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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장 종남산의 혈투
사자우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껄끄러운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 거렁뱅이 놈아, 내 일을 방해하지 마라!"
사자우가 욕설을 퍼붓자 홍칠은 여전히 헤죽거리며 맞받아쳤다.
"이 천하의 몹쓸 난쟁이 놈아, 네 농은 여기 오면 무슨 좋을 일이라도 있을 거라 믿었더냐? 오늘 이 홍칠에게 혼 좀 나 봐라!"
홍칠이 온 젓을 안 임조영은 속으로 안심을 했다. 모용준을 향해 분노의 검을 힘껏 휘두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모용준은 검을 피하느라 허둥댔다. 임조영이 바싹 접근하며 검끝에 힘을 주어 내리쳤다. 그러자 모용준의 소맷자락이 부욱 찢어지면서 너덜거렸다.
"난 네 지아비인데 이럴 수가 있느냐?"
모용준은 끝까지 임조영의 심기를 어지럽힐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서 모용준의 숨통을 끊어 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홍칠과 사자우는 오랫동안 서로를 향해 살기 띤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사자우는 지금 자신이 불리한 위치해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단지흥이 데리고 온 사대시위들 역시 자신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는 게 아닌가. 단지흥은커녕 왕중양도 죽일 수 없게 되자 사자우는 바짝 애가 탔다. 슬쩍 모용준을 돌아보며 그가 말했다.
"이봐, 왜 아직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있나?"
그가 모용준에게로 뛰어갔다. 모용준은 자기를 도우러 온 줄 알고 내심 안심을 했다.
"나를 따라가지 않겠나? 동궁이 비어 있다구."
조금 여유로워진 모용준이 임조영에게 다시 수작을 부렸다.
"모용준 이 놈, 당장 죽을 놈이 무슨 말이 그리도 많더냐?"
임조영의 입에서도 욕설이 터졌다.
"재수가 없을라니 계집까지 나서 귀찮게 구는구나!"
사자우가 병장기를 거칠게 내둘렀다. 병장기가 그녀의 몸 가까이서 윙윙거리자 왕중양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조심하시오!"
왕중양의 목소리를 들은 임조영은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여전히 살갑게 대해 주고 있는 그에게서 깊은 정을 느꼈다. 그러나 위기는 더욱 심각하게 임조영을 조여 왔다. 사자우가 필사의 방법으로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술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가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독사 두 마리를 꺼내는 게 아닌가? 독사들은 지체할 것도 없이 곧장 임조영의 머리와 어깨로 건너왔다. 질겁을 한 임조영이 뱀을 검으로 내리쳤다. 그중 한 마리가 검에 맞아 멀리 날
아갔다. 그러나 뱀은 상처 하나 입지를 않았다.
"아니!"
이를 본 임조영은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독사 한 마리가 자신의 어깨 위에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사이 독사가 그녀의 어깻죽지를 물어 버렸다.
"네 년은 지금 독사에게 물렸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사자우가 비웃음을 남기고는 모용준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바위를 박차고 뛰어오른 사자우가 고함을 질렀다.
"거렁뱅이 놈아, 조만간에 다시 네 놈을 찾아올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임조영은 서서히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이마에는 검은 줄이 한 가닥 새겨졌다. 그 줄은 차츰 수를 더해 가며 눈썹 바로 근처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독이 많이 번졌어!"
단지흥이 놀라 소리치자 홍칠이 사람들에게 일렀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하오!"
왕중양의 눈빛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임조영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녀가 부리는 사화를 계집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역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임조영이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사내놈이 풀어놓은 독사에 물렸다. 이제 곧 죽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나를 업어 집까지 옮겨 줄 수 있겠느냐?"
계집은 몸피도 작고 몹시 여위었지만 임조영의 명을 거역하려 들지는 않았다.
"사부님의 말씀 잘 알아들었어요. 사부님께서는 이 더러운 사내놈들이 지켜 보는 데서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으시다는 말씀이지요?"
계집의 말이 당돌하기는 했으나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임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마에는 검은 빛을 띤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혔다. 모두들 그녀의 땀방울이 검은 색인 것으로 보아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계집이 임조영을 업자 단지흥이 왕중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빨리 구하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사대시위에게 그녀를 옮기지 못하게 명령했다. 계집의 등에 업힌 임조영이 뇌까렸다.
