칠지도는 본국 즉 백제의 근초고왕과 귀수세자(貴須世子)가 왜의 오오진 일왕(일본 최초의 백제계 왕)과 그의 후세를 축복하며 하사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칠지도에 새겨진 60여 글자 중에 판독(判讀)이 곤란한 개소(個所)가 있어서, 전문(全文)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고심해서 해독(解讀)해 밝혀진 것에 따르면 칼의 명문 그 어디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글귀는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52년조 기사를 빙자하여 ‘헌상설’이 별로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주장돼왔다. 명문 해석은 우선 명문 그 자체에 의거해야만 한다. ‘일본서기’는 귀중한 고전(古典)이기는 하되,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완성된 ‘일본서기’에 의거해 칠지도의 명문을 해독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 외 藤間生大, 坂元義種도 하사품이라고 주장했다.
일본학자들도 지적했듯이 정한론 정신병에 걸린 3류 사무라이들이 칠지도의 날짜를 신공기 52년으로 짜 맞추기 위하여 심하게 조작하였기 때문에 칠지도 제작 년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흐름으로 판단하면 왜는 백제의 후국이었으며 분명 하사품이다. 거꾸로 왜에 헌상했다는 단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 주장하는 헌상품이 되려면 백제왕 → 왜왕 또는 백제왕 → 왜왕자간의 거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칠지도의 명문에는 분명 백제의 왕자가 왜왕을 칭하였고, 백제왕을 극존칭으로 칭하였으며, 일왕의 이름을 거명했을 뿐만 아니라 명문 말미에 후세에 길이 전하라는 하대의 문구가 바로 증명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왜왕을 후왕’이라 칭하였다. 이는 왜가 백제의 후국이었음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 백제가 왜왕을 ‘후왕’이라 했다면 백제는 '황제국'이어야 한다. 백제가 스스로 황제국이라고 밝힌 사실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기록에서 알 수 있다.
1)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고구려와 전투를 벌일 때 ‘근초고왕이 한수 남쪽에서 대열했는데 그 깃발은 모두 황색으로 장식되었다(大閱於漢水南旗幟皆用黃).’라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은 고대 국가들의 질서를 정함에 있어 황제국만이 황색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근초고왕이 황제를 뜻하는 황색깃발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백제가 황제국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2) 6세기 중국 양나라 때 작성된 34개 국의 사신을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에는 백제가 22개의 ‘담로(擔魯)’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담로란 백제가 새로이 얻은 땅 즉 속국이 된 곳에 공신이나 백제의 왕족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한 행정명칭을 말한다. 따라서 황제국 백제의 명령을 받은 제후 즉 후왕들이 담로를 통치했다는 것이다.
3) 그리고 중국의 남제서(南齊書)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남제서 기록에는 백제가 네 명(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 의 공신들에게 '매라왕(邁羅王) 벽중왕 (僻中王 ) 불중후(弗中候) 면중후(面中候)'라는 작위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백제가 황제국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일본열도가 중국 역사서에서 150여 년간 사라져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했던 이유가 백제의 후국 즉 식민지였으므로 독자적인 외교가 필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칠지도를 재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앞 면 ☞서기 369년(태화 4년) 오월 십육일 병오날 정양에 무수히 단금질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이 칼은 능히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후왕에게 보내준다. □□□□가 제작한 것이다.
