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개장수 줄에 묶여
끄-을려가던
복실이
울음빛 노을 속에
산모롱이
돌아갈 때
찬찬히
뒤따르던
개밥바라기별
쎄리
쎄리가 팔려갔다, 할머니는 막내를 업고
방죽머리까지 따라나가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주었다
이튿날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응앙응앙- 문살 긁으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빗속을 뚫고
읍내 삼십 리 길을
피투성이가 되어 도망쳐 온 것이었다
“영물이여, 영물이여……”
할머니는 하얀 행주로 쎄리 몸뚱이를 닦아주고
쎄리는 꽃잎 같은 혀로
할머니 손등을 핥아 주었다
날이 밝았다
문 밖에 개장수가 서 있었다
납죽 배를 깔고 파들파들 떨며
슬픈 눈빛으로 식구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스피커 줄에 묶여
자운영 꽃 붉은 논둑길 따라
멀리 희미한 한 개 점으로 지워져가던 쎄리……
루루를 위한 세레나데
너와 함께 거닐던 솔밭 사이 산책길 따라가며
이름 불러보면
초저녁 초록별로 떠올라
눈빛 반짝이는 너,
세상은 너한테 살 만한 곳이 못 되었나 보다
천둥소리가 무섭다고
울면서 집을 나가 하늘로 간 너,
천둥 번개가 없는
천왕성이나 명왕성 어디쯤 조용한 별에 가서
다시 태어나거라
시츄, 4.5kg의 여덟 살 난 여아, 이름 루루,
임신 경험 없고 날씬한 몸매,
소리에 매우 민감하고 시력 약한 편임,
밝은 갈색에
이마와 뒷목덜미 흰색 다이아몬드 무늬
루루, 이름만 부르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두 귀를 쫑긋,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잘 가라,
우리 집 착한 루루, 이젠 너의 모든 것을
놓아 주련다, 솔바람 소리에게
노오란 애기똥풀에게
모감주나무 이파리에 붙은 풀잠자리 작은 알들에게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이번 여름엔 사랑을 하고 싶다
야한 티 하나 사 입고
낯선 여자와
낯선 거리에서
낯설지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낯선 거리에서 묻고 싶다
초롱꽃
달빛에 잔별이 깔리는 풀밭
처녀로 죽어서 길 한가운데 묻혔다는
눈썹 푸르던
누이
분 화장하고
눈썹 달고
고즈넉이 서 있다
강아지꽃
너무 일찍 간 아랫말 순이
입가에
볼우물처럼
우물가 풀섶에
함초롬
피었다
이내
시들어버리고 마는
능소화
가까이 오지 마셔요
이윽한 눈빛으로
떠보려 하지도 마셔요
애오라지 단 한 분,
지아비 손길로만
피어나는 꽃이랍니다
제 몸에 손대는 순간
그예 당신은,
눈이 멀고 말 것이어요
능소화 사랑
단연코 잊지 않으리라
달빛 따서 덮어주던
그날 밤 그대 다순 손길
잠든 순간이라도 한 번만
살짝 다녀가오시라
천 개의 귀 쫑긋거리며
만 개의 눈 깜작거리며
작두날 타듯,
아스라이
맨발로 하늘 끝 오르다
사모침이 다하여
뎅강뎅강-
목을 버혀 떨구었고녀
담장 밑에 뒹구는 사랑아
민들레꽃
갈라진 장독대 틈새나
자갈밭, 돌 틈, 보도블록 사이라도 좋아
개똥밭에 피어나도
나는 좋아
긴긴 겨울 견뎌내고
쪼르르-
아침 볕에 젖은 머리 말리며 꽃등 하나씩 켜 들고 섰는
웃음 헤픈 어미가
아무 땅에 아무렇게나 퍼뜨려 놓은
노랑꽃, 하양꽃, 흰노랑꽃…
한철 지나고 나면 바람 타고 뿔뿔이 흩어질
애꿎어라, 옹기종기
눈빛도 하 착한
아비 모르는 자식들
빨래터 풍경
구렛들 버드나무샘은 근처에서도
유명한 빨래터였다
여름엔 찬물, 겨울엔 더운물이
언제나 팡팡 솟아올랐다
아침나절이면 마을 아낙들
하얗게 둘러앉아 빨랫돌 하나씩 차지하고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워
아랫마을로 띄워 보냈다
나어린 계집애들 감꽃 목걸이 걸고
입이 째지게 동요를 불렀다
먼 들녘에서 장항선 완행열차가
한낮의 정적을 깨면
물무당도 덩달아 신이 나 힘차게
물살 가르며 매암을 돌았다
손등이 까만 개구쟁이들 어미한테 잡혀
엄살을 떨고
수세미로 닦달당한 손등은 어느새