"사내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야. 넌 이것을 잘 알아야 해."
계집이 눈물을 흘리며 임조영의 말에 순종했다. 계집은 임조영이 시킨 대로 그 말을 중얼거리며 계속 걸음을 때었다.
"사내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야!"
왕중양이 앞을 가로막았다.
"고집을 피우지 말고 어서 치료를 받게나."
그러나 임조영은 왕중양을 거들떠보지 않고 계집에게 명했다.
"내 검을 집어라!"
계집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럼 그 검으로 내 가슴을 겨누어라. 만일 저자들이 물러서지 않으면 넌 나를 찔러야 한다! 그 다음엔 너도 찌르고……"
임조영이 단호한 기색을 나타냈다. 계집과 임조영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을 듣고 있는 왕중양은 가슴이 쓰렸다. 그는 표독스럽게 변해 가는 그녀의 눈길에서 증오를 읽었다. 그것은 사내에 대한 깊은 저주의 기운이었다.
계집은 임조영을 추스려 업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왕중양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며 홍칠에게 조용히 부탁을 했다.
"길을 비켜 줍시다."
계집의 걸음이 비칠대는 것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계집은 힘겹게 몸을 움직여 초막으로 들어갔다. 왕중양은 달려가서 임조영을 부축하고 싶었으나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변해 버린 그녀의 태도 때문에 선뜻 용기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홍칠이 왕중양에게 말을 건넸다.
"지난번엔 꽤 고생을 했었겠군요? 그 사자우란 놈이 갑자기 보이지 않아 한참을 찾아다녔지요. 그 놈이 벼랑에서 그 짓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날 그는 얼른 왕중양에게로 되돌아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없어진 모용준을 찾아 헤매다 의군들이 오합지졸로 흩어져 금나라에 당하게 되자 그걸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자우가 왕중양을 싸들고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왕중양은 그저 넉넉한 미소로 홍칠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는 자신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린 자의 정체를 알아낸 것으로 만족한다는 태도였다.
"과연 무림의 맹주답군요."
홍칠의 칭송에 왕중양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부터는 무림의 맹주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소. 제 한 몸만 살면 되는 거지 날마다 바쁘게 뛰어다녀서 뭘 하겠소?"
홍칠과 단지흥은 얼빠진 모습으로 왕중양을 주시했다.
"의군이 패하기는 했어도 의군이 사라진 것은 아니오. 우리들이 형제들을 다시 모아 일어서면 될 것이오."
홍칠이 의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왕 대협이 맹주 자리에 있었기에 기세가 그만했던 것이오. 이번에도 대협이 나서시오. 그러면 우리 개방의 형제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대협을 받들테니."
"그건 안 되오. 이번엔 개방에서 하는 게 옳소. 개방은 천하에서 세력이 가장 크니 그대나 아니면 개방의 방주가 하는 것이 적당하오."
왕중양이 단호하게 거절을 하자 홍칠이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되면 대협께서 나를 해치는 것이오. 나란 놈이 얼마나 어리석다는 걸 모르오? 또한 개방에는 강호객 전체를 이끌 만한 인물이 없소. 더욱이 방주인 소씨 거렁뱅이는 아다시피 성격이나 성품으로 보아 적당하지 않소."
그러나 왕중양은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자기가 못하는 일을 왜 남에게 떠맡기려 하는 것이오? 벼랑에서 떨어진 후로 난 이미 두 세상을 살아 본 사람이 되었소. 허나 다시는 무림의 맹주 노릇은 하지 않겠소!"
홍칠이 다시 왕중양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단지흥이 눈빛으로 그만두라는 뜻을 보내 왔다.
한 해가 지나고 여름이 들어설 무렵에 사람들은 왕중양이 종남산에 전진교라는 새로운 교파를 세웠다는 말을 종종 입에 올렸다. 이는 떠도는 풍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전진교에서는 6월 초여샛날 종남산에서 전진교 창립대회를 가지기로 했다. 이 대회 기간에 강호의 영웅호걸들이 다 모일 거라는 말이 나돌자 종남산으로 통하는 길목마다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편 그 길목마다에 서 밤낮으로 출몰하던 녹림의 화적떼들도 얌전해졌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으나 왕중양이 벌이는 일이라니 화적떼들마저 숨죽인 모양이었다. 호걸들뿐만 아니라 화적떼들도 왕중양의 인품을 높이 받들고 있는 터였다.
