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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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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침탈의 실상 스크랩 안중근 의사 순국 99주년에 즈음하여...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95 14.08.22 09: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중근 의사 순국 96주년... 하여, 안중근 의사 기념관 사이트를 방문해 보았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살아 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친일반민족주의자들과 독재자, 군사쿠데타 세력들이 총집결해서 제2의 조선총독부 시절을 흉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침통합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국민이 국민노릇하기 힘든 아주 위험한 권력과 직면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역사는 반복 된다고 합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재침을 받는다고 합니다.

 

민족의 역사, 국가의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는한 완벽한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습니다.

바른나라, 바른민족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민족과 , 독립운동 선열분들은 민주주의 핏값을

내놓으라 호통을 치는 듯 합니다.

 

하여, 대한민국은 머지않은 시점에 재정리 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바로 서도록...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새벽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을 3발의 총알로

목숨줄을 끊음으로써 대한한국인으로서 의기를 높였다. 의거 5 개월만에 사형당함.

 

 

大韓民國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尙........ 響........하시옵소서~~~!!!

 

 

 

 

 

다음은 안중근 의사 친필 유묵입니다.

 

국가안위노심초사; ' 국가 안위를 위하여 걱정하고 애태운다.'

 

 

위국헌신군인본분; ' 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의사 친필유묵; '독립'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돗는다.

 

 

 

 

 아래는 지난해 98주년 기사 발췌...



?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 전 어머니가 보낸 한복으로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다. ‘흑룡강 조선민족 출판사’가 펴낸 <안중근과 하얼빈> 수록 사진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땅 여순(뤼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지 꼭 98년 되는 날이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교수형이 집행되고 10시15분 감옥의는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1879년생이니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모친 조마리아는 안 의사에게 사람을 죽였으니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항소를 포기한 그는 형 집행의 날로 3월25일을 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며 종교적 구원의 과정으로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안 의사는 25일 동생들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의 자료는 2월14일 사형선고에서 죽음을 맞는 3월26일까지 안 의사의 마지막 행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동안 안 의사의 최후의 순간, 홍석구 신부의 안 의사 고해성사, 동생들의 면회 등이 소개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번 자료는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고 일부 잘못 알려준 내용도 바로잡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마침 25일부터 여순감옥 뒷산에서는 안 의사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뒤늦게나마 국권이 회복되는 날 유해를 반장해 달라는 그의 유지가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안중근 98주기 ‘최후의 날들’ 재구성

 

? 3월8~10일 안 의사에게 영세를 준 홍석구 신부(안 의사 맞은편 뒷모습)와 안 의사의 두 동생(맨 왼쪽·정근, 공근)이 사형 집행을 앞둔 안 의사를 여순감옥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면회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통감부 통역 소노키 스에키다. 최서면 한국국제연구원 원장 제공

 

