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과 사회 최근호, 김형중, 조효원, 강동호의 글
* 지금 한국 문학장 중의 (중심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뜨거운 한 지대’에서는 무슨 말들이 오고 가고 있는가? 아래 글들을 『문학과 사회』 사이트에서 퍼오면서 글을 쓴 김형중, 조효원, 강동호 세분 필자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앞선다. 고마움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당위에서 오고 미안함이란 갚을 필요가 없는 부채를 지면서, 이 글들의 문제의식에 최소한 답해 마땅한, 성실한 읽기에 대한 '확신의 불확실함'과 '불확실함의 명징한 예감'에서 온다. 그럼에도 이 글들을 카페에 올려본다. 김형중의 말의 다른 맥락에서, ‘발성이 다 발화가 되는 것은 아니고’, 조효원 말의 있는 그대로의 의미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소리가 아니’고, ‘읽히지 않는 글은 근본적으로 글이 아니’지만, 다시 김형중으로 돌아와서 우리 읽기의 불확실함이, 즉 ‘ 그들의(대전문화에스프리 카페의 독자와 김형중, 조효원, 강동호 사이의-주) 상호 방문이 “프루스트적 웃음”을 낳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일말에 불과하지만, 사유하는 자는 그 일말을 포기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쓰고 나면 뭔가 미진하다. 안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공허한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필자들의 말을 빌어 남겨놓은 위 단락의 뒷갈망은 아무 책임도 질 수 없는 자의 면피적 나르시즘에 불과한 것이다. 면피란 책임을 남에게 떠넘긴다는 말인데 그 남이란 과연 누구인가. 글을 옮겨오는 사람은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낭독의 즐거움도 있지만 낭독의 불가피함도 있다. 글을 읽지 않는 아이라면 낭독자로 나서기를 마다할 부모나 선생이 있을까. 따라서 낭독에 있어서의 즐거움과 불가피함은 서로가 서로를 번역한다. 아래 추려놓은 구절들은 저 아래 필자들의 본문에도 들어 있는 내용이지만, '글의 일부를 추리는 행위'와 '낭독하는 행위'사이에도 통번역이 가능하다는 억지춘양심으로 무장하고 이 일을 해 본다. 아래 글들을 다 읽지 못할 분들을 위해 일부 구절들을 그대로 '복붙'하겠다는 것이다.
(김형중의 글 중)
* 안정적으로 보이던 공론장이 요동을 치는 시기일수록,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발화의 내용만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형식을 통해 발화되는가 하는 점이 실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특정 발화의 내용이 그 유의미성을 소진한 뒤에도, 그 발화의 형식은 공론장 내에 남아 일종의 ‘물려받은 형식’으로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이제 루카치적인 의미에서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 인터넷(특히 SNS) 환경이 각종의 발화 형식에 미치는 영향력은 정치/사회적 변화의 영향력을 훌쩍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발화가 매체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매체가 발화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한다는 매체 이론가들의 주장을, 어떤 수정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다.
* 전상진의 「발화의 경계와 질서를 겨냥한 도발—게으른 도발의 예정된 실패」는 ‘도발적인 도발론’이다. 이 글이 ‘도발론’인 것은 최근 ‘도발’을 발화의 장기로 삼은 논객들의 수사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도발’을 일종의 학적 대상의 자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이 ‘도발적’인 것은 실명들까지 거론해가며 조단조단, 유머러스하면서도 반어적인 어법으로 도발자들을 도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료한 글이 주는 읽기의 즐거움과, 도발이 주는 통쾌함을 두루 맛볼 수 있는 글이다.(읽고 싶다 이글-주)
(조효원의 글 중)
* 하지만 바로 이 난망함이 문학과 인문·사회과학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된다. 이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확실한 것은, 그 양식이 때로는 시간의 질곡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버티는 것만이 무조건 능사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해 어떤 위기는 비극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 변화 과정에서 묻혔거나 묻힐지도 모를 모든 (목)소리를 쟁이고 감싸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의 일이다. 다시 말해, 문학은 흩어진, 흩어지는 언어들을 붙들어 얽동이는 일이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들이 하이픈 기획을 결정하고 필진들을 섭외한 뒤 한 달여가 지난 시점에 이른바 ‘김봉곤 사건’이 발생했다. 작가의 (다소 뒤늦은) 사과와 젊은작가상 반납, 그리고 해당 작가의 책을 출간한 두 출판사의 전격적인 환불 조치 등으로 인해 상황은 일단락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무엇보다
‘오토픽션autofiction’이라는 문제적 장르 자체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편집동인들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그런 취지에서 우리는 이번 호 〈메타비평〉 지면을 오토픽션 및 김봉곤 사건에 대한 성찰로 채우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 불문학자 변광배가 오토픽션의 역사와 관련된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글로 긴급한 청탁에 응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오토픽션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예방법은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할 지인들의 확실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올바른 시각이며,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름 아닌 김봉곤의 사례가 여실히 보여주는바, 동의의 ‘확실성’ 혹은 ‘완전성’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작가와 지인 들은 도저히 극복 불가능한 견해차를 노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예방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고도 불안한 선택지인 것이다.