유월 초여샛날이 훤히 밝았다. 사람들은 이른 새벽부터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종남산으로 몰려들었다. 산속에는 중양궁(重陽富)이라는 새 궁궐을 지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전부터 있었던 낡은 절을 단장한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사람의 손이 많이 가고 보니 새롭게 지은 궁궐 못지 않은 기품과 웅장함이 엿보였다. 궁 앞에는 구리로 만든 거대한 종이 걸려 있기도 했는데 도사들의 아침공부를 알릴 때 주로 썼다. 또한 구리종 옆에는 역시 큰 북이 있어 종과 쌍을 이루었
다.
종소리가 크게 세 번 울리자 중양궁에서 사람들의 행렬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도복(道服)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중 붉은 도포를 입고 있는 사람이 왕중양이었다. 그는 오직 땅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바닥에 자신이 풀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이라도 널려 있는지 그는 줄곧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그의 뒤로 전진교의 일곱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일곱 제자들이 바로 후에 강호에서 이름을 크게 떨친 전진칠자였다.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자면, 으뜸으로 치는
제자 단양자(丹陽子) 마옥, 둘째인 장진자(長眞子) ,담처단(譚處端), 그리고 셋째인 장생자(長垈子) 유처현(劉處玄)과 넷째인 장춘자(長春子) 구처기(丘處機)였다. 또한 키가 작고 뚱뚱한 옥양자(玉賂子) 왕처일(王處-)과 광녕자(廣寧子) 학대통(諦大通) 그리고 마옥의 아내인 청정산인(淸淨散人) 손불이였다.
이들의 기풍을 본 사람들은 모두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내가 불만스러운지 다분히 얕잡아 보는 투로 투덜댔다.
"마옥, 자넨 원래 직검 마옥이 아니던가? 또 저 뒤꽁무니에 졸졸 따라오는 건 자네 마누라 손불이가 맞지? 자네 부부가 한 교파에 들었으니 전진교라기보다는 부부처처교(夫夫妻妻敎)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나? 그래 가지고도 도사요 도고(道姑)라 할 수 있는가?"
이 말이 끝나자 또 다른 사내가 비아냥댔다.
"여보게 마옥, 자네는 전진교에 들어갔으니 다음부터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리고 자네 마누라는 여전히 마누라가 맞는가?"
그러나 마옥은 좀체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정중히 읍을 했다.
"나는 원래의 직검 마옥이 아니라네. 지금 나는 전진교파의 첫째 제자인 단양자 마옥일 뿐이지. 손볼이도 오늘은 나의 마누라이기 전에 우리 사부님의 문하에 함께 있는 제자라네."
말에 강한 힘을 주어 대답을 하는 마옥의 태도에 사내들이 물먹은 벙어리가 돼 버렸다.
그런데 이번엔 사내 중 하나가 난데없이 왕중양을 불렀다.
"왕중양, 듣자하니 그대는 금나라 놈들을 반대하는 의기를 들고 용감히 싸우던 호걸이라고 하더군. 그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전진교 교주가 돼 버린 연유가 무엇이오?"
마옥이 왕중양 대신 읍을 하며 설명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무림을 빛내기 위해 더는 대사에 참견하지 않을 것이네. 오로지 이 산중에서 무공을 연마하며 도가의 도를 연구하는 것으로 낙을 삼으실 걸세."
곳곳에서 사람들의 코웃음이 픽픽 터져 나왔다. 이들은 왕중양을 비롯한 이들이 무슨 해괴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말이 청산유수로 술술 쏟아지자 더욱 사기성이 농후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품었다. 무림에 숱한 괴변이 일어났고 금이 송의 강산을 반을 넘게 갉아먹고 있는 때라 사람들의 이 같은 추측도 무리는 아니었다. 단순히 교를 연구하고 무공을 익히는 것만은 아닐 거라며 서로 수군거렸다.
괴상한 웃음소리가 사람들 속에서 들려 온 것은 이때였다. 누군가에게 숨통을 잡힌 것처럼 그 웃음 소리는 컥컥대다가는 다시 한 줄기로 길게 뽑아졌다. 왕중양의 인상이 험악하게 돌변했다.
"또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요!"
