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 내쫓으래요. 에이스 스코토스라고 해요. 어둠 안으로 내쫓으라. 에크발로, 쫓아버리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려 이를 갈리라, 라는 표현이 성경에서 많이 나오죠? 이거 자체는 달란트 비유인데요. 그 무익한 종은 나라고 했어요. 다른 종들은 장사해서 이익을 냈는데 무익한 종은 땅에 묻어뒀다가 야단맞는 중이죠?
근데 그 마태복음 8장에서 그 무익한 종을 뭐라고 하느냐면요,,
(마 8: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는 건 똑같죠?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까지 똑같은데, 무익한 종이었는데, 마태복음 25장에서는. 8장에서는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이래요. 그러니까 이 무익한 종이 본 자손인 거예요. 그 나라의. 이스라엘 자손인 거예요. 호 시오스 호 바실레이아, 그 나라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를 에코발로, 역시 내쫓아라.
그러면 무익한 종이 야단을 맞는 이유가 뭐에요? 다른 종들은 금을 받아서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내고 그리고 그 무익한 종은 그저 땅에 묻어뒀다는 거죠?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다른 곳에서는 왕권을 받으러 떠난다, 라고도 해요. 왕권을 받으러 떠난다는 거는 뭐에요? 지금 주인이 떠난다고 하는 거는 주님이 떠나는 걸 얘기하는 거예요. 육으로 죽어서 떠나는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되셔서 오시는 거예요. 그걸 왕권을 받으러 떠난다고 하는 거예요. 왕권 받아서 오시는 거죠.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에 사실은 금이라는 말은 없어요. 그냥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에요. 사실 이게 금이 아니라 은이에요. 조금 뒤로 가면,,
(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그 달란트로 받은 게 돈이란 말에요. 그 돈을 감췄대요. 그 돈이 뭐냐면, 아르귀리온, 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무익한 종은 은을 감춘 거예요. 은이라는 건 뭐에요? 은은 속전을 이야기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구속의 은혜를 말하는 거예요. 은이 뜻하는 게 구속의 은혜. 구원해주시는 그 은혜란 말이에요. 그리고 주인은 퀴리오스죠? 주님의 은혜를 이걸 땅에 묻은 거란 말이에요.
자, 그러니까 구속의 은혜가 뭔지 모르고, 진리의 말씀을 주시는데 구속의 은혜가 뭔지 모르고 여전히 땅인 자기 안에 가지고만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뭔지 모르니까 율법의 상태겠죠. 그러니까 장사해서 이익을 남겨야 칭찬을 받는데. 장사한단 말이 에르가조마이에요. 창조한다는 뜻이에요, 일하다 창조하다. 그러니까 장사라는 거는 창조의 일을 말하는 거예요. 창조는 뭐에요? 새 창조! 하나님 나라 만드는 일. 자기부인의 그 십자가 죽음을 죽는
거예요. 말씀은 모두 십자가 복음이라고 했잖아요. 구속의 은혜, 그 구속의 은혜가 진리의 말씀이란 말에요. 진리의 말씀을 주실 때 그게 나를 죽여서 살기는 그 십자가 죽음을 새 창조의 일이라고 하는 건데,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일이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니까. 이게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일인데, 근데 우리가 무익한 종이었단 말이에요. 뭐가 뭔지 몰라서. 지금도 그러고 있을지도 몰라요.
모든 말씀을 십자가 복음이라고 했잖아요. 구속의 은혜고 사랑으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는데 나는 그걸 에르가조마이하고 있느냔 말이에요.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데에 사용하고 있냔 말이죠. 그래서 이익을 남기고 있느냔 말이죠. 하나님 나라라는 이익을 남기고 있느냔 말이에요. 그게 아니라 여전히 이건 좋아 이건 싫어 이러면서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때로는 스트레스 받고 다투기도 하고, 실제로는 이러고 있을 때가 많잖아요? 그러면 뭐에요? 나는 무익한 종인 거죠. 그게 뭔지 몰라서. 그 말씀을 내 안에 간직하고만 있어요. 진리로 깨달아서 간직해야 되는데 묻어두고 있는 거죠, 나라는 땅 속에.