사형 선고받다=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30분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불과 일주일 동안 불과 여섯번의 공판 끝에 안 의사에게는 사형이, 공범인 우덕순 징역3년, 조동하·채동순은 각각 1년 3개월의 형이 내려졌다. 안 의사는 사형이 선고된 뒤 일본 당국의 특별 허가를 얻어 프랑스인 서울주교 구스타프 뮤텔에게 보낸 전보에서 신부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사형집행일로 3월25일 희망=2월17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면회해 사형선고 판결 등 재판과정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 한 행동을 살인범으로 몰아 심리한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안 의사는 “이또 히로부미가 살아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해할 뿐이다. 동양의 한 사람인 내가 이런 나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세례를 준 홍석구(프랑스 이름 조셉 빌렘) 신부가 곧 이곳에 오는데 천주교 신도로서 기념스러운 3월 25일(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 처형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 3년 만의 만남=3월7일 여러곡절 끝에 홍 신부가 도착했다. 그는 재판부가 안 의사의 고해성사를 허락한 데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그러나 고해성사가 신부와 신자 사이에만 이뤄지는 비밀행사이며 이 때문에 모든 일이 당국의 입회 아래 이뤄져야 한다는 형무소법과 충돌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최서면 국제연구원 원장은 입회는 하돼 멀리서 고해성사는 듣지 않는 것으로 절충했다고 설명했다). 8일 오후 2시 홍 신부는 두 동생과 함께 법원 당국의 양해 하에 오후 형무소를 찾아 3년만에 안 의사를 다시 만났다. 홍 신부는 죽음을 앞둔 신자로서 해야 할 바를 알려주고 다음날 고해성사를 하기로 하고 돌아갔다. 홍 신부는 위로의 인사를 하고 서서히 자기가 온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내가 이 만주 여순에 오기까지는 많은 비판과 장애가 많았다. 네가 아는 대로 너와 나는 사제관계에 있어서, 또 이번 거사는 내가 시킨 것처럼 어떤 신문에 와전됐기 때문에 적지 않은 의심을 받아 이번에 오는 것도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일반에게 전달되어 비상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홍 신부는 이어 “몇번이고 여기 오는 것을 주저했으나 너와 두 동생의 간절한 부탁으로 나는 여순 법원의 특별 면회허가가 났다는 전보를 받고 여러차례 반복해 고려한 끝에 원래 선교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천명을 받들 나는 국가나 정치에는 전혀 관계가 없고 공명정대한 것만을 생각하여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걸 느끼고 만난을 제치고 여기 오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 면회의 목적은 세가지가 있는데 나는 내 아들인 신앙의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목숨을 잃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다. 둘째 나는 이번 너의 거행이 살인이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셋째 너의 고국의 동포와 교우들은 너의 이 큰 죄로 도저히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어느나라 국법에도 반드시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하며 네가 깨끗히 죽음에 임하는 것이 그 죄를 씻는다는 걸 원하고 있기 때문에 너의 모친과 교우의 위촉을 받아 네가 죽기 전에 일순간이라도 좋은 교우로서 죽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홍 신부는 “3년전 일시 흥분에 쏠려 국가를 위해서 한다고 싸워야 한다고 하고 블라디보스톡에 가려고 할 적에 너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오늘이 올 것을 알고서 가지 말 것을 타일렀다”고 말했다. 또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중략) 감옥장의 후의에 의하여 신부에게 차와 담배를 제공하고 안중근에게도 담배를 주니 홍신부가 대죄인한테 이런 대우를 한다고 고맙다고 하니 형무소 온 이래 법원과 감옥소의 취급은 매우 관대하여 파격적인 걸 미처 생각지도 못한바 특별한 급여를 하고 매일 두번 흡연실에서 차 과자 담배를 제공받았다고 하니, 홍 신부는 새삼스럽게 놀라며 평소 일본의 문명이 들은바 이렇구나 하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교우들도 이 관대함에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하였다”고 돼 있다. 홍신부는 “당국의 허가를 얻었으니 고행성사를 올려 하루속히 죄의 사함을 청하면 하느님은 반드시 네 큰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고 4시20분 안 의사에게 기도를 하고 떠났다.

 

떠났다. 면회 중 홍 신부는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껴안는 것 같은 태도로 안을 대하고 안 의사는 어디까지나 경모하는 기분으로 시종일관 말을 들었다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 고해성사와 미사=3월9일 오후 2시 안 의사는 홍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고해성사는 백지 20장에 걸쳐서 적은 내용을 읽어가며 20분간 진행됐다. 홍 신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았고, 안 의사도 신부의 귀에 입을 대고 고해성사를 했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 신부 외에는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홍 신부는 그렇게 진지하고 생생하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안 의사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밝혔다. 일본관리들이 고해성사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라고 물었으나 홍 신부는 일체의 내용을 밝히길 거부했다.