(강동호의 글 중)
* 사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으며, 아감벤의 어조를 흉내 내며 현실을 어둡게 묘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일각의 전망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세계의 고립과 단절을 강화하는 다양한 통치 장치들의 실정적 힘에 관한 비판을 수행하는 중요한 물음들을 제기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보편주의적 신뢰와 미래 세계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지탱해주는 정치적 공동체는 여전히 가능한가? 타자에 대한 개방과 환대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적 이념은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가?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안전이 충돌하는 가운데 심화되고 있는 배제와 혐오의 기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검역과 방역이라는 일상적 통제를 넘어, 각종 현란한 기계 장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타인과의 연결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한가 ? 우리의 삶이 재난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새 사회가 자연스럽게 구축해버린 제도적 감시 장치들의 작동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연대와 연결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계기를 확보하기 위한 실천들. 그것은 재난의 일상화를 넘어 우리의 삶 속에서의 자유의 가치를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한 질문들과 함께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
발화가 발화하는 곳(2020년 『문학과사회 하이픈』 겨울호 서문)
김형중
좀 느닷없지만, ‘민주주의는 합의가 아니라 계쟁을 먹고 자란다’라는 랑시에르식 명제 옆에, ‘오래 살아남는 것은 작가나 작품이 아니라 형식이다’라는 모레티식 명제를 나란히 놓아보자. 간단히 말해,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명제 사이에 어떤 매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이번 호 『문학과사회 하이픈』의 기획 의도이다.
노사와 양당과 좌우와 남녀가,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국민 모두’가 ‘합의’하는 이상적인 공론장 따위는 없다. 왜냐하면 공론장은 발화 (불)가능성의 장이기도 해서, 그 안에 ‘발화 자본’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 이른바 ‘몫이 없는 자들’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서 기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성이 모두 발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쟁은 따라서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말로서 정립하고자 할 때 발생한다. 물론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이토 준이치의 어법에 따라 ‘발화 자본’을 ‘담론 자원’이란 말로 바꿔보자. 그에 따르면 “‘담론 자원’은 공공성에의 실질적인 접근을 근본적으로 좌우한다. 그 이유는 공공성에서 의사소통이 바로 언어라는 매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담론 자원’을 가진 자들이 ‘헤게모니’를 쥔다”(『민주적 공공성』, 윤대석 외 옮김, 이음, 2009, p. 33). 물론 이때 ‘담론 자원’의 활용 여부는 말할 것도 없이 공론장의 규칙을 지배하는 언어/문화적 코드의 습득 여부와 관련된다. 가령 적격한 어휘나 적당한 어법 등에 따라 코드화되지 못한 소리는 그저 소음일 뿐 말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발화가 항상 어려운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새로운 발화의 내용이 구태의연한 담론장의 규칙 속에서 발화되는 사례들(가령 박노해의 ‘서정시’)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도해왔던가!
새로운 발화 자본의 유입, 그리고 새로운 발화의 형식이 기존의 공론장에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의 몫을 요구할 때, 그 균열의 지점이 바로 계쟁이 발화하는 장소다. 따라서 안정적으로 보이던 공론장이 요동을 치는 시기일수록,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발화의 내용만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형식을 통해 발화되는가 하는 점이 실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특정 발화의 내용이 그 유의미성을 소진한 뒤에도, 그 발화의 형식은 공론장 내에 남아 일종의 ‘물려받은 형식’으로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아마도 발화 형식들의 역사를 다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1970년대 지사적 지식인과 문인 들의 ‘대표/대신해서 발화하기’가 1980년대 무크지운동이나 집단창작, 수기, 르포 등의 발화 형식에 의해 어떻게 도전받았는지를 돌이켜보는 일은 오늘의 관점에서도 자못 흥미롭다. 기존 공론/문학장에 몫이 없던 자들로서의 민중이 직접 발화(요즘 유행하는 비평적 언어로는 ‘1인칭의 역습’)하기 시작했을 때, 발화의 형식은 요동쳤다. 1990년대의 내면적 발화, 문학주의적 발화, 진정성의 발화는 아마도 요동치던 1980년대 공론장의 안정화 혹은 진화 과정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고, 2000년대 후반 이후 문학과 정치, 문학과 젠더 담론의 폭발적 재등장은 공론장 내 계쟁의 재발화 과정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이것은 모레티식 파동 곡선인가?).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강남역 살인 사건, 성폭력 말하기 해시태그운동 등이 촉발한 새롭고도 다양한 글쓰기/발화 형식들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들’에도 말이다.
