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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빠르게 흐르고,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기후와 환경도 변하고, 과학기술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문화 또한 급속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심장병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고 회복되어 퇴원하는 환자에게 의사가 몇 가지를 처방합니다. 물론 약도 처방하지만, 약과 함께, 일상 생활에서 무리를 하지 말라든지,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라든지, 소식을 하고 채식 중심으로 식단을 짜라든지 하는 생활과 습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의사는 무서운 경고를 던집니다. “Change or die!”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지니고 살아왔던 잘못된 생활이나 식사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당신은 다시 건강을 해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고를 들었던 환자들을 1년 후에 조사해 보면, 의사가 권고한 대로 자신의 생활 태도와 식사 습관을 완전히 바꾸고 변화된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은 10% 정도 밖에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히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활 습관을 바꾸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잘 지키지만,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 나면 예전으로 쉽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우리가 누굽니까? 아담의 후예들 아닙니까?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은 경고하셨지만, 그러나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덥석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뱀은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성경을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와나 아담이 뱀의 유혹하는 말을 듣고 고민했다는 흔적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까짓 죽을지 모른다고 하는 경고 때문에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하고 싶은 짓 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아담의 후예답게 ‘변하지 않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경고를 받아도, 사람들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겁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나를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로마서 1장부터 11장의 전반부와, 12장의 후반부를 이어주는 접속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에서 우리들 신앙의 핵심인 중요한 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얻은 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죄를 범했을 때, 감사할 때, 서원할 때, 그리고 정해진 절기를 따라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었습니다. 곡물을 바치는 경우도 있지만, 양이나 비둘기 같은 동물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동물이 아니라 ‘너희 몸’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물을 잡아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몸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나 자신을 죽여야 한다니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제사는 제물을 죽여서 바치는 것인데, 바울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 15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정욕, 탐심, 자존심이나 교만과 같은 자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희생과 섬김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이 곧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라 하면 주일 성수 열심히하고 기도 많이 하고, 그래서 은혜를 받아 만사형통하고 축복 받는 것을 기대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시인하고 다른 사람을 부인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나의 욕망, 나의 감정이 중요합니다. 나의 이익이 우선이고, 나의 목표만 중요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유익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모두가 다, ‘당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내가 불편하니 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내가 무엇이 부족하니 채워 주시옵소서. 내가 재물이 필요하고 권력이 필요하고 명예를 얻고 싶고, 그것들이 있어야만 내가 행복하고 만족하겠으니 그것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진정 구원받은 하나님의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자기 자신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신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worship’입니다. 이 말은 ‘가치’를 의미하는 worth로부터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가장 가치있고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재물도 아닙니다. 명예도 아닙니다. 쾌락이라는 것도 부질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에 대한 응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을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희생의 제물로 삼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마땅히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돌려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일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를 담아내야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를 우리가 기억하고, 그로 인하여 구원받은 감격을 새롭게 확인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영적 예배’여야 합니다. ‘영적 예배’라는 말을 ‘새번역 성경’은 ‘합당한 예배’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성경’은 ‘진정한 예배’라고 번역했습니다. 희랍어 원어 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로기켄’ (λογικην)입니다. ‘로고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로고스’란 말은 본래 말, 논리, 이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로기켄이라는 말은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고’, ‘논리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은 ‘reasonable service’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논리적으로도 맞고, 이치에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좋은 제물을 골라서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혹은 빠지지 않고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니 그것으로 충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나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 합리적인 예배는 나의 몸을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의 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를 믿음으로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인격이 합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기에 그가 거둔 곡물을 예물로 삼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목자였기에 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창세기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는 아벨과 그가 드린 제물을 받으셨고, 제사를 드리는 가인과 그가 드린 제물은 거부하신 것입니다. 가인은 안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제물만 받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단순히 제물이 아닙니다. 그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의 그 인격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왜 안 받으셨습니까?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선을 행하라든가, 죄를 다스리라고 하는 말씀은 결국, 예배자의 삶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예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몸, 우리의 인격과 삶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몸을 바친다’는 것은 곧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소중한 가치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말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일생동안 노력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안락한 생활, 자기만족과 자아 성취를 다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의 인격과 나의 삶 전체를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개인적인 욕망이나 꿈이나 자존심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고 할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삶이 진정한 제물이 되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삶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고, 육신의 욕망을 따라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그런 방식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거룩해야 하고 내 감정도 거룩해야 합니다. 나의 습관도 거룩해야 합니다. 남들 다 한다고 나도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문화와 달라야 하고 가치관도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하며 똑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똑같은 직업에 종사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거룩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몸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우리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여기에서 우리 인간의 깨달음이나 분별과 같은 지적인 활동이 일어나고, 분노와 기쁨과 슬픔 같은 감정도 솟아나고, 우리들의 결단이나 의지도 거기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면 생각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감정도 변하고 그의 살아가는 모습과 인격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4:23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말하기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지키려고 합니다. 재산을 지키려고 사람들은 높은 담을 쌓기도 하고, 권력이나 지위를 지키려고 사람들은 불법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자존심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산도 지켜야 하고 권력도 지켜야 하고 명예와 자존심도 지켜야 하지만, 그러나 정말 지켜야할 것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서 우리의 인격과 신앙이 변화되고 우리의 생활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사무엘상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여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으시던 날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영이 오늘 너에게 크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너도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고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였을 때 그는 새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왕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인생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할 때,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가고 이제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번민과 두려움과 시기심에 떨게 됩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권력과 부와 명예를 가졌지만 그러나 그의 삶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참한 일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음의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내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이 내 안에 역사하심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실 때 내 마음을 주장하시고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크게 임하시고 나를 주장하실 때 우리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나의 인격과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지고 세상에 속한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우리에게는 번민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고, 또한 누린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추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새해 첫날 첫 주일입니다. 올해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무엇보다도 마음이 변화되어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말씀에 착념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심으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산 제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