홍 신부는 “안 의사의 사형집행이 25일이라고 하는데 혹은 27일 이라는 설도 있어 분명치 않으나 25일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이므로 만일 그날 저녁 6시에 형이 집행된다면, 천주교 신자가 죽는 데 있어서 이처럼 좋은 날은 없겠지만 27일은 예수가 부활한 날이어서 모든 신자들이 가장 중요한 날로 부활절에 사형당하는 일은 없으므로 만일 27일 사형이 집행된다면 고의로 나쁜 날을 택한 것이 되어 세계여론을 두려워 하여 이날을 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3월 10일 형무소 교회당에서 홍 신부에 의한 미사집전이 있었다. 미사에 참여한 신자는 안 의사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은 교회당 안에는 지켜보는 사람들로 가득찼으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참가자들도 미사집행의 엄숙함에 감동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생들의 뜻밖의 면회=3월 25일로 예정됐던 사형집행일은 순종의 생신인 건원절이었다.

 

국제적으로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국왕탄신일에 사형집행하는 일이 없고 한국에선 의병투쟁이 심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는 대한황제의 생일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국제 국내적으로 곤란한 일이 야기되므로 피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따라 사형집행은 25일에서 26일로 연기된다. 이를 모른 안중근은 25일 간수가 문을 여니 사형집행인줄 알고 나왔는데 뜻밖에도 동생 둘이 면회를 와 있었다. 25일 오후 12시 40분 감옥에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나카무라 간수장 소노키 스에키 통역 입회아래 미즈노, 가마타 두 변호사와 안중근의 두동생 정근 공근의 마지막 면회였다. 소노키 통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일본외무성과 통감부에 보냈다.

 

안중근은 우선 정근 공근 두동생에 대해서 고향에서 오는 부탁한 한복이 왔느냐고 묻자 두 동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고 만일 때를 맞추지 못하면 이곳에서 양복을 조달해 드릴테니 걱정마시라고 하였다. 근데 안중근은 미즈노 변호사가 있는 것에 놀라고 어찌된 일이냐고 했더니 미즈노 변호사가 홍 신부가 지난번 여순에 왔을때 병이 나서 오려던 것이 못왔기 때문에 오늘 두동생이 최후에 면회를 한다는 걸 알고 변호사였던 인연으로 만사를 제쳐놓고 위문차 왔다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게도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주니 감사하다고 말하고 두 동생에게는 오늘이 최후의 면회라고 하니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으므로 그런 생각에서 말을 할테니 빠짐 없이 잘 들어달라고 하였다. 그는 우선 노모의 안부에 대하여 두 동생에게 부탁하며 평소에 아들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효도를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번 사건으로 매우 심려를 끼친 불효의 죄를 용서해주도록 말씀 여쭈어 달라고 부탁하고, 또 다시 이미 애기한 한대로 장남 분도를 장래에 신부로 되도록 길러달라고 하였다. 실은 차남이 중병이 걸렸을 적에 뜻밖에도 하느님의 가호로 회생한 것을 생각하여 차남을 신부로 되게 하려고 생각했었으나 몸이 약해 이에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장남을 신부로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또한 정근에겐 너는 장래 공업에 종사하라 한국은 공업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돈 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었지만, 실업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말은 꼭 공업에만 종사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무 심는) 식림 같은 일은 한국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이므로 혹은 식림에 종사하여도 좋다. 결론적으로 국익을 증진시키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곧 우리 집안의 도움이 되는 것이다. 공근에게는 학문에 종사하여 노모와 노모가 살아계시는 고향에서 잘 모시기 바란다. 두 동생은 땅이 넓으니 불편하면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살테니 어머님은 별로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더라.


안중근은 두 동생에 대해서 먼저 말한대로 하얼빈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 왔느냐 물으니 두 동생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귀국하면 시베리아로 이주할 작정이므로 그때 이것을 찾겠다고 대답하였다.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만일 시베리아로 가면 먼저 말한 대로 장봉금으로부터 5천원을 받을 것이 있는데 그 돈은 동의해의 돈이므로 갚으라고 당부하고 다음은 이치권의 아직 갚지 못한 숙박료가 있다고 하고 그 집에 내 가방과 의류와 기타 단지동맹때 자른 손가락을 돌려받아라, 또 두 동생에 대하여 금번 의거에 대하여 각국 신문지상의 논평이 어떻냐고 물으니 두 동생은 한국에서는 의거를 게재하는 일이 용서되지 않고 있으며 일반 국민들은 좋다고도 하고 나쁘다고도 하여 할 수 없다고 했다.