소리가 말이 되는 것은 바로 그 형식의 능력과 무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레티의 말마따나 발화자가 (부지불식간에) 고안한 어떤 형식은 발화자 혹은 발화 내용보다 힘이 세고 또 더 많은 소리를 말로 만든다.
물론 우리 시대의 공론장 내에서 다양한 발화 형식이 요동치는 이유가 비단 정치/사회적 변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루카치적인 의미에서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 인터넷(특히 SNS) 환경이 각종의 발화 형식에 미치는 영향력은 정치/사회적 변화의 영향력을 훌쩍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발화가 매체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매체가 발화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한다는 매체 이론가들의 주장을, 어떤 수정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다.
『하이픈』 초입에 언론학자인 남재일의 「한국 공론장의 분열과 틈새」를 배치한 것은 그런 이유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최근 한국 공론장의 상태를 “다양한 비윤리적 발화의 “수사학적 형식들”이 “정파적 담론을 생산하는 효율적 수단으로 동원된다. 언론장을 특징짓는 발화의 양식은 ‘적대의 언어’라 할 수 있다”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각각 절을 달리해 ‘언론의 정파성’ ‘혐오 발화’ ‘발화 문법의 파괴’ 현상 등을 분석하면서 그가 정작 찾고자 하는 것은 공론장의 그와 같은 분열상 속에 여전히 잠재해 있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다. 혐오와 정파주의가 실은 과녁을 잘못 택한 분노의 이면일 수도 있다는 그의 진단은 새겨들을 만하다.
박소정의 「#해시태그로_말하는_여성들」은 SNS를 통한 ‘간편한’ 발화가 실상에 있어서는 얼마만 한 위력이 있는지를 수많은 사례를 통해 입증한다. 비단 한국의 경우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해시태그운동들을 소개하면서 필자는 그 간편한 SNS상의 글쓰기가, “페미니즘 담론장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낮추고, 여성들 간의 정동적 공동체를 만들고, 여성의 목소리를 아카이빙하면서” “새로운 행위능력을 지닌 주체의 등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필자의 말마따나 우리는 “조금 더 쉽고 간편하게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전상진의 「발화의 경계와 질서를 겨냥한 도발—게으른 도발의 예정된 실패」는 ‘도발적인 도발론’이다. 이 글이 ‘도발론’인 것은 최근 ‘도발’을 발화의 장기로 삼은 논객들의 수사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도발’을 일종의 학적 대상의 자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이 ‘도발적’인 것은 실명들까지 거론해가며 조단조단, 유머러스하면서도 반어적인 어법으로 도발자들을 도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료한 글이 주는 읽기의 즐거움과, 도발이 주는 통쾌함을 두루 맛볼 수 있는 글이다.
이수명의 「시와 발화의 문제」는 문학, 특히 시에서 자아, 즉 1인칭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 파울 첼란의 ‘자아와 예술’이라는 대립쌍을 글의 골조로 삼아 두 계보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내는 시사적 안목이 남다르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후반부, 최근 시의 한 경향으로 ‘1인칭 발화 형태’의 주류화를 꼽고, 그 전망을 타진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중이나 노동자 계급 등의 기의 위에 성립한다. [……] 그런데 이것은 21세기를 훌쩍 넘어선 지금의 상황에 낯설고 어울리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도 극히 분화되어 있다. 리얼리즘이 원하는 (또는 의지할 수 있는) 모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 경우 리얼리즘의 회로 안에서 어떤 집단이 대체 모형으로 간택될 필요가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예컨대 여성을 비롯해 소수자가 새로운 시대의 가상적 프롤레타리아트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후속 논의가 필요해 보이는 중요한 지적으로 읽힌다.
김민조의 「여러분과 우리 사이에—스탠드업 코미디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에 관해」는 해나 개즈비의 스탠드업 코미디 작업에 관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은 단순히 한 코미디언의 작업에 대한 작품론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데, 이른바 ‘발화의 당사자성’에 대한 첨예한 질문이 이 글의 내용을 이루기 때문이다. 코미디를 통해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없고, 오직 펀치 라인을 위한 긴장 조성의 수단으로 전용될 수밖에 없다”는 역설을 돌파하기 위해 개즈비가 수행했던 ‘코미디로 코미디 부수기’를 예로 들면서,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발화자와 청자 간 상호 윤리로서의 “취약성의 연대”이다.