그는 자신에게 눈길을 돌린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몸을 빙그르 돌리며 예를 올렸다. 사람들도 적이 놀라는 눈치였다. 죽었다고 믿은 왕중양이 살아서 전진교의 교주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내는 왕중양처럼 죽었든지 아니면 종적을 감춘 것이라 알려졌던 모용준이었다. 살아 있는 왕중양에게서 한 번 놀란 사람들은 지금 다시 똑같은 놀라움에 중심을 잃을 지경이었다.
"모용준이 놈!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느냐?"
왕중양이 거침없이 꾸짖자 모용준이 조막손을 휙 내저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무턱대고 성질을 부리면 곤란하오. 내가 뭘 하러 왔느냐고? 여기 올 때 난 거듭 생각을 했었소. 과연 가야 하는가 아닌가를……. 많은 고심 끝에 결국 이렇게 온 것이오!"
"네 놈이 어떤 결정을 내렸든 난 상관하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모용준의 목을 두 동강 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왕중양,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소. 나와 그대가 손을 잡고 오랑캐들과 싸운 일을 말이오. 후에 우리가 패한 건 하늘의 뜻이었소. 사람의 힘으로는 어려웠다고 보면 될 것이오. 그런데 당신은 왜 의군이 패한 책임을 남에게 씌우려고 하시오?"
"모용준이 놈! 그 주둥이를 다물지 못할까? 네 놈은 무림의 수많은 형제들을 팔아먹고 우리 의군 수만 명의 목숨도 내버리지를 않았느냐?"
모용준이 깔깔대며 소인 특유의 가냘프고 여린 웃음을 토했다.
"그대는 아직도 자신이 대단한 인물로 알고 있는가 보군. 그대가 무슨 권리와 자격으로 나를 질책한다는 말이오? 그대가 의군의 두령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오만 금나라 놈들을 벌벌 떨게 한 것은 누구였소? 바로 나 모용준이란 말이외다."
모용준이 이처럼 기고만장했지만 한때 술렁이던 강호객들은 입을 굳게 다물 뿐이었다. 사실 수많은 강호객들 중에서 왕중양과 모용준처럼 의군에 참여했던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용준이 떠벌리는 말에 어떠한 사족도 달 수 없는 입장이었다.
"모용준, 어서 물러가지 못할까! 네 놈과 나는 이미 남남이 된 지 오래이다!"
왕중양의 호령에도 모용준은 외눈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대는 내 형님이었지 않소? 난 크대와 함께 죽으려고 하오. 함께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한날 한시에 죽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소?"
"가증스러운 놈! 귀찮게 굴지 말고 네 갈 길이나 찾아가거라!"
"왕중양, 그대는 교주가 되시오. 난 강호의 악인이 될테니. 난 그대의 전진교를 두려워하지 않소!"
모용준이 낮고 짧게 휘파람을 불자 그의 뒤로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일기충천 지청의 부하 홍분전두(紅粉纏頭)와 날마다 발이 차다고 입버릇처럼 떠드는 계수수(計水水), 그리고 모용준처럼 키가 매우 작은 사내, 사자우였다.
홍칠과 단지흥이 격분한 눈길로 그를 지켜 보았다. 모용준이 왕중양에게 다시 입을 놀려댔다.
"그대와 난 형제 간이오. 그대가 나를 모른다고 해도 셋째야 알겠지?"
'또 네 놈이 임조영에게 무슨 마수를 뻗으려고 하는 것이냐?'
왕중양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또다시 임조영에게 입방아를 찧었다가는 용서하지 않겠다!"
먹혀들지 않을 거라 여기 면서도 왕중양은 속에서 치받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내뱉었다. 모용준은 그런 왕중양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 이죽거렸다.
"난 임조영을 내 황궁의 동궁마마로 맞이할 생각이오. 동궁이 비어 있는 탓에 늘 유감스러웠는데 잘된 일 아니오?"
왕중양은 모용준 같은 철면피의 악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왕중양과 모용준이 주고받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듣고 있던 홍칠이 끼여들며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사자우, 내가 알기로는 너에게 뱀 두 마리가 있더구나. 내가 왕지네 두 마리를 줄 테니 그 뱀과 바꾸지 않겠는가?"
홍칠이 왕지네 두 마리를 들어 보였다. 이를 본 사자우는 은근히 구미가 당겼다.
'저 왕지네는 예사로운 지네는 아닌 것 같군. 허나 이 사자우는 남과 물건을 갖고 흥정하지는 않는다!'