 

안중근은 “실로 불가사의 한 일이 있다. 내가 연초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미국의 신문지상에 풍자화가 실려 있었는데 내가 의거하려는 것과 일치되는 것이 있어서 당시 감동받은 바가 있다. 한 한국 미인이 서 있는 옆에 일본 사관이 많이 줄 서 있었는데 미인의 소지품을 약탈하려고 하는 한 일본 사관이 사법권과 외교권이라는 물품을 가져가자 그 뒤에 많은 조선인이 총을 들고 그 사관을 쏘려고 하는 걸 그린 것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무엇인가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느끼고 크게 웃었다”고 말했다.


입회한 감옥장(전옥)이 면회시간에 제한이 있으니 유언할 게 있으면 그걸 먼저 말하고 여담을 말하라고 당부했으나 귀관들은 목숨이 길고 나는 목숨이 단석에 이르니 이 면회를 좀더 연장해주길 바란다고 하고 두 동생에게 다시 “나는 내 의무를 다하였다. 미리 각오하고 한 일이므로 내가 죽은 뒤의 일에 관해서는 하등 남길 말이 없다. 단 이때까지의 면회에서 이미 말한대로 더 말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노모에 대해서는 “자기에 대신해서 효도를 다해줄것을 당부한다. 집안이 화평하게 지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숙부 홍신부 민 주교 안명근, 형수에게는 편지를 써놨으니 이것을 전달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시에 동생들은 할말이 없냐고 물으니 “아무 것도 드릴 말씀이 없고 형이 분부하신 사회 일에 관해서는 동생들이 서로 협력하여 잘 되도록 노력할 것이니 걱정말고 형의 길을 따르시길 바라며 천당에 오르시도록 희망한다”고 하였다. 안중근은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미즈노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동정(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 당신의 뜻이 길이 세상에 전해지길 바라며 나도 될 수 있는대로 그 뜻을 전하려고 노력하겠다. 그러니 깨끗히 형에 따르고 빨리 천국에 가시기를 바란다. 천국에서는 언어에 지장이 없을테니 나도 뒤에 천국에 가면 당신과 손을 잡고 정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안중근은 “귀하의 동정과 이해에 매우 감사할 따름이다. 귀하가 이처럼 동정하고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것은 외국에 가는 것과 같아서 일정한 법이 있다. 모름지기 천주교 교도가 되어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떠냐. 그렇다면 천국에서 같이 손을 잡고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다”고 기독교 신앙을 권유했다. 가마다 변호사도 “나도 귀하에 대한 동정과 이해는 미즈노변호사와 같으니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없도록 노력할 것이니 이해해달라”고 말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나도 “당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미즈노 변호사에 대해 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세상사로 얘기가 옮겨지자 안중근은 내가 언제까지 끝없이 얘기할 것이 아니니 두 동생보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간수에 대하여 이제 더 할말이 없다고 하니, 감옥장은 마지막 악수와 기도를 허락한다고 하여 안중근과 두 동생은 기뻐하여 손을 잡고 악수한 뒤 무릅꿇고 기도하고 돌아갔다. 오후 3시 30분의 일이다. 이날 안중근의 태도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나 역시 마지막 면회는 서로의 작별의 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 형장의 마지막 순간=소노키 세이키 통역은 안중근의 사형집행을 다음과 기록하고 외무성과 통감부에 보고하였다.


