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고 이따끔 눈깨비가 오는 날씨다. 이런 날씨라면 몸을 움추리기 마련이다. 쨍하고 해뜨는 날이면 너도나도 산행길에 나서지만 지꿎은 날씨에는 몸을 사린다. 언젠가 운봉님이 금강산에 다녀와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금강산의 여성가이드들은 손님이 언제 금강산으로 찾아오든 모두 반겨맞는다고 한다. 비오는 날에 찾아오면 “손님은 정말 복도 많네요. 비오는 금강산의 풍경을 보는것은 누구에게나 차례지는 행운이 아닙니다. 금강산은 비올때가 가장 운취가 있습니다.”고 한단다. 만일 눈이 올때 찾아가면 가이드들은 또 “정말 복을 받은 분입니다. 금강산의 설경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금강산의 가장 아름다운 때가 바로 눈이 내리는 때입니다.”고 한다. 최고의 가이드들이다. 손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기쁘게 해드리려는 그 마음이 참으로 가상하고 금강산보다 아름답다.
산은 사계절 모두가 나름대로 운취가 있다. 눈이오든 비가오든 아니면 서리가 내리든 시각과 느낌에 따라 그 멋을 달리할수 있다. 어쨋거나 이날은 나를 포함하여 “미친놈” 넷이서 소하룡을 출발하여 도문으로 향했다. 워낙 산길이라면 좋을텐데 길이 질고 미끄러워 그냥 콩크리트포장도로를 따라 줄창 걸었다. 소하룡의 <<마소선>(마패-소하룡) 21키로지점에서 걸만동까지 걸었다. 걸만동에서 다시 신선더기부근에서 산을 하나 넘어 일광산에 이르렀다. 일광산에서 도문역으로 가 뻐스를 타고 연길로 돌아왔다. 60여리 남짓한 길을 7시간30분을 걸었다. 두개의 산을 넘는데 시간이 퍼그나 걸렸다.
길에서 세번을 쉼을 했다. 쉼은 바로 물을 마시거나 약간의 간식을 먹는 시간이다. 첫 쉼은 소하룡에서 마패까지 거리의 중간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북골과 서쪽의 번들령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친다. 일제때에 여기는 일본헌병분경소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분견소의 규모를 초월하는 병력이 있었다. 분견소에는 일반적으로 장교 8명에 백명남짓한 헌병들이 있었지만 여기에는 수백명이 있어 무엇을 하는 놈들인지 삼동, 걸만등지의 백성들조차 알길이 없었다. <<화련리참안>>때에 이 분견소의 헌병들이 화련리의 백성들을 붙잡아다 고문을 하고 매돌에 갈아죽이는등 소름끼치는 짓을 했다. 45년 8월, 일본인들은 도망을 가면서 죄장을 감추느라 분견소의 모든 건물과 시설들을 파괴하였다. 후에 매돌을 발견하고 물증으로 박물관에 보관했었는데 언제인가 박물관에서 직원들의 사택을 지으면서 기초돌로 해버렸다.
1979년 8월에 삼동촌의 한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어느날 새벽, 기계소리에 창문이 떨리기에 문을 열고 나가보니 글쎄 짐을 꽉 박아실은 일본인 군용트럭 13대가 먼지를 일구며 골안으로 들어갔었습꾸마. 맨뒤의 트럭은 짐을 싣지 않고 군인들인지 뭔지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차들이 나올때는 덜컹거리면서 빈차로 나왔습꾸마…”
그러고면 이 분견소가 있던 곳은 비단 헌병들만 있은것이 아니라 일본인옷을 입고 굴을 파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그 13대의 차에 실은 “짐” 은 무엇일가? 아마 황금일수도 있고 유독물질일수도 있다. 근데 “맨뒤의트럭”에 앉은 사람들이 나오질 않는것으로 보면 황금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 이들은 인부들일것이다. 짐을 동굴에 옮겨넣은후 입을 봉하느라 굴에서 나오지 못하게 아예 굴의 입구도 봉해버렸을 것이다.