"그럼 그 지네를 여기로 던져라!"
사자우가 쉽게 넘어오지 않자 홍칠이 선선히 지네를 그의 앞으로 던졌다. 사자우는 나름대로 독물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신만만한 인물이라 곧 지네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참 훌륭한 지네로군! 소금에 절여진 육포냄새 같기도 하고 오줌냄새 같기도 하고……. 적어도 일곱 가지의 냄새가 한데 얽혀 있는 것 같구나."
그는 지네를 집어 자기 봇짐 속에 넣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자우가 갑자기 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사자우, 이 거렁뱅이의 꼬임에 결국 넘어갔구나! 네 놈만이 독물을 길들이는 것은 아니다!"
홍칠이 그의 찌그러진 면상을 들여다보며 놀려댔다.
"네 이 놈! 불쌍히 여겨 살려 두었더니 끝까지 골칫거리로 나서는구나!"
"잔소리 말고 어서 난쟁이 독종과 거렁뱅이 중 누가 센지 겨뤄 보자꾸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맨손이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들은 계곡을 넘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경공을 써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모용준의 뒤에는 또 한 사내가 버티고 있었는데 얼굴이 삿갓에 가려져 있었다.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를 대뜸 알아 본 사람은 왕중양이었다. 삿갓을 쓰고 나타난 사내는 무심이었다. 무심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두 사람이 뒤따랐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무심의 뒤로 귀낭자와 창바의 모습이 드러났다. 뒤에 서 있는 창바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산맥을 뒤흔들었다.
"왕중양 이 놈아! 우리 사부님께서 허락을 하셨다. 네 놈과 함께 술을 한 번만 마시라고 말이다!"
덩치에 걸맞게 상황 판단에 어두운 창바였다. 느닷없이 술타령을 늘어놓는 그를 외면한 왕중양은 무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종남산에 나타난 무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하는 눈빛이었다.
"축하합니다!"
무심이 불쑥 이렇게 말을 꺼내더니 왕중양의 눈치를 살폈다. 왕중양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너스레를 떨어댔다.
"왕중양님께서는 금나라와 맞서 싸웠지만 금나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지를 않는다더군요. 또 들리는 말로는 금나라의 납한(納罕) 태자가 그대의 전진교를 모두 금나라의 관할 밑에 두고자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어이가 없는 왕중양이 쓴웃음을 흘렸다.
"달갑지 않은 소리군."
"그 말을 거역했다가는 후일을 기약할 수 없을 텐데요? 오늘은 이처럼 거대한 창립을 이루었지만 내일은 강호에 전진교는 사라질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 얼마나 비참한 노릇이겠소? 하하하!"
'이들의 행동거지를 보니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로구나. 모용준과 사자우를 앞세워 온 것만을 봐도 알겠다. 이젠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마음을 다진 왕중양이 무심을 쏘아보았다.
"좋네, 오늘 내가 지면 난 약속한 대로 고분 속에 들어가 활사인 노릇을 하겠네. 허나 무심 공자가 진다면 어찌하겠는가?"
코웃음조차 치기 아까운 듯 무심이 빈정댔다.
"그대와 분부를 따르겠소."
"그럼 다시는 종남산 근처에는 걸음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나."
무심이 손뼉을 딱 쳤다.
"좋아! 장부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으니……."
드디어 이들은 두 무리로 갈라졌다. 왕중양과 여러 호걸들의 마음가짐은 색달랐다. 금나라의 원한이 남아 있는 터라 오늘 무심을 기필코 꺾어야만 했다. 금나라의 뜻을 받들고 전진교를 해산시키려고 온 무심을 향해 살기의 눈빛들이 쏟아졌다.
이들은 5전 1승으로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무심 쪽에서 먼저 나선 자는 유명한 건달꾼이었다. 그는 우쭐거리며 왕중양에게 욕설부터 던졌다.
"이 놈아, 네 놈이 무엇을 믿고 무심 공자님을 넘보는 게냐?"
이자로 말할 것 같으면 강남 땅에서 악명이 자자한 건달꾼 진옥(素玉)이었다. 악독한 짓거리를 골라 하는 이자에게 호감을 갖고 손을 뻗친 것은 무심이었다. 무심은 이자를 자기 문하에 넣어 오늘을 기다렸던 것이다.