살인 피고인 안중근에 대한 사형은 3월26일 오전 10시 감옥소 안의 사형장에서 집행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오전 10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과 소관 등이 사형장 검시실에 앉고 안중근을 불러들여 사형집행의 뜻을 전하고 유언의 유무를 물은 데 대해 안중근은 별로 유언할 것이 없으나 자기의 이번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와 평화를 도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라건데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 각의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에 동양평화의 삼창을 하도록 허가해줄 것을 제의했는데 전옥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을 설명하고 간수로 하여금 명령하여 백지와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특별히 기도를 드릴 것을 허가하니 안중근은 2분여 묵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간수가 데리고 계단으로 교수대에 올라 태연하게 형의 집행을 받았다. 때는 10시를 조금 넘은 4분이며 15분에 이르러 감옥의가 시체를 검사하고 절명하였다는 보고를 하기에 이르러 이에 집행을 끝내고 일동 퇴장하였다.


10시20분 안의 시체는 특별히 감옥에서 새로 만든 침관에 담아 흰 천을 덮고 교회당으로 옮긴 뒤 공범자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의 세 명을 끌어내 특별히 예배를 하게끔 하였다. 오후 1시 감옥의 장지에 이것을 매장하였다. 이날 안중근의 복장은 어제밤 늦게 고향에서 온 명주로, 한복 저고리는 흰색 바지는 흑색을 입고 가슴에 십자가를 달았다. 그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종용 자약 떳떳하게 그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형무소에 쓴 유고 전기는 완전히 끝냈으나 동양평화론은 총론과 각론의 일부에 끝나고 전부의 탈고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렇게 보고 합니다.

 

강태호 남북관계전문기자

 

 

 

 

다음은 경향신문기사

 

‘조선의 대장부’ 동양평화의 큰 뜻을 품다

[경향신문 2004-03-25 19:59]



-[순국94주기]안중근 의사를 다시본다 1. 대륙을 깨운 총소리(上)
안중근(安重根·당시 31세)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당시 추밀원 원장·68세)를 저격했다. 10월22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사를 위해 하얼빈을 찾은 안의사가 하얼빈에 머무른 것은 10박11일. 그는 11월1일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송된 이후 1910년 3월26일,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러나 그를 기리는 겨레의 뜨거운 마음은 의거 95년, 순국 94년이 되는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안의사가 하얼빈에 남겨놓은, 짧지만 영원한 발자취를 다시 한번 찾아갔다.


▲1909년 10월22일(하얼빈 도착)


하얼빈역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59년 재건했고, 80년대 증축해 예전 모습은 전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안의사가 의거를 기다렸던 역 구내 귀빈실 자리는 그대로다.


안중근 의사가 처음 하얼빈역을 찾은 것은 오후 9시15분. 안의사는 우덕순(禹德淳·33)과 함께 그동안 활동하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에 온 것이다. 열차가 쑤이펀허(綬芬河)에 1시간 남짓 정차할 동안 그곳에서 독립 활동을 지원해주던 한의사 유경(劉京)의 집을 찾아가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의 아들 유동하(劉東夏·18)를 함께 데리고 왔다. 안의사 일행은 열차에서 내려 마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김성백(金成白·32)의 집을 찾았다. 김성백은 당시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재 하얼빈 한국민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유동하의 누이동생과 김성백의 막내 동생이 약혼한 사이였고 안의사와도 일면식이 있었다.


김성백의 집은 레스나이가 28호다. ‘레스나이’는 러시아어로 ‘삼림’ ‘삼림지대’라는 뜻으로 당시 목재 가공소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삼림가(森林街)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삼림가 28호는 없어지고 대신 하얼빈시 위생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80년대 도심 재개발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김성백의 집은 울타리가 있는 목재로 된 단층집이었다. 안의사는 이 집에서 의거때까지 머물면서 거사 계획을 짰다.


▲1909년 10월23일(거사 준비 시작)


안의사는 아침에 시내 구경을 한다며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삼림가 28호 앞길은 지금도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이다. 집을 나오면 당시 하얼빈 시내 유일한 공원인 하얼빈 공원(지금의 자오린 공원)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안의사는 이들과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사진관에 들러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의거를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다.