이번 호 『하이픈』의 마지막 글은 조효원의 「궁지에서 궁진하기—학문과 탐구와 웃음에 대하여」이다. 기획의 맨 끝자리에 배치하게 된 것은 이 글의 성격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조효원의 글은 이번 기획 전체에 대한 추상도 높은 원거리 지원 사격에 가깝다. 그만큼 발본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공론장이 처한 상태를 성찰하게 하는 글이다. 필자에 따를 때 우리 시대는 막스 베버의 ‘세계의 탈주술화’, 곧 ‘계산을 통한 지배’가 극한에까지 이른 시대다. 심지어 계산의 논리성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는 아전인수와 견강부회의 시대이자 ‘탐구주의’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시대다. 아마도 저 수많은 악의적이고 몰상식한 발화들의 역사철학적 기원이 거기일 것이다. 그럴 때 필자가 여러 사상가를 우회해 제안하는바 대안적 윤리는 탐구주의자와 아이러니스트의 상호 방문이다. 그들의 상호 방문이 “프루스트적 웃음”을 낳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일말에 불과하지만, 사유하는 자는 그 일말을 포기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번 호 〈지성〉에는 신호재의 「문학과 예술을 위한 현상학적 시론: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싣는다.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서설」을 주 텍스트로 삼아 현상학 일반을 알기 쉽게 개관한 글이다. 이 글의 미덕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현상학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도를 높이기에 적당한 글이란 점이다. 그리고 다른 미덕은 이 글이 바로 지금,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시점에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현상학을 ‘주체와 대상 세계의 접촉면을 최대한 넓히려는 학문’이라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다면,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주체와 세계의 접촉면을 최소화하려는 ‘뉴 노멀’의 시대를 예감케 하기 때문이다.
〈리뷰〉에는 김보경, 김지윤, 소유정, 임지훈, 최현식, 홍성희, 박서양, 백지은, 정홍수, 한영인 평론가의 소중한 원고들을 싣는다. 유독 독자들에게 소개할 만한 신간이 많이 나온 계절이었다. 제한된 지면 탓에 더 많은 신간을 소개하지 못해 아쉽다.
『문학과사회』의 창작란은 이번 호도 역시 풍성하다. 마종기, 함성호, 김미지, 정한아, 김이강, 안미옥, 오은경의 시들을, 그리고 최수철, 손보미, 조남주, 정소연의 단편소설과 구병모의 장편 연재 2회분을 싣는다.
독자들에게 제10회 문지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한다. 수상작은 임솔아의 「희고 둥근 부분」이다. 자세한 심사 경위와 심사평은 본권을 참조해주시길 바란다. 분명 길고 추울 것 같은 겨울이 온다. 부디 『문학과사회』 2020년 겨울호가 독자들의 겨울나기에 작으나마 힘이 되길 기대한다.
산만한 함성에 맞서(2020년 『문학과사회 하이픈』 가을호 서문)
조효원
니코스 풀란차스를 위시한 주요 정치이론가들이 “위기관리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한 지도 어느덧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냉전이 종식되었고, 소위 민주화가 진척되었으며, 사회의 모든 부분이 기술적으로 첨단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여전히 관리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위기관리의 위기” 상황은 계속 진행 중이다. 아니, 요즈음 들어서는 오히려 심화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그러니까, 작금은 ‘위기관리에 의한 위기 상황’ 혹은 ‘위기로 위기를 끝없이 돌려 막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미상불 오늘날─분야를 막론하고─이론가들은 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편성된 체제가 되레 위기를 일으키(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심지어 더 크게 키우)는 역설적인 장면을 수시로 목도한다. 물론 거시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역사상 위기 아닌 시대는 거의 없었다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껏 여러 논자가 누차 언송한 것처럼, 21세기 사람들의 삶, 끝없이 거대해진 동시에 극도로 세밀해진 과학과 기술과 정책─주지하다시피, 이 세 가지는 현재 삼위일체trinity로의 완벽한 변신을 꾀하는 중이며, 머잖아 성공할 듯 보인다─덕분에 우리의 일상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지고 빨라졌다. 그런데 이 변화는 동시에 모든 가치와 의미를 무차별적으로 표백하는 ‘산문화(散文化)’의 과정이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가락과 리듬이 우리의 안과 밖을 간단없이 떠돌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는 지나치게 산문적이다. 이때 ‘산문적’이란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모든─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모르는─(목)소리가 제각기 독립적인 기율을 주장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말 그대로 ‘흩어진 언어들’의 세계이다. 하여 전체적인 문제 상황은 일견 출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띠는 듯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원리에 의해 대번에 정리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날 단독자의 시간성Zeitlichkeit은 모든 개인–집단–대중이 움켜쥔 시의성Aktualität과 영원히, 영원처럼 어긋나버린 듯하다. 폭발적인 동시 접속 및 효율적인 실시간 대화가 제아무리 빈번히, 성공적으로 이뤄진다 해도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비단 언어와 매체가 죄 흩어져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흩어짐 자체가 수면 아래에서 은밀히 추진되는 총체적 표준화total standardization에 의해 나날이,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비가시적 원심성이 우리 시대를 과거의 모든 시대와 구별되게 한다. 