"네 놈이 대관절 무슨 재간이 있기에 그리도 날뛰는 게냐?"
왕중양 쪽에서도 한 사내가 나섰는데 바로 구처기였다. 그는 전진교 제자들 중 무공이 제일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성미마저 불 같아 진옥이 왕중양을 헐뜯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구처기는 곧장 검을 꼬나든 채 진옥을 향해 흙먼지를 일으키며 쫓아갔다. 진옥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구처기의 검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그의 검은 구혼색(句魂索)이라는 무서운 병장기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이 구혼색이라는 검은 곧게 펴지기도 하고 때론 갈고리처럼 끝이 휘어지기도 했다. 이 검에 걸리기만 하면 상대의 병장기는 힘없이 손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진옥은 이 같은 구혼색의 위력을 주시하면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공공탈봉(共工奪蜂)'이라는 초수로 맞섰다. 진옥의 초수도 만만치가 않아 구처기는 쉽게 그의 장검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구처기가 아니었다. 그는 옆걸음질을 치며 기회를 노렸다. 진옥이 막장검을 들고 한 발 앞으로 전진하려고 할 때였다. 구처기가 진옥의 가슴을 검으로 연거푸 내질렀다. 흡 하고 놀란 진옥이 꽁무니를 사리고 달아났다.
갑자기 왕중양이 구처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왕중양을 돌아보던 구처기가 순간 몸을 웅크렸다. 도망을 치는 듯싶던 진옥의 몸에서 일순 몇십 개의 암기(暗器)들이 쏟아졌다. 이 암기들은 일제히 구처기에게로 뿌려졌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구처기는 천천히 선회하면서 암기들이 지나가 주기를 기다렸다. 다시 땅으로 내려온 구처기가 검을 움켜쥐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진옥이 웃어댔다.
"하하하, 구처기 이 놈아! 넌 내 암기에 맞았다!"
"허튼수작 말아라!"
모두들 진옥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왕중양과 홍칠만이 구처기를 근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구처기의 등짝에 호접표(蝴蝶票) 한 매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 귀낭자가 실록실록 가는 허리를 뽐내며 왕중양에게 말을 건넸다.
"왕중양을 저승길까지 바래다줄 사람이 없나요? 그럼 제가 나서지요."
순간 왕중양은 마옥을 건너다보았다. 아무리 견주어 보아도 그가 귀낭자를 당해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응수를 하지 못하면 전진교의 위풍은 땅에 떨어질 게 분명했다. 마옥도 어두워지는 왕중양의 낯빛을 슬쩍 확인하고는 자신 있게 말했다.
"사부님, 마음을 놓으십시오."
그는 느린 걸음으로 귀낭자 앞으로 걸어갔다. 이를 본 귀낭자의 입에서 냉소가 흘렀다.
"마 서방님, 듣자하니 마 서방님의 아내가 참으로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만일 마 서방님께서 침대 위에서 계집을 다루는 솜씨가 괜찮다면야 왜 도사 노릇을 자청했겠어요? 제가 손불이와 함께 서방님을 모실랍니다. 사내하고 어떻게 살을 섞어야 하는지 내가 손불이에게 단단히 교육시켜 드리지요. 왕중양 같은 얼간이를 사부로 모시지 말고 두 부부가 나를 사부로 받들기만 하면 부귀영화는 보장될 것인데……"
귀낭자가 나불거리는 수작을 듣고 있던 마옥이 읍을 했다.
"그럼 가르침을 달갑게 받겠소이다!"
자기의 계산과는 다르게 나오는 마옥을 보자 귀낭자는 내심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바탕 약을 올려 흔들리는 마옥을 칠려고 했었는데 예상과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귀서생(五鬼書生)의 아내였다. 그래서 그녀가 쓰는 병기에도 '귀동귀서(鬼東鬼西)'라는 괴상한 이름이 따라다녔다.
