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마니산(摩尼山)
1. 강화도의 사찰(寺刹)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크기의 섬인 강화도는 중부지방 전역의 물을 한데 모아 오는 한강과 임진강(臨津江), 예성강(禮成江)이 합류하여 서해(西海)에서 만나는 물 머리(合水머리)를 막고 있는 섬으로, 예로부터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니산 정상에 단군(檀君)께서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 세 왕자에게 각각 한 봉우리씩 맡아 쌓게 하였다는 삼랑성(三郞城), 또 하늘에 제사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참성단(塹聖壇)이 있는 등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강화도에서 외따로 떨어졌던 성산(聖山) 마니산이 있는 화도(華島)는 조그마한 섬이었고, 본 섬인 강화도는 제법 넓어 고려산(高麗山), 혈구산(血口山) 등 몇 개의 산들이 있는데 각 산마다 수많은 사찰(寺刹)들과 사찰 유적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섬을 연결하여 하나의 섬이 되었다. 옛 문헌에 보면 강화 곳곳에 사찰들이 산재(散在)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몇 개의 사찰만이 남아있는데 마니산 이야기는 아니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오련지(五蓮池) 설화(說話)>
고구려 장수왕 때 천축조사(天竺<印度> 승려)가 강화도 고려산(高麗山) 정상에 올랐는데 그곳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五蓮池)을 발견하고 연꽃을 따서 던져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가 전한다. 곧 하얀 연꽃이 떨어진 곳에 백련사(白蓮寺)를, 푸른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청련사(靑蓮寺),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적련사(赤蓮寺), 노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황련사(黃蓮寺), 검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흑련사(黑蓮寺)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한다.
현재는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積石寺)의 3개 사찰만 있으나 기록에 의거 혈구산(血口山)에 있던 혈구사(穴口寺)를 근래(1962년) 황련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강화 가운데 우뚝 솟은 고려산(高麗山)은 지금도 봄이면 진달래 축제로 유명한데 정상 조금 아래쪽에 설화에 나오는 오련지(五蓮池) 흔적이 남아있다.
전등사 / 정수사 / 백련사
(1) 전등사(傳燈寺)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鼎足山>
전등사(傳燈寺)는 마니산의 한 줄기인 정족산(鼎足山) 기슭의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AD 381(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 AD 1266(고려원종 7년)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妃)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AD 1282(충렬왕 8년)에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원나라에서 가지고 온 옥등(玉燈)을 시주해서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고쳤다고 하는데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 AD 1337(충숙왕 복위 6년)과 AD 1341(충혜왕 복위 2년)에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AD 1605(조선 선조 38년)에 불이 나서 사찰건물 절반가량이 소실되었고, AD 1613(광해군 5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스님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AD 1625(인조 3년)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절이다.
(2) 정수사(精修寺/淨水寺)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摩尼山>
마니산에 있는 정수사는 AD 639(신라 선덕여왕 8년)에 회정(懷正) 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석모도(席毛島) 낙가산(洛迦山)의 회정 선사가 마리산 참성단(塹城亶)을 배관(拜觀)한 뒤 그 동쪽 기슭에 앞이 훤히 트이고 밝은 땅을 있는 것을 보고 불제자가 가히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정수(精修)할 곳이라 하면서 사찰을 짓고 정수사(精修寺)라 하였다고 한다.
*선정삼매(禪定三昧)-마음을 집중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불교 용어.
조선 세종 8년(1426년)에 함허(涵虛)대사가 중창하고 득도한 곳으로, 근처에 맑은 샘이 있어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인근의 골짜기가 물이 맑은(淨水) 함허동천(涵虛洞天)이다.