배냇 손처럼 하얘지지만
하루만 지나면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
독골 엿장수
아침나절이면 엿가위 소리 짤깍대며
감꽃 피는 마을 찾아오던
독골 엿장수,
챙그랑- 책, 쨍그렁- 짤깍-
실속은 없었지만 언제나 다정한 아이들 친구였지
엿장수 궁디는 끈적끈적-
마른버짐 핀 머슴애들 데설궂어도
눈 한 번 끔벅이며
씨-익, 웃어 주면 그것으로 끝이었지
어쩌다 한잔 술에 어깨춤을 출 땐
복실이도 꼬리 치며 방울 흔들고
처마 끝 아슬한 낮달 웃음 참느라 눈물
질금거렸지
허드레 물건 지게 가득 짊어지고
구렛들 저녁 안갯속으로 묻혀가던 독골 엿장수,
유난히 춥던 그 겨울 마지막으로
가위 소리 들리지 않았지
챙그랑- 책, 쨍그렁- 짤깍-, 쨍그렁- 짤깍…
소금 동냥
간밤에 불장난을 하다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지도를 그려 놓았다
엄마는 잠자코 쪽박을 들게 하고 머리 위에
키를 씌워 주었다
키 다리가 땅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강아지도 꼬리를 흔들며 졸졸 따라왔다
아침 해가 뜨고 낮은 초가지붕마다
하얀 박이 둥근 배를 안고 웃고 있었다
벗겨지는 키를 바투 잡고
미숙이네 높다란 대문을 넘어섰다
잘록한 개미허리에
옥양목 앞치마 맵시 나게 동여맨 미숙 엄마는
여느 때와 같이 살가운 표정으로
쪽박에 하얀 소금을 가득 채워 주었다
허리 굽혀 인사하고 돌아서는 순간,
-다섯 살씩이나 먹은 데린님이
워칙헐라구 허구헌 날 오줌을 싸유!
사정없이 부지깽이는 내리치고 있었다
울음보를 터트려 볼 틈새도 없이
종종걸음을 놓다 그만,
신발코가 돌부리에 벗겨지는 바람에
울음보가 터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 집 마당엔 할머니 고모 삼촌까지 나와서
얼굴이 터지게 웃음꽃을 피우고
뒤란 쏙쏘리감나무 꼭대기엔
까치가 날아와 맑은 소리로 울고 있었다
부루쌈*
촌가 아낙들 밭일 허름해지면
꽁보리밥 한 덩이씩
앞치마 속에 꾸리고 가
이웃집 대청마루
치맛자락 훌러덩 걷어 올리고 둘러앉아
부루 여러 장을 겹쳐
꽁보리밥 한 술에 묵은 된장
숟가락 꼬챙이로 찍어 발라
부릅눈 뜨며 입안 가득 볼이
터지게 욱여넣고
매운 고추 하나 질근 깨물면 눈물 글썽,
콧등엔 송송송…
굵은 땀방울 맺히곤 했었지
게으른 여름 해 꼬랑지가
싸리울에 걸릴 때까지 곯아떨어져
꿀잠을 자다가
일소 방울 소리 가찹게
다가오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돌아들 갔지
* '부루'는 '상추'의 옛말, 혹은 충청도 말.
잎이 작고 쓴맛이 강함.
낙화
목련꽃 지는 토요일 오후
내 청춘을 묻은 교정에
빛바랜 세월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손끝에 잡히는 것들
주워 모아
풀꽃 같은 이름 하나씩 붙여 보다
바람에 날려 보내고
남은 몇 개
책갈피 속에 끼워 가방에 담았다
바람은 점점 난폭해져
소녀들 치맛자락을
말아 올리고
꽃 지는 하늘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재분이
국어 시간이면
홍콩 아가씨를 불러주던 재분이
졸업한 후 한 번
소식 줄 줄 알았는데
아카시아꽃 내란처럼 피어나는 이 계절에
한 번 헤어지고 못 만나는 네가
그리워진다
작은 키에 커다란 눈
시골 출신
충청도 서산서 오빠 밥해 주러 올라와
학교에 다닌다던 재분이
지금쯤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 콩밭 매고 있는지
낯선 거리에서 비 맞고
서 있는지
교정의 새들도 자라서 날아가
한 번은 돌아오는데
우리 다시 만나
3학년 1반 교실에서
너의 노랫소릴 들어 보고 싶구나
겨울, 소명원에서*
겨울, 소명원엔 설레는 숨결이 있다
땀내 나는 노동의 휴식과 단호한
자연의 질서가 있다
낮게 낮게 흐르는 마른 풀잎의 향기
한 잎 두 잎 가을을 벗고
마침내 완성되는 겨울나무의 자태
천상의 열매를 돌려주고
가난한 들쥐 다람쥐한테도 돌려주고
상처투성이 빈 가슴
집 없는 생명들의 편안한 겨울잠을 위해
억센 옹이로 버텨 서서
한 해 자란 키를 재 보는 나무의