야릇한 미소를 보인 귀낭자가 다시금 마옥을 향해 입에 담기에 낯뜨거운 음담패설까지 퍼부으며 모욕감을 주려 했다. 그러나 마옥은 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마옥의 이마 위로 차가운 물체가 닿았다. 불현 하늘에서 가느다란 보슬비가 잔잔히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단비와도 같았고 목을 적실 수 있는 샘물처럼 달콤하기도 했다. 보슬비는 마옥의 눈에 더 없이 현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귀낭자의 그 유명한 귀동귀서의 효력이었다. 문득 눈앞에 서 있는 그녀가 꽃처럼 탐스럽고 어여쁘게 보인 것도 이 순간부터였다. 마옥은 눈앞에 씌워진 헛겁을 떨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귀낭자의 귀동귀서를 본 사람은 그리 많
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무릇 보고 난 사람은 거의 죽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옥은 순간 번쩍이는 섬광을 보았다. 그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며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마옥이 귀낭자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는 회오리바람이 이는 곳에서 붉은 점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깨부수겠다고 돌진한 것이다. 마옥의 눈에는 그 붉은 점이 귀낭자로 보였다.
사람들은 마옥이 왜 갑자기 해괴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귀낭자가 있는 쪽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마옥이 빨려 들어가고 있으니 모두들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 붉은 점의 정체는 귀동귀서가 만들어 낸 핏빛의 안개에 불과했다.
불길한 조짐을 감지해 낸 왕중양이 손을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실성한 사람의 울음 소리가 들리며 한 사내가 끼여들었다. 그는 귀낭자가 쳐놓은 마수의 그물에서 마옥을 위기일발로 끌어냈다. 마옥은 이미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도 풀려 있는 뒤였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의 운명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옥은 홍칠의 무릎 위에 축 늘어진 채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를 구해 준 사람은 바로 홍칠이었다. 사자우와 싸우던 홍칠이 이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수상한 기미를 눈치채고는 달려든 것이다.
"왕중양, 이번에는 자네가 졌네!"
무심이 자만심에 빠진 말을 툭 왕중양 앞에게 던졌다.
"그럼 다음 판을 보기로 하세!"
왕중양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남편을 죽이려고 한 무리들에 대한 보복으로 손불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탄력이 배어 있어 보기에도 시원했다.
"그따위 귀신 놀음으로 우쭐대지 마라!"
귀낭자를 향해 한껏 비웃자 그녀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고, 난 또 누구신가 했지. 마 서방님의 부인이시구만요. 방금 알아보니 그집 서방님은 나와 한 침대에 올라 재미를 보는 걸 그닥 좋아하시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내 미련 없이 돌려보내 드렸지요. 서방님이 도사 노릇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가만 내버려두는 수밖에. 하지만 그대는 부득불 남편이 하는 대로 할 필요야 없잖아요? 전진교라? 계집과 사내가 한 봉당에서 뒹구는 게 무슨 전진교야. 전진교라기보다는 음굴구동(淫齋拘洞)이라고 하는 게 낫잖아요?"
귀낭자의 모욕적인 언동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학대통이 뛰쳐나왔다. 그런데 학대통을 가로막는 사내가 있었다. 일기충천 지청이었다. 그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명성과는 달리 병장기만 휘두르며 학대통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병장기는 무정자(無情剌)라는 것이었는데 창으로도 변할 수 있고 칼과 몽둥이로도 쓸 수 있는 거였다. 학대통은 일곱 제자들 중에서 무예가 결코 뒤지지 않는 편이었다. 마옥과 구처기 그리고 왕처일 다음으로 알아
준다는 실력파였다. 그는 검을 들고 지청과 맞섰다.
"야압!"
검과 무정자가 굉음을 내며 공중에서 힘을 겨루었다. 그런데 무정자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옆으로 새로운 가지 하나를 세웠다. 그 가지가 곧추 학대통을 향해 날카로운 각을 꺾었다. 학대통이 뒤늦게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살을 파고들었다. 뼈를 들쑤시는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허리를 숙인 학대통이 반대로 몸을 돌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욱!"
그 주먹이 보기 좋게 지청의 면상에 떨어졌다. 치명적이지는 못했지만 지청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고 말았다. 홍칠이 소리쳤다.
"이번은 비겼소이다!"
두 사내는 투덜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왕중양 쪽에서 다음 차례로 나온 것은 왕처일이었다. 두 다리를 어깨보다 넓게 벌린 채 버티고 선 그는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왕처일의 상대로 나선 것은 모용준이었다. 모용준이 거만하게 씨부렁댔다.
"난 원래 큰형님과 겨뤄 보려고 했었네, 하지만 난 큰형님의 상대가 안되지. 그래서 만만한 왕처일과 대결하려는 게요."