하얼빈 공원 서문에서 남북으로 관통된 거리 건너편에는 한국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고려가(高麗街·지금은 서8도가)가 있었다. 당시 하얼빈 인구는 2만명이었고 한국인은 268명이 살고 있었다. 고려가에는 한국인 초등학생 40여명이 다니는 동흥소학(東興小學)이 있었다. 안의사는 오후에 동흥소학을 찾아가 이 학교 교사이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신문 대동공보(大東共報·海潮新聞의 후신)의 하얼빈 지국장을 맡고 있던 김형재(金衡在)를 찾았다.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 조도선(曺道善)이 학교 부근의 김성옥(金成玉) 집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백의 집에서 안의사는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로 시작하는 ‘장부가(丈夫歌)’를 읊으며 거사 의지를 다졌다. 지금은 동흥소학이나 김성옥 집의 흔적은 없다. 모두 빌딩이 들어선 도심 거리로 바뀌었다. 동흥소학의 후신인 도리(道里) 조선족 중점소학은 지금 이웃에 있는 경위 4도가(經緯四道街)로 이전했다. 이영수(李英秀) 교장은 “학생들이 안중근 의사가 직접 찾은 학교라는 점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1909년 10월24일(거사 장소 이동)


아침 일찍 일어난 안의사와 우덕순은 김성백의 집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의 하얼빈 공원에 들어갔다. 이들은 느릅나무가 우거진 공원 안을 산보하면서 거사 계획을 세밀히 검토했다. 안의사가 하얼빈 공원을 찾은 것은 불과 며칠이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 유언을 통해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다 묻어달라”며 “조국이 독립하면 그때 유해를 가져가달라”고 당부했다. (이 같은 유언에도 불구, 그의 유해는 1910년 3월26일, 순국한 날 밤에 일본인 간수들이 뤼순 감옥 근처에 몰래 파묻어 현재도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


안의사와 우덕순은 공원에서 상의한 끝에 하얼빈을 떠나 차이자거우(蔡家溝)로 가기로 했다. 창춘(長春)에서 오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못미쳐 차이자거우 역에 내릴 가능성에 대비해서였다. 또 이토가 탄 특별열차에 대한 동향 탐지 목적도 있었다. 오전 9시 안의사는 유동하를 하얼빈에 남게 하고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차이자거우로 떠났다. 낮 12시쯤 차이자거우에 도착한 뒤 역 승무원을 통해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모레(10월26일) 오전 6시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알아냈다. 안의사 일행은 역 구내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의 주인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1909년 10월25일(다시 하얼빈으로)


안의사 일행은 오전에 다시 한번 거사 계획을 점검했다. 그러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이 문제였다. 안의사는 이토가 열차에서 내린다해도 오전 6시라는 시간이면 날이 어두워 거사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안의사는 하얼빈에서 거사를 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자거우에 남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안의사는 혼자서 낮 12시 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김성백의 집에서 거사 날이 밝기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하얼빈/홍인표 특파원 iphong@kyunghyang.com〉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는 불과 2004년 함세웅신부가 회장으로 추대되어 발족되었군요.

 

마지막으로, 안중근 의사 숭모회나 윤봉길 의사 사업회 등 수많은 기념 사업회는 거의 다가 짝퉁이었네요. 진정한 사업회 주관의 주인은 독립운동가들이 아니었네요. 당연히, 독립운동가 후손, 그리고 그분들을 기리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다시 찾아야 하겠지요.

 

 

 

과거청산 '침묵'하는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



[현장/진단] 태생적 한계 극복하고 '항일 본산지'로서 제 역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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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에 침묵하는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들 / 송민희 기자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등 과거사 청산문제를 둘러싸고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각계에서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여당은 이번 기회에 해묵은 과거사를 청산하자는 주장인 반면 한나라당은 국론분열과 정치적 공세라는 이유로 반대 내지 소극적인 입장을 펴고 있다.

정치권을 비롯해 시민사회단체 등 각계에서도 과거사 청산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친일청산과 민족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할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어 눈총을 사고 있다.