두번째 쉼은 10리를 더 가서 걸만촌에서 쉬였다. 걸만촌은 세개의 골짜기물이 합치는 곳에 있다. 지금의 걸만촌은 볼품없이 작은 마을이지만 한때(56년)는 매우 커서 걸만향이라고도 부른적이 있다. 그때 걸만은 연길현 월청구에 속했는데 월청구가 걸만향과 석건향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월청향이 되면서 향소재지가 마채촌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69년도에 월청향이 도문시에 귀속되였다. 1940전에는 걸만촌이 월청촌에 속했으며 화룡현의 귀속되였었다.
우리는 마을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먹었다. 마을을 보니 많은 집들이 “룡의 꼬리끝”에다 집을 지었다. 룡은 풍운을 일으키며 하늘을 날고 꼬리는 힘이 있다. 그러니 그 꼬리의 기운을 받으면 힘이 있는 인물이 날것이 아닌가? 사실 걸만이라는 지명은 누가 지엇는지 모르겠지만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난다는 뜻에서 나온 지명이다. 광서년간에는 인물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우리가 다리쉼을 하느라 잠시 농가 대문앞에 앉았는데 그 집이 바로 룡의 가장 끝자리이다.
멀리는 그만두고 걸만촌에서 배출한 인물 한사람만 말하자. 바로 오빈이다. 오빈은 훈춘현 제 5임서기였으며 대황구 13렬사중의 한명이다. 일찍 김일성이 지휘한 동녕현성공략전투에서 폭파약을 안고 적진에 뛰여들어가 적의 거점을 폭파해버린 데서 전투영웅이라고 소문났다. 그후 대황구의 한 농가에서 자다가 토벌대에게 포위되자 죽음을 각오하고 앞장서 문을 박차고 나가 몸으로 적의 화력을 막아냈다. 그는 배에서 흘러나오는 창자를 왼손으로 밀어넣으면서 적들은 개울가로 유인해갔다. 결국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쓰러졌다. 쓰러지는 순간에도 총을 적들의 손에 넘기지 않으려고 유조를 빼서 멀리 던지고는 총을 깔고 희생되였다. 배에서는 창자라 계속 흘나왔다.
오빈은 1931년봄에 연길현위의 비서로 있다가 1932년 2월에 훈춘현위 제5임서기로 전근되였다. 그러나 몇달후 즉 그해6월에 해임되였다. 1933년10월6일 그는 훈춘유격대에서 보통전사의 신분으로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오빈은 농민들이 맹목적으로 들고일어나 죽이고 불사르는데 물만을 품고 투쟁의 현실성과 장기성을 고려하면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데서 동만특위의 눈에 거슬렸으며 그런데다 훈춘에 있던 왕옥진 등 구국군을 쟁취하여 항일전선에 겨우 끌어들였는데 재물에 눈이 어두운 왕옥진이 일본인들의 유혹에 넘어가 변절한후 공산당원 여럿을 작두로 목을 베여버렸다. 그 책임을 오빈이 안게되였던 것이다.
오빈은 김일성과 절친한 친구였다. 1933년5월 오빈과 김일성은 종성에 갔다. 김일성은 오빈에게 “지도직에서 떨어졌다고 너무 상심말게..”하면서 어깨를 두드렸다. 오빈은 “난 아무렇지도 않아 워낙 락천파가 아닌가..”하니 둘은 호탕하게 웃었다. 종성에 있던 오빈의 아버지 오의선이 아들과 아들친구가 오자 멀리 풍계장(풍계리)에까지 가서 메밀을 사와 메밀국수를 눌러주었다. 김일성은 국수를 좋아했다. 그날도 국수를 두 사발이나 먹고 “아버님 국수가 참 맛있어요.”하면서 연신 감사를 드렸다. 김일성은 오의선이 물을 길러 멀리를 가는것을 보고 집 옆에다 박우물을 파드렸다…
오빈이 희생되자 김일성은 비통에 잠겼다. 그는 “오빈을 포함한 13용사의 희생은 나에게 청천벽력같은 충격을 주었다... 오빈은 나의 가장 친밀한 전우이고 동지이다.”(세기와 더불어중에서)고 했다.