왕처일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 사부님께서 네 놈을 박하게 대해 준 적이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배은망덕하게 구는 거냐? 악독한 짓거리만 골라 해놓고도 천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이냐?"
왕처일이 근엄하게 꾸짖자 모용준이 낄낄 웃어댔다.
"헛헛헛, 네 놈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이냐? 모두 사부를 닮아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자기 사부를 욕하는 언동을 참아낼 위인은 없으리라. 피를 토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왕처일이 검으로 모용준을 찔렀다. 재주넘기로 훌쩍 물러선 모용준이 계속 떠벌렸다.
"네가 왕중양의 제자라? 그럼 난 너의 사숙이 되는 셈이로군. 네 사부가 아직 일러주지 않은 모양인데 그럼 내가 버릇을 고쳐 놓아야겠구나!"
말을 마친 모용준이 손을 높이 들었다. 그의 소맷자락 속에는 단검이 감춰져 있었는데 그것을 쓸 생각이었다. 소맷자락 속에서 단검을 뽑아 낸 그가 왕처일을 향해 그어댔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왕처일이 급히 몸을 사렸다.
"사숙님이 가르치는 걸 무서워 말라구."
모용준이 다시 지껄이며 단검을 이쪽저쪽 소맷자락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잔재주를 부렸다.
'따지고 보면 오늘을 기약하기 위해 저 모용준이 나와 의형제를 맺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내가 저 자와 의형제를 맺은 이유는 모두 임조영과 가까워지려는 마음에서였는데…….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 놈에게 우롱당하게 된 꼴이니 한심하구나! '
왕중양은 속으로 뒤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모용준은 더욱 사나운 기세로 왕처일을 몰아붙였다. 그가 소맷자락을 휘젓기만 하면 단검이 화살처럼 솟아 나와 왕처일의 눈앞에서 독사처럼 변했다.
"그 재간으로 어찌 전진교의 제자라고 하겠느냐?"
한껏 비웃던 모용준이 회심의 일격을 왕처일의 가슴에 꽂았다. 왕처일은 모용준의 장을 얻어맞고는 뒤로 멀리 밀려 나갔다. 왕처일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다.
모용준이 왕중양을 보고 읍을 하며 이죽거렸다.
"큰형님, 제자들을 엉터리로 가르쳤군요. 저 놈들에게는 뛰는 놈 위에 반드시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할 겁니다."
왕중양을 향해 던지는 도전적인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구처기와 유처현이 대노하여 모용준 앞으로 나왔다.
"자네들이 졌어! 지고도 인정을 하지 않는다면 전진교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이렇게 그들의 나섬을 한마디로 제지한 것은 무심이었다.
드디어 왕중양이 일어섰다.
"좋다. 내가 자네와 한판 겨루어 보겠네. 우리 전진교가 종남산에서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어디 시험해 보겠네."
무심은 왕중양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전진교가 살아 남을 거라 믿는가? 중원의 무림이 우리 금나라에 투항하지 않으면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자네가 우리 전진교를 없앤다고 쉽게 그렇게 될 줄 아나?"
무심이 무림 호걸들을 둘러보며 거들먹거렸다.
"자네들이 무림에서 좀 행세하고 살려면 금에 투항해야만 해!"
이 소리에 모두 대노하여 들고 일어설 태세였다.
무심이 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왕중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먼저 손을 쓰시지."
일제히 사람들의 눈길이 왕중양에게로 쏠렸다. 왕중양이 천천히 손을 내밀더니 손가락 끝으로 무심을 겨누었다. 그러자 무심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내가 자네와 맞선다는 건 우리 금나라 주인의 신분을 욕되게 하는 거네. 그래도 사자우 선생과 자네가 맞붙는 게 낫지."
사자우가 슬슬 걸어 나왔다. 그가 병장기를 왕중양에게 뻗으며 싸움을 걸어 왔다.
"왕중양, 넌 조만간 내 손에 황천객이 될 것이다. 전번에 내가 널 벼랑에서 떨어뜨렸는데 용케 살아났지만 이번엔 어림없다!"
사자우가 몸을 한차례 꿈틀대자 곧 병장기가 왕중양에게로 길게 뻗쳤다. 막 몸을 쓰려던 왕중양은 먼곳에서 움직이는 한 물체를 발견했다. 임조영이었다. 임조영이 와 주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그녀, 아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 그녀가 와 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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