제1야당 원내대표가 회장으로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시민의 숲'에 자리잡고 있는 윤봉길의사 기념관(매헌기념관)은 88년 노태우 정권 시절 전경련의 지원으로 세워진 것으로,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가 관리 운영하고 있다.

윤봉길기념사업회는 현 한나라당 원내대표인 김덕룡 의원이 회장으로 있는 데 대부분 이사들의 회비와 찬조금, 그리고 기념관 입장료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념관 운영이 회장인 김덕룡 의원에 대한 의존도가 큰 편이다.

이러다보니 친일청산법에 대한 기념사업회의 의견도 김덕룡 의원측, 즉 친일청산 문제에 소극적인 한나라당의 의견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윤봉길 의사 조카이자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인 윤주씨는 "친일청산은 분명히 해야하지만 지금의 친일진상규명법은 정치적인 면이 강하다"라고 말했다.

김덕룡 의원실 관계자 역시“기념사업회들이 나서서 어떠한 발언을 하는건 모양새도 좋지 않고, 친일청산이 연좌제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첫손가락에 꼽는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역시 친일청산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할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백범기념사업회는 백범의 차남이자 박정희 정권에서 교통부장관을 지낸 김신씨가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데 과거 김대중 정부에서 백범기념관과 박정희기념관이 함께 추진되었을 때도 별다른 입장을 표명한 바 없다.

특정 기념사업회에 지원 한정

이들 기념사업회들의 태생적인 한계에서 오는 문제뿐만 아니라 기념사업 지원이 특정 기념사업회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지적을 받고 있다.

현재 보훈처의 지원은 윤봉길기념사업회와 안중근의사숭모회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다른 곳은 개별심사가 이루어지도록 돼 있어 그 기준이 부적합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즉 객관적 심사가 가능하도록 제도적인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훈처 기념사업과의 박노진 사무관은 “국민관심사업으로 윤봉길기념사업회와 안중근숭모회측에만 별도의 예산이 편성되어 있고 다른 개별적인 단체와 행사에는 예산지원이 없다”라고 밝혔다.

남산에 위치하고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설립됐으며, 현재 서울시 지원과 보훈처의 특별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념관 옆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 씌여있는 비석과 친일작가 김경승이 만든 안 의사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안중근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는 안중근의사숭모회는 1963년 박정희 정권 시절 구성됐으며, 이은상, 윤치영, 백두진 등 친일행적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된 바 있는 인물들이 요직을 맡아왔다.

숭모회측은 2000년 현 안중근기념사업회에서 이사로 추천한 개혁적인 인사들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수형전력을 들어 전과자들이라고 거론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숭모회의 한 관계자는 친일청산 논의와 관련, "과거에 매달리는 친일청산보다 미래를 위한 사회안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중적이고 주체적인 기념사업 필요


한편 숭모회의 활동과 정체성에 반기를 들고 안중근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가 결성됐다. 기념사업회는 교육활동을 중심으로 안의사 자료집 발간계획, 행적조사, 기록사업 등을 통해 범국민 차원으로 승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곳은 800여명의 회원들이 주체가 돼 회비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윤원일 안중근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위해서 친일청산은 무엇보다도 시급히 이루어져야하며 과거사 청산이나 역사적으로 정리, 평가해야할 부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밝혔다.

항일 독립운동의 화신격인 독립운동가들의 기념사업회가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태생적 한계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즉 이들 기념사업회가 역대 정부로부터 물적 지원을 받고 또 더러 정권에 이용되면서 정체성과 올바른 역사관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인맥에 의해 구성되고 있는 권력가들의 사유화에서 벗어나 독립운동가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이석 선생의 장남 차영조씨는 "독립운동 기념사업회들이 실력자 몇 사람에 의해 운영하는 것은 대상 선열에 대한 모독"이라며 "시민 대다수가 참여하여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운영해 나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차씨는 또 "무엇보다도 학교교육을 통해 애국애족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며 "특정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 보다도 전체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임시정부 기념관같은 기념사업이 필요하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을 기려야하는 기념사업회가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하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간 기념사업회가 몇몇 소수의 명예유지 수단으로 이용돼온 것은 아닌지 다시금 되돌아 볼 때이다.  