* 뒷 면 ☞ 선세 이래로 이와 같은 칼은 없었다. 이 칼은 백제왕세자가 왜왕 지를 위해서 만들어주는 것이니 후세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
1. 泰□四年 : 일본학자들은 이를 중국 동진(東晋)의 연호 "太和 四年(A.D 369년)"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칠지도에 대한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 52년에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라는 문구가 나오고, 침류왕(枕流王:A.D 384-385년)의 조부가 근초고왕(近肖古王)인 것에 근거하여, 백제가 신공왕후에게 칠지도를 준 때는 근초고왕의 치세 때이고, 근초고왕은 A.D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泰□四年 "은 동진(東晋)의 "太和 四年(A.D 369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太’와 ‘泰’가 엄연히 다른 글자임에도 동일시하는 일본학자들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백제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속국으로 치부하여 상대적으로 일본 왜가 백제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치졸할 발상이다. 즉 일본은 고대 한반도 역사서를 분서함으로써 고대 한반도의 강력한 역사를 지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백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강대국이었음이 밝혀졌고, 반대로 일본의 역사조작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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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 |
한편 지금까지 중국에서는 칠지도와 같이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칼이 단 한 자루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동진의 연호를 접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五月十六日丙午正陽 : 칼을 직접 조사한 스에나가,가야모토 등은 이 부분이 자상을 입혀 조작되었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칼을 최초로 발굴한 중국사에 조예가 깊은 마사토모가 중국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한(漢)나라, 삼국시대, 진(晋)나라 때 주조한 검 등의 명문(銘文)에는 五月丙午라는 문구가 상용(常用)되었기 때문이다. 정양(正陽)은 한낮을 가리킨다. 다른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칠지도를 받은 달이 九月로 적혀 있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맞추기 위하여 五月을 九月이라고도 주장한다.
3. 造百鍊鐵七支刀 : 아주 많은, 수백 번 두들겨 단금질한 강철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즉 이 칼을 만드는 방법이 주조가 아닌 단조로 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 표면에 금으로 상감을 했다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상감을 하려면 칼 표면을 정교하게 홈을 파야 하는데 이런 기술은 백제가 최초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살펴보면 백제의 최첨단 선진 기술을 과시했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일본열도에는 이러한 기술이 없었다. 앞서 언급한 6세기 작성된 양직공도를 살펴보면 당시 백제의 사신은 가죽신을 신었고, 정교하게 제작된 의관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하지만 왜의 사신은 맨발에 끈으로 동여맨 의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 나라의 사신이 이 정도였다면 왜의 국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양직공도가 뜻하고 있는 것은 열본열도에는 6세기까지도 신발과 의복조차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땅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밝혀주는 것이다.
4. □辟百兵 : 이는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5. 후왕 (侯王) : 무령왕릉 지석에 기록된 내용과 같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백제가 중국의 연호나 사용하는 제후와 같은 존재였다면 왜왕을 ‘후왕’이라고 할 수 없다. 설사 백제가 중국에 복속되었다 하더라도 백제가 후왕이라 칭한 것은 백제의 아래 왕이라 할 수 있는 뜻이다. 즉 일본열도가 백제의 후국(侯國)임을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다.
6. □□□□ 作 : 훼손된 글자는 제작자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가 “4 글자는 누군가에 의해서 고의(故意)로 깎인 것이다”라고 지적했듯이 4자 연속하여 훼손한 것으로 보아 이는 일본의 역사조작에 방해가 되는 결정적인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7. 百濟王世子 : 일본학자들은 이를 귀수세자로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백제왕세자가 왜왕을 위하여 전달했다는 것은 백제왕 → 백제왕세자 → 왜왕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8. 성음(聖音) : 성(聖)은 극존칭(極尊稱)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음(音)도 고대에 높임에 사용된 글자이므로, 성음(聖音)은 아주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칼을 하사하는 백제의 왕 또는 왕세자를 극존칭으로 사용하였다.
9. 旨 : 이곳은 왜왕의 이름이 들어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마사토모는 조작하기 위하여 왜왕 이름을 삭제하였다. 일본학자들은 글자 수와 여러정황을 근거로 이곳에 들어갈 왜왕의 이름을 旨로 해석하고 있다. 신공왕후기를 맞추기 위한 해석이다. 어째든 헌상이었다면 왜왕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는 불경스러운 사태가 발생할 수가 없다. 즉 하대(下待)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0. 전시후세(傳示後世) :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글귀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다. 헌상이었다면 도저히 이런 글을 쓸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