그렇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산문적 위기 시대, 개체적 율격(律格) 포만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진보로 인식하며 적극 옹호하는 자들, 그러니까 세속주의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들로 한결같은 몰역사적 관점의 갑옷을 두르지 못해 안달이며, 지극히 피상적인 공부로 얻은 역사의 편린들을 표창처럼 (서로) 날려대기 바쁘다. 그런가 하면, 체험/상상 속 과거의 역사적 장면에 도리 없이 붙박여 있는 (이른바) 전통주의자들은 그만그만한 이유들로 갖가지 반시대적 표상들을 우산처럼 펼쳐 들고서, 오랜 세월 세뇌에 가까운 설교를 너무 경이(傾耳)한 탓에 지니게 된 ‘거룩한’ 확증 편향을 때론 참호처럼, 때론 폭탄처럼 변칙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왔다. 아니, 들이닥쳤다. 모든 전선과 노선이 일거에 헝클어졌고 , 모든 행선지가 돌연 사라졌다. 때맞춰 표창의 날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 확증 편향은 가일층 격렬해졌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갈 수도 , 돌이킬 수도 없다는 사실만이 점점 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참화를 부르는 묵시적 상상력은 어찌어찌 제어되고 있는 듯하지만─그러나 기후 위기가 이 허술한 방어선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짙은 무기력과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든 개의치 않겠다는 굳센 방관주의가 생존 및 생활에 대한 크고 작은 망집과 맞물려 생활 세계Lebenswelt의 구석구석을 일종의 지뢰밭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미증유의 위험 구역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새삼 깨닫게 된 (진부한 그러나 뼈아픈) 교훈 한 가지는, ‘어떤’ 바이러스와는 도저히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숱한 바이러스가 별다른 문제 없이 우리와 공존했고 또 하고 있지만, ‘어떤’ 바이러스는 인간 사회의 질서를 그야말로 처참히 짓밟는다. 멀게는 페스트균이 그랬고 , 가깝게는 스페인 독감을 퍼뜨린 병균이 그랬다.
하지만 여기서 ‘짓밟는다’는 표현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엄밀히 보자면, 짓밟는 행위의 주체가 바이러스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오히려 바이러스의 창궐을 막아야 할 국가 체제─여기서 ‘국가’는 풀란차스와 밥 제솝Bob Jessop이 말한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바이러스는 단지 이 주체의 행위를 유발하거나 견인할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이러스가 그러하듯 체제 역시 근본적으로 사역적(使役的)–시차적(時差的) 활동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즉, 바이러스가 오직 숙주를 통해서 그리고 잠복의 형태로 위력을 발휘한다면, 국가 체제는 혹시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모든 (아니면, 적어도 가장 큰) 책임을 떠안을 잠재적 희생양을 언제나 미리 점찍어둔 상태에서 상황 대처에 나서는 것이다. 정말로 일이 잘못되어 어떤 참사가 발생할 경우, 그렇게 점지된 희생양이 가장 먼저 (그리고 사실상 끝까지) 직면하게 되는 사태는 (목)소리의 상실이다. 실제로 (목)소리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기서 상실이란, 그들의 (목)소리가 (거의) 완벽하게 묻혀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읽히지 않는 글이 근본적으로 글이 아니듯이.
이를 위해 국가 체제는 무수한 독립적 기율들이 내지르는 산만한 (그러나 지나치게 시끄러운) 함성을 십분 활용한다. 바꿔 말하자면, 효과적인 반발 통제와 안정적인 체제 유지를 위해 무정부주의적 기운을 조성하고 조장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잠잠해지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많은 소란스러운 일들로 인해 그 사건이 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예외 없이 먹히고 통한다. 왜냐하면, 지젝이 말했듯이, “‘좋은’ 표현의 자유와 ‘나쁜’ 소문을 구분할 쉬운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1 아니, 사실상 ‘어려운’ 구분법조차 있을 수 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특히 이처럼 지독하게 ‘산문화’된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나쁜 소문이 이긴다. 왜냐하면 시간이 그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희생양은 시나브로 잊히고 사라지며, 그사이 체제는 다시 활동을 준비한다. 나쁜 소문의 매체와 확성기 들을 은밀히, 부절히 양성하면서 말이다. 요컨대, 치명적 바이러스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은 국가 체제의 작동 원리 그 자체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희생양에게만 해당되는 제한적인 서사일 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체제의 수혜자와 방관자 들은 바이러스가 몰고 온 극심한 재앙 속에서조차 이윤과 차익의 기회를 포착한다. 쉬이 예상되는바, 그들은 그 기회를 전용 (專用)할 때 발생하는 각종 난관 및 그에 따른 고통에 대해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가장 큰 목소리로 , 더없이 절절하게 호소할 것이다 (실제로 그래왔다). 다름 아닌 (현실적– 잠재적) 희생자들을 향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호소는 틀림없이 순도 백 퍼센트의 정직함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번 호에 게재한 특집 글에서 문성욱이 적절히 언명했듯이, “상실은 제각기 뼈아프고 위기는 매번 새로워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기는 난망하다”.