커피를 마신후 우리는 개울을 건너 도문을 바라고 산을 올랐다. 나는 진달래 피는 산기슭에서 부근의 걸만촌과 수구촌 그리고 걸만촌 북쪽에 있는 유기촌과 립봉촌은 바라보았다. 마을마다 모두 채색토기기와와 양철기와를 얹은 네모번듯한 새집들이고 길도 모두 콩크리트포장도로였다. 사회가 참으로 좋아졌다. 누구의 집인지는 모르지만 울타리안에 뜨라또르가 3대나 있었다. 농기계도 구전했다. 지금의 농촌은 변화되고있다. 호도거리에서 이젠 농장화로 나가는 추세인것 같다. 전문농장과 주식제농장이 요즘 류행이다. 전문농장은 농업기술과 경제실력을 갖춘 사람을 주축으로하여 단일생산을 하는 농장이고 주식농장은 밭을 임대를 맡고 임대료와 로동비용을 지불하면서 농사를 지어가는 농장이다. 수구와 걸만촌의 밭고랑이 길고 또 대형농기계들이 수두룩히 보이니 아마 이 마을들에서 이미 농장화가 된듯했다. 그리고 여기 저기에 가든인지 아니면 생태원인지 아무튼 크고 아름다운 집들과 잘 다듬어진 정원들이 보인다. 농촌문화가 바뀌여가고 있다.
진달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대포령(한때 해방군들이 대포를 걸었다고 하여 지은 이름)에 올랐다. 옛날 봉화대자리인지 대포를 걸었던 자리인지 둥그렇게 파놓고 돌로 쌓은 터를 발견했다. 여기는 범진령의 줄기이다. 범진령의 동쪽은 일광신이요 서쪽은 이 대포령이다. 이 대포령을 10년대에는 회어목이라고도 불렀다. 대포령에서 줄기를 타고 조금 내려가면 여기저기에 커다란 바위가 많은데 그 가운데서 가장 넓은 바위가 수월바위이다. 고승 수월선사가 그 바위에 앉아 삼매경에 들었었다. 여기에서 세번째로 휴식을 했다.
오후4시가 되였을가? 일광산까지 왔다. 일광산에서 일광산 화엄사 산문에서 넷이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곧추 역전으로 향했다. 60여리길을 7시간 30분동안 즐기다가 차에 올랐다.
첫댓글 아주 뜻깊고 즐거운 산행사진과 글 잘 읽어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종종 산행이야기 들려 주세요.
풍부한 력사 견식입니다. 저도 걸거나 차타고 그길을 두어번 지났지만 그렇게 깊은 력사적 의미가 잠재한줄은 미처 몰랐네요. 좋은 공부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글, 사진 감사합니다.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뜻깊은 산행견문 즐감하였어요
고마워요.
산행후기와 사진 잘보고 내립니다. 네분중에 한분은 낮익은분같은데요. 항상 안산 즐산하세요
감사!
도솔님 산행기 첨 접하지만 반갑고 자주올려 주셔서 거운 시간 만들어 주세요. 저도 산을 좋아하지만` 요즘 잠이 부족해서 자주 못 들어 왔네요. 내내 건안` 하시구요
부족한 글 허물하지 않고 봐주시 감사합니다.
낯이 익은 네분의 멋진산행입니다 엄청 많이도 걷고요 .좋은 산행사진 및 글 그냥 기대해 봅니다 .
산행일기 즐감하였습니다.늘 즐거운기분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