크고 넉넉한 마음,
새들이 몇 번이고 가지를 옮겨 앉는다
겨울, 소명원은 이마에 손을 얹고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빈 곳간에 송곳니를 가는 다람쥐들은
쳇바퀴를 돌리며
어떻게 어떻게 겨울을 인내하는가
높다란 가지 끝에 뒤웅박을 걸어 놓고
벌들은 왜 찬바람에 흔들려 보는가
겨울나무는 어떻게
꽃보다 아름다운 눈꽃을 피워내는가
건강한 노동으로 단련된 가슴만이 뜨겁게
겨울 속의 봄을 맞이할 수 있다고
겨울, 소명원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발목을 떠는 새들,
마지막 햇살 한 땀씩 따 먹고
숨찬 날개 부딪쳐 겨울 속을 날아오르고 있다
* '소명원'은 부천시 소명여자고등학교의 정원
학교를 떠나며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지난겨울은 춥고 길었다
귀밑머리 새파란
총각 선생으로 왔다
오늘은 반백이 되어 혼자 짐을 싼다
책상 비우고 사물함 비우고
노트북을 비우고
낡은 슬리퍼가 들어앉은 신발장을 마지막으로 비우고
책이며 앨범이며 교무 수첩이며
33년 세월 때가 켜켜이 앉은 소지품들
보자기에 나누어 꼭꼭 싸맸다
그동안 내 곁에서 날아간 풀꽃 같은 이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
방울방울
유리창에 아롱지며
흘러내리는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동료들 뒤로하고
뚜벅뚜벅………
긴 복도에 마침표를 찍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교정의 나무들 젖은 어깨 들먹이며 거기 서 있었다
지후가 오는 날
지후가 온다, 강남제비 앞장세우고
지후가 돌아온다
꼭두서니 빛으로 동터오는 새벽
창밖 미루나무 참새 떼 모여 앉아
햇살을 굴리며 쪼으며
조잘거린다, 재잘거린다, 쪼잘거린다
백일도 갓 지난 것이
살에서 오이풀 내 나는 어린것이
먼 경상도 영천 외가에 가 있다
일 년 만에 돌아오는 날이다
꼬까옷도 사놓고 방 청소도 해 놓고
얼굴에 뭔가 찍어 발라도 보며
어린 손님 맞이할 준비로
집안이 온통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다
희고 자그만 깡충거미 한 마리
천정에서 사뿐-
탁자 위 나비란 잎새에 내려앉는다
혜준이
내 딸의 젖을 물고 곤하게 잠든 아가야
녹두 알 같은 아가야
지구에서 먼먼 안드로메다 성운 어디쯤
세 필 조랑말이 이끄는
작은 별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아가야
메밀대처럼 여린 늬 에밀 지켜주려고
길동무 하나 없이
멀고 험한 길 찾아오느라 참 고생도 많이 했구나
그렇다고, 그렇다고,
잠에서 막 깨어나 눈물 글썽이며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천상의 아가들
메시지라도 전하려는 듯
통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의 말
옹알거리며
진땀을 빼고 있는
요 놈-
밤낮 즤 에밀 파먹어 통통 살이 올랐구나
비탈에 서서
막막한 벌판 끝에 노을이 진다
비 맞고 들길 건너간
내 청춘,
어느 하늘 낯선 추녀 끝에
비를 긋고 서 있느냐
강물은 가슴을 깎아 길을 내어 흘러가고
강을 건너는 바람 소리
서거픈 밤,
망초꽃 지천으로 피어나
길 잃은 별 하나 길을 찾아 떠난다
비 맞고 들길 건너간
사랑아,
저무는 강물 위에
내 작은 생애도 함께 흘러만 간다
자화상
푸른 하늘을 우러르는 일이 부끄러워
언제나 고갤 숙인 그 사람,
화살은 수없이 날렸지만 과녁을
맞춰본 적 없었네
혹여 발자욱 소리 들릴까
걸음걸이 항상 조심스러웠네
반세기는 늦게 태어나
뒤만 바라보며 실컷 자기 몫을 쓸쓸해하다가
시드는 낮달처럼
스러져 없어질 그 사람,
오늘같이 푸른 날은
흰 고무신 닦아 신고
뜸북새 우는 긴 논둑길 걸어보고 싶네
그날
딱지치기하던 동무들 두어서넛
우산 받쳐 들고 지켜보는
산등성이-
비 그친 다음 잠시
지나가던 구름장 사이로 늦은 가을 햇살 한 줌
떨어져
관 위에 어룽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