하지만 바로 이 난망함이 문학과 인문·사회과학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된다. 이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확실한 것은, 그 양식이 때로는 시간의 질곡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버티는 것만이 무조건 능사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해 어떤 위기는 비극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 변화 과정에서 묻혔거나 묻힐지도 모를 모든 (목)소리를 쟁이고 감싸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의 일이다. 다시 말해, 문학은 흩어진, 흩어지는 언어들을 붙들어 얽동이는 일이다.
이번 호 『문학과사회 하이픈』의 기획은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세계의 풍경들을 글로벌한 차원과 학제적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소묘하고 , 나아가 그 풍경들의 속살 및 거기에 생긴 (발견하기는 어려우나 실로 깊디깊은) 여러 상처를 진단해보는 작업들로 꾸몄다. 먼저 유럽이다. 앞서 언급한 불문학자 문성욱의 글은 중세 프랑스 문학의 사례를 통해 재난의 시대에 쓰고 읽는 행위가 그예 처하게 되는 역설과 난경을 섬세한 눈길로 추적한다. 그에 따르면,
“잊힌 기원의 흔적인 텍스트가 바야흐로 기원적 기억이 된다”. 이 사태는 문학의 근본적 무기력과 존재 의의를 동시에 구성하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 정치철학자 박이대승의 글은 이탈리아 사상가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 상태 개념을 비판적으로 호출하여 최근 프랑스에서 선포된 보건 긴급 상태의 정치적, 철학적 의의를 짚어보고 , 이를 응용하여 “한국에서는 헌법이 확고히 보호하는 권리가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통렬하고도 타당한 지적을 내놓는다.
프랑스 관련 세번째 필자인 번역가 배세진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대처를 “총체적 무능”이라 강하게 질타하면서, 바이러스로 인해 표면 위로 불거진 “인종주의라는 증상”에 대한 인문 –사회과학적 성찰의 시급성을 환기시킨다.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는 현재 히말라야에 체류 중인데, 감사하게도 우리의 갑작스러운 청탁에 응해주었다. 수많은 사람이 “심각하게 제한된 이동성”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에 맞서 ‘번역’이라는 소중하고도 근본적인 소통 형식에 대해 고민하는 그의 질문과 전언에 많은 독자가 눈과 귀를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그녀의 말이다. “구와 절의 순서와 같은 작은 요소가 우리가 어디에 주의를 기울일지를 안내하고 , 이것으로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 독일에 체류 중인 매체문화학자 강성운의 글은 동유럽 출신의 저임금 독일 노동자들의 사례를 소개하며, 만약 우리 각자가 “자신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라는 서사에 빠져든다면, 연대와 회복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소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다음은 미국이다. 과학사 연구자 이두갑은 “2020년 백신 개발 질주의 풍경”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 이어서 ‘면역–자본’ 및 ‘면역–여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슈를 역사적인 시각에서 차분히 고찰한 뒤, “전염병 이후의 사회”를 구축하는 방식은 면역을 얻지 못한 자들을 배제하거나 낙인찍는 방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당위를 강단 있게 역설한다. 보스턴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정치학자 이재욱의 글은 “코로나 사태가 제기하는 오래된
질문들” 가운데 특별히 “노동력의 이주와 재편”이라는 문제를 천착한다. “전염병의 전 지구적 확산은 이미 인종과 젠더를 교차해 구조화된 불평등을 가속화시킨다”는, 암울하지만 적실한 그의 진단은 팬데믹 상황에서 전 세계적인 “노동력의 월경”을 어떻게 재구조화할 것인가에 앞으로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진중한 주장으로 매끄럽게 이어진다. 두 사람의 문제 제기는 향후 여러 학계에서 더욱 심도 있는 논의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로 시야를 돌려보자. 기자 출신의 사회학자 안은별은 자신이 체험한 일본 관광의 사례를 언뜻 가벼운 수기의 형식으로 술회한 뒤, 이로부터 “누구의, 어떤 목적의, 무엇을 통한 이동이 우선되어야 하는가”라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묵직한 질문을 이끌어낸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줄곧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곳에 갈 수 있고 가고 싶고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해온 상상력”이 대관절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회고적으
로 따져 묻는 것이 그의 관심사인 것으로 보인다. 의료인류학자 서보경의 글은 전쟁의 은유를 통해 “바이러스의 일생과 면역학적 세계”를 흥미롭게 묘파하는 데서 출발하여, 통계학적 “인구 집단을 넘어서는 함께–있음의 공동체”를 구상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에 대한 요청으로 진입한 다음, 마지막에 가서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명의 상호 관계와 의존을 그 중심에 두는 정치의 장”을 여는 것이라는 호소에 도달한다. 이 호소는 실로 간곡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이 위기를 살아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애초에 통제할 수 없는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군집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어로 번역, 출간된 김현경의 『사람, 장소 , 환대』에 대해 저자와 역자가 나눈 시의적이고 심층적인 대담에서는 이 시기 주요 사안 중 하나인 개인 정보 문제 등을 비롯하여 사람의 자격과 사회의 의무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읽을 수 있다. 대담의 사회 역할을 맡아준 『한겨레』 이유진 기자께도 감사드린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들이 하이픈 기획을 결정하고 필진들을 섭외한 뒤 한 달여가 지난 시점에 이른바 ‘김봉곤 사건’이 발생했다. 