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물든 산자락/전 성훈
그 뜨거웠던 한 여름이 지나고 10월 들어 가을이 찾아오더니 이제는 달력이 달랑 두 장 밖에 남지 않은 만추의 계절이다. 자연의 이치는 변함이 없는가 보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축복 받은 이 땅 전국 방방곡곡 산하에는 울긋불긋 자주 빛 물감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예전에는 단풍구경 하려고 주말에 나섰는데 세상이 바뀌어 이제는 평일에도 여기저기 붉게 물든 산천을 찾아가는 행락객이 많다고 매스컴은 전한다. 코로나 탓에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늦가을의 정취를 맛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여건이 허락되어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주변 공원의 알록달록 붉은 치마를 입은 나무나 가로수에 물든 노오란 은행잎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는 사람도 있다. 가을이 익어가는 풍광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지난여름 강화도 동막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던 기억이 떠오른다. 황홀한 붉은 빛 저녁노을이 지는 갯벌을 바라보며 한 동안 멍 때리던 광경이 생각난다. 갯벌에서 머드팩을 한다며 진흙 장난을 하거나 조개를 캐던 사람들 모습도 눈에 선하다.
장염으로 일주일 이상 고생을 하며 마음 놓고 음식도 먹을 수 없고 바깥출입도 조심스러워 자가 격리가 아닌 징역살이 하는 심정이다. 분위기를 바꿔 기분 전환도 하고 바람도 쏘일 겸 붉게 물든 산천 모습이 그리워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가평 아침고요수목원 부근 펜션을 찾아간다. 요즈음은 어린아이 놀이시설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 가에 따라서 펜션 영업 성패가 달린 듯하다. 그동안 몇 군데 펜션을 가보았지만 이번에 예약한 곳은 말 그대로 ‘풀키즈펜션’이다. 숙소마다 소형 풀장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건물 앞 꽤 넓은 공터에는 간이 축구장, 미로 찾기, 미끄럼틀, 소형자동차 등 아이들 놀이동산 같은 소규모 시설을 제법 알뜰살뜰 갖추고 있다. 숙소 주변에는 이와 비슷한 펜션이 옹기종기 즐비하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소리치며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놀이에 정신이 없다. 부모들도 함께 풀장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돌본다. 늙은 할아비는 혼자 바깥으로 나와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기웃거리며 한가로이 걷는다. 신명나게 노는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60년도 훨씬 전의 모습, 그 때에는 대부분 가정이 가난했던 시절이다. 제 때에 끼니를 거르지 않는 집이 동네에서 손가락 꼽을 정도로 궁핍하고 고단했던 때이다. 그래도 마냥 즐겁게 뛰어다녔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동네에는 가난한 집이 대부분이라서 부잣집을 부러워했던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오늘날처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생활수준이 하늘과 땅처럼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꿈만 같았던 시절이다. 펜션 마당 흔들의자에 앉아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다 보니까 산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든다. 숙소가 산자락 밑이어서 낮 시간도 도시보다는 짧은지 그나마 짧은 해도 서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표정으로 하품을 한다. 조금 커다란 나무에 묶어놓은 ‘해먹’에 올라 잠시 누워본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오늘따라 미세먼지가 심하여 그 맑고 청명했던 하늘이 뿌옇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친구 대화방을 살펴보니 ‘야당 경선’ 결과 발표 소식이 보인다. 박수를 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한다고 기염을 토하는 글도 눈에 띤다. 새빨갛게 물든 단풍잎 하나가 소리 없이 땅으로 떨어진다. 단풍나무 밑 토끼집에서는 우리를 벗어나 마구 장난치는 새끼토끼를 바라보는 왕방울만한 어미눈망울이 정겹게 느껴진다. 장염 탓에 술 생각은 단념하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좋아하는 목살을 조심스럽게 몇 점 집어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곧 바로 항생제를 입에 털어 넣는다. 몸이 건강해야 음식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결같이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가끔은 몸도 어떤 연유로 이상이 생긴다. 조금이라도 몸이 정상이 아니면 그때서야 건강의 고마움과 중요함을 다시 깨닫고 건강할 때의 모습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느긋한 마음으로 펼쳐든 시집 한 권, 80대 후반의 어느 여류시인의 ‘우리도 자연처럼’을 읽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싯귀, “ 우리도 저들처럼, 무거운 짐일랑 모두 벗어놓고, 빈 마음 빈손으로 떠나야 할 몸, 남은 여생 자연처럼 그랬으면....” 그래 맞아 나 또한 저 시인의 마음처럼 살고 싶다. 스스로를 아끼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우러나온다고 한다. 깊어가는 가을, 지나가버린 세월의 아련한 추억이 시나브로 다가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애잔한 마음에도 새록새록 솟아오르는 작은 기쁨은 지금 이 자리에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소소한 삶의 행복이다. 미지에 다가올 그 날을 위해서도 하루하루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2021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