구속의 은혜를 받았는데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걸 하지, 하지 마라의 율법으로만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고. 겉으로 보이는 대로 껍데기로 보이는 대로 보면서 거기에 나의 선악의 두 마음을 가입해서 열심히 행위로만 바라보고 있는 그럴 때가 많단 말이죠. 그게 나라는 땅에 은혜의 속전을 감추어두는, 묻어두는 일이었고요.
자, 거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라고 하는데 흔히 이 구절을 지옥에 떨어져서 괴로워하는 그런 모습이라고도 하죠. 근데 이들은 나라의 본 자손이라고 했죠? 나라의 아들들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성경은 전부 내 안의 일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무익한 종이 있고 유익한 종이 있는데 그건 전부 내 안의 일이에요. 무익한 종은 뭐겠어요? 아직 진리로 깨닫지 못한 내 안의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우리 안에 그 비진리들이 어두움 안, 우리의 원래 자리죠? 우리가 원래 흑암이었어요. 거기에서 슬피 운다, 라고 하는 거죠. 클라우드모스라고 하는데. 울음, 울음은 뭐에요? 슬피 우는데, 울음은 애곡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곡은 뭐에요? 장사지내는 거예요. 장사지낼 때 애곡하는 거. 죽음에 대한 애곡이란 말에요. 그 죽음은 나에 대한 죽음을 장사지낼 때 운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나의 죽음에 대한 애곡이란 말이죠.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클라이오, 운다. 자기의 그 불가능을 깨닫는 자기부인의 죽음에 대한 애곡이란 말에요. 닭 울기 전, 해 뜨기 전, 어둠. 어둠일 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자란 말에요. 그래서 살인하였단 말이죠. 근데 그 살인하는 자라는 걸 깨닫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베드로가 지금 바깥 어두운 곳에 나왔잖아요? 거기에서 슬피 울며 애곡하는 거란 말에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눅 6:21)b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뉜, 지금. 영원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지금 울게 하신다는 거예요. 지금 운다는 거예요. 그 울음이 나올 거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를 갈리라, 라고 하죠? 참된 양식이 없어서 헛된 양식, 율법 먹는 그런 모습이란 말이죠. 그러한 때를 겪는 거란 말이죠.
(마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비슷한 표현이죠? 어두운 곳에 던지는 것과 풀무불에 던진다, 이것만 다르고 다 똑같아요. 던진다, 그리고 울고 이를 간다. 어두운 대신 풀무불만 나왔어요. 근데 요게 같은 의미인 거예요.
자, 풀무불은 뭐에요? 불같은 시험을 받는 광야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풀무불. 그 어둠은 그 광야 사십년의 인생 동안 여전히 깨닫지 못한 나를 가리키는 말이죠. 은혜의 빛을 받았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나라의 본 자손인 우리 안이 광야이고 풀무불이고 어둠이고 그것이 여전히 세상과 짝한 세상이고 땅이고 율법이란 말이죠. 거기에서 광야 사십년 동안 나의 죽음을 경험하는 애곡을 하는 거고, 그리고 참된 양식을 고대하는 그 푸토코스의 삶을 살면서 진리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될 거다, 라고 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지옥 보내겠다, 라는 말씀이 전혀 아닌 거예요. 제대로 일하지 않거나 무익한 종이니까, 제대로 일하지 못했다, 이러면서. 또는 그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지옥 보낸다, 라고 하는 그렇게 겁주고 저주하고 이렇게 하시는 그런 유치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천국의 아들이라고 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그 은혜의 말씀이란 말에요. 너희는 깨닫지 못한 그 율법에 여전히 그 어두움이지만 그 속에서 자기부인의 죽음을 죽고 울면서 통곡하고 깨닫고 나올 것이다, 라고 하는 거란 말에요. 은혜의 말씀이고 감사의 말씀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