작가의 (다소 뒤늦은) 사과와 젊은작가상 반납, 그리고 해당 작가의 책을 출간한 두 출판사의 전격적인 환불 조치 등으로 인해 상황은 일단락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무엇보다 ‘오토픽션autofiction’이라는 문제적 장르 자체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편집동인들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그런 취지에서 우리는 이번 호 〈메타비평〉 지면을 오토픽션 및 김봉곤 사건에 대한 성찰로 채우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 불문학자 변광배가 오토픽션의 역사와 관련된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글로 긴급한 청탁에 응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오토픽션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예방법은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할 지인들의 확실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올바른 시각이며,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름 아닌 김봉곤의 사례가 여실히 보여주는바, 동의의 ‘확실성’ 혹은 ‘완전성’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작가와 지인 들은 도저히 극복 불가능한 견해차를 노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예방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고도 불안한 선택지인 것이다.
다음으로 , 평론가 이소연이 김봉곤 사건의 발단과 추이를 상세하게 되짚은 다음, 그것을 발생시킨 문단 시스템 및 비평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은 글을 보내주었다. 칭찬 지상주의에 매몰된 한국 비평의 자성을 촉구하며 우리 “시대에 상처를 입혀야만 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경청에 값한다.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집필된 편집동인 강동호의 글은 “비평이 권력과의 싸움이고 , 문학이 대안 권력을 상징했던 빛나는 과거”는 이제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고 냉연히 단언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에 안주하지 않고 , 미래와 전망을 향한 환상적 욕망에 견인되지 않기 위해, 비평은 그것과 불화할 수 있는 시공간적 지평을 요구하는 중”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추문이 아닌 불화, 이것이 핵심이다. 아마도 비평은 불화의 담론 공간을 손수 축조해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19가 만든 아득한 거리를 뚫고 도착한 귀한 작품들이 본권을 장식하고 있다. 우선, 이영광, 이영주, 최하연, 임솔아, 강혜빈, 주민현, 김연덕, 조해주, 박지일의 시가 독자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그런가 하면, 황지운, 최진영, 김초엽, 전예진의 소설은 ‘사회적 거리 두기’에 지친 모든 독자를 마스크가 필요 없는 이야기의 세계로 유혹 /초대한다. 그동안 성실하게 연재를 이어온 정지돈은 이번 호로 장편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간의 수고에 감
사한다. 정지돈의 바통을 구병모가 이어받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을 청한다. 지난 계절의 신간들에 대한 리뷰는 김보경, 김언, 이병국, 김형중, 오혜진, 윤경희, 조효원 평론가가 맡아주었다. 이번 호 〈지성〉 코너는 국문학자 손유경이 『문학과지성』의 역사 속에서 감지되는 콤플렉스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흥미로운 글로 채워주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시대와 시절의 ‘산만한 함성’에 저항하며 『문학과사회』를 펼쳐 든 모든 독자께 감사와 격려를 함께 보낸다. 바라건대, 『문학과사회』를 읽는 이들의 뚝심으로 인해 나쁜 소문의 득세가 조금이라도 주춤하기를, 나아가 좋은 자유의 표현들이 더 큰 (목)소리와 더 투명한 매체들을 만나게 되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국가 체제의 작동 원리에 작게나마 파열음이 발생하기를.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질문들(2020 문학과 사회 여름호 서문)
강동호
누군가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인사가 의례적으로 들리지 않는 시기를 우리는 통과하는 중이다. 비록 통과라는 단어를 쓰기는 했지만 그 말이 다소 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pandemic이 선포된 지 두 달여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사태가 종식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완전한 종식이 불가능하다는 의료 전문가들의 불길한 예측이나, 정부 당국이 시행하고 있는 다양한 행정적, 의료적 조치들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진단은 코로나 이전의 사회로 되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거듭 강조하는 중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회자되고 있는 ‘재난의 일상화’라는 슬로건은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재난을 받아들이고 , 차라리 그것이 촉발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여러 전망이 엇갈리고 있지만, 이러한 목소리들은 공통적으로 마스크 쓰기의 일상화, 대면 접촉의 최소화, 방역의 생활화 등으로 대변되는 지금 –여기의 현실이 일시적인 예외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미래의 정상 상태의 밑그림이라는 사실을 불안하게 암시하고 있다. 물론 재난의 일상화는 사회 시스템의 변동에 국한되지 않고 ,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감정과 정동 일반까지도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생명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 못지않게, 현재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또 다른 감정들은 모종의 피로와 권태, 그리고 정체 모를 우울과 연계되어 있다. 휴대전화로 날아드는 긴급재난문자에 점점 심드렁해지는 것처럼, 공포와 두려움이 만성화될수록 현 사태가 촉발한 변화를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징후 역시 곳곳에서 포착되는 중이다.