* 이 기사는 씨피엔문화재방송국(http://www.icpn.co.kr)에서 제공하는 뉴스입니다. 씨피엔문화재방송국은 문화재 전문 인터넷방송국으로 현장고발, 문화재 뉴스를 제공하며 아라리답사, 우리동네 문화재 1점 지키기, 호기심영상 등의 컨텐츠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2004/08/25 오후 2:51
ⓒ 2004 OhmyNews

 

 「안중근의사숭모회」의 총회소집 거부를 규탄한다.

 

1. 우리는 지난 6월 10일 기자회견을 통해, 안중근 의사 독립운동정신의 올바른 계승을 다짐하며,「안중근의사숭모회」(숭모회) 이사진의 퇴진과 개혁을 촉구한 바 있다. 그 이후 숭모회 이사진들이 사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기에, 7월 1일 숭모회 회원 500여 명의 이름으로 임시총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2. 숭모회 정관(1999.7.21 개정)에 의하면, 총회는 이 회의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임원선출에 관한 사항의 의결권을 갖는다. 숭모회 현 이사들은 정관에 따라 총회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이사들이 아니고 따라서 권한이 없는 이사들이므로, 형식적인 대표자인 이사 황인성을 상대로 하여 숭모회의 임원 및 이사선임의 건 심의를 위한 임시총회 소집을 요구한 것이다.

  3. 숭모회 정관에 따르면, “회원 5분의 1 이상의 소집 요구가 있을 때, 이사장은 그 요구일로부터 14일 이내에 임시총회를 소집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법인등기부상 형식적 대표자인 이사 황인성은 회원들의 총회소집 요구에 대하여, 그 요구일로부터 14일이 지나도록 임시총회 소집공고를 내지 아니하여 총회소집요구를 거부하였다.

  4. 더욱 개탄스러운 사실은 임시총회 소집요구 직후인 7월 3일,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명의로 “귀하가 이번에 신청하신 본 ”사단법인 안중근의사 숭모회“의 회원 가입 건은 승인되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안내문과 함께 회비를 환급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숭모회의 인터넷 홈페이지상 “안의사숭모회 회원으로 모십니다”라는 회원가입 안내문에 따라 회비를 내고 가입한 회원들로, 주로 이번에 임시총회 소집을 요구한 사람들이다.

  5. 숭모회 정관에 따르면, 회원 및 임원의 결격사유로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또는 미성년자(대학생제외) ▶파산자로서 복권되지 아니한 자 ▶금고이상의 형을 받은 자 ▶국가, 지방자치단체 또는 소속 직장에서 징계면직, 파면된 자 ▶민족정기에 반하는 경력이 있는자 또는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자 등을 들었다(9조 회원 및 임원의 결격사유).

  이에 비추어 볼 때, “회원 가입건 미승인” 운운한 황인성 숭모회이사장 명의의 서신은,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독립운동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기 위해 숭모회에 가입한 회원들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6. 우리는 “회원 가입건 미승인” 운운하면서 임시총회소집 요구를 거부한 숭모회의 비민주적 행태를 규탄하며 다음을 요구한다.

一. 총회에서의 임원선출 결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숭모회의 법인등기부상 등재되어 있는 무자격 이사들은 자진사퇴하라.
一. 정관에 따른 회원들의 임시총회 소집 요구에 따라, 숭모회는 즉각 총회를 소집하여 임원을 선출하라.
一.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독립운동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기 위해 숭모회에 가입한 회원들에게, “회원 가입건은 승인되지 아니하였다”는 서신을 보내 회원을 모독한 황인성 숭모회이사장은 퇴진하라.


2003.7.22

안중근 의사 독립운동정신의 올바른 계승을 다짐하며, 「안중근의사숭모회」개혁을 촉구하는 모임(대표: 이돈명)

 

 

 

 

 

2009,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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