한층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징후적 변화들의 일상화가 공동체에 대한 기존의 정치적 사유와 상상력의 근본적 위기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 최우선의 가치로 강조되는 가운데, 고립과 단절을 토대로 한 새로운 사회적 풍경의 형성을 당연시하는 흐름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코로나 사태 이후 각 국가가 취하고 있는 적극적인 방역 조치와 사회적 통제 정책을 비판하는 의견들을 개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푸코와 벤야민의 사유를 토대로 평소 아감벤이 일관되게 개진하고 있는 생명 정치 권력에 대한 비판이 그리 새롭다고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장 –뤽 낭시 Jean-Luc Nancy나 에스포지토 Roberto Esposito 등 동료 철학자들이 비판하고 조롱했듯, 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과 조치를 파시즘의 전조와 동일시하는 관점이 추상적이고 무책임하게 들리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재난의 일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당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변화들을 돌이켜볼 때, 그의 비관적이고 종말론적인 예측들 가운데 되새길 만한 질문이 아주 없는 것 역시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개인의 자유가 과도하게 제한되고 감시되는 사례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시민들의 건강이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법적 의무로 강제되기 시작했다” 2)같은 글.
는 진단처럼 개인의 신체적 건강과 생명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법적인 조치들이 구비되고 ,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기술적 통치 장치들이 개발되고 작동하고 있는 현실 앞에 직면하고 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의 효과적인 방역을 당연시하는 가운데 재난의 계급화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소수자와 이민자 같은 사회 내 취약 집단에 대한 배제와 혐오 역시 그 이면에서 은밀하게 진행 중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사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으며, 아감벤의 어조를 흉내 내며 현실을 어둡게 묘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일각의 전망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세계의 고립과 단절을 강화하는 다양한 통치 장치들의 실정적 힘에 관한 비판을 수행하는 중요한 물음들을 제기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보편주의적 신뢰와 미래 세계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지탱해주는 정치적 공동체는 여전히 가능한가? 타자에 대한 개방과 환대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적 이념은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가?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안전이 충돌하는 가운데 심화되고 있는 배제와 혐오의 기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검역과 방역이라는 일상적 통제를 넘어, 각종 현란한 기계 장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타인과의 연결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한가 ? 우리의 삶이 재난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새 사회가 자연스럽게 구축해버린 제도적 감시 장치들의 작동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연대와 연결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계기를 확보하기 위한 실천들. 그것은 재난의 일상화를 넘어 우리의 삶 속에서의 자유의 가치를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한 질문들과 함께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
코로나19의 확산을 통해 우리는 재난이 일상화된 현실을 새삼 체감하게 되었지만, 돌이켜보면 2010년대의
한국 문학장 안팎에서 연이어 불거진 사건들 역시 일종의 재난에 비유될 수 있는 것 같다. 신경숙 표절 사건,
문단 내 성폭력, 그리고 최근에 점화된 이상문학상 사태를 목도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그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국 문학이 그동안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민낯을 폭로하는 재난과 같은 일들이었음을 체감한다. 코로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듯이, 우리는 이러한 문학적 재난 이전의 세계로 회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무책임한 냉소와 과도한 비관주의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 문학장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적 위계질서와 불평등을 지탱하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에 대해 질문하는 특별한 노력 역시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연결과 연대를 통해 좀더 자유롭고 평등한 문학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비판적 질문의 일상화를 실천하면서 문학적 재난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