(3) 백련사(白蓮寺)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高麗山>
이 절은 AD 416(고구려 장수왕 4년)에 한 인도 승려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만 고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강화 본섬에 있는 고려산(高麗山)은 일명 진달래 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매년 봄이 되면 산은 온통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드는데 매년 봄이되면 이곳에서 진달래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적석사 / 청련사(국정절) / 황련사
(4) 적석사(積石寺/赤蓮寺)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高麗山>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1934년 불교학자 安震湖)에 의하면 이 절은 백련사, 청련사 등과 함께 AD 416년에 창건되었고, 처음의 이름은 적련사(赤蓮寺)였다는 사실을 전설로 전하고 있지만, 고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고 한다. 다만 AD 1714(숙종 40년)에 세워진 고려산적석사지비(高麗山積石寺之碑)에는 조선시대 중·후기, 절의 중건 및 중수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적석사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겼을 때 임금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던 곳이며, 삼별초(三別抄) 항거 때 선원사(禪源寺) 등 다른 절들은 피해를 보았지만, 적석사는 온전하게 유지되었다고 한다.
(5) 청련사(靑蓮寺/국정절)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고려산>
AD 416(고구려 장수왕 4년)에 인도의 승려가 중국 진(晉)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창건했다고 하나 확인하기 어려운 설화이다.
(6) 황련사(黃蓮寺/穴口寺)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혈구산>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기고 흥왕이궁(興旺離宮)과 삼랑성가궐(三郞城假闕)을 지을 때 함께 세웠다고 한다. 원래의 이름은 혈구사(穴口寺)로 고려시대 유일하게 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이 베풀어진 사찰이라고 한다. 대일왕(大日王)은 밀교(密敎)의 본존인 대일여래를 지칭하는 마하비로자나불(摩訶毘盧遮那佛)로, 이 대일여래를 받들어 공양하는 법회가 대일왕도량이다. 혈구산은 고려산과 붙어있다.
1962년 오련지(五蓮池) 설화에 의거 절 이름을 혈구사(穴口寺)에서 황련사(黃蓮寺)로 바꾸었다.
보문사/ 선원사 / 청수암(남산절) / 우보살(선원사)
(7) 보문사(普門寺)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洛迦山)>
강화도에서 서쪽으로 바다 건너 석모도(席毛島) 섬에 있는 절로, 우리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으로 꼽히는데, 이 절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AD 635(선덕여왕 4년) 4월,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올라왔다고 한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바다에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돌덩이가 올라왔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버렸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하라고 하였다. 다음날 다시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洛迦山)으로 옮겼는데,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들고 갈 수 없어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생각하고 굴 안에 단(壇)을 쌓고 모셨다고 한다.
고려 초,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이 이곳에 와서 불상을 살펴보니,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좌보처(左補處)는 미륵보살(彌勒菩薩), 우보처(右補處)는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이었고, 나머지는 18 나한상(羅漢像)과 송자관음(送子觀音)이었다고 한다.
회정(懷正)은 이 22 불상(佛像) 중 삼존불과 18 나한은 굴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서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洛迦山) 보문사(普門寺)라고 하였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이다.
보문사의 지하 법당(臥佛殿)과 함께 또 하나의 자랑은 마애석불(摩崖石佛) 좌상과 천인대(千人臺)이다.
마애석불 좌상(磨崖石佛坐像)은 보문사 뒤 바위 절벽에 조성한 마애불로,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裵善周)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 9.2m, 폭 3.3m의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석불좌상은 보관(寶冠)을 쓰고 연꽃 받침 위에 가부좌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어 더욱 신비감을 자아내는데 이 석불과 석굴에서 불공(佛供)을 드리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여인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곳이다.
천인대(千人臺)는 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인데 이 절의 창건 당시 서역(西域)의 한 고승이 이 천인대 위로 불상(佛像)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이 바위는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바위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千人臺)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8) 선원사(禪源寺)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사적 259호)
선원사(禪源寺)는 1.6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려의 문화를 꽃피운 가장 대표적인 사찰로 기록되어 있고 세계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위한 대장도감이 설치되었던 대찰(大刹)로 민족의 성지였는데 기록으로만 있고 장소를 알지 못하였었다. 1976년 동국대 강화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지표조사에서 처음 확인되었는데 주춧돌을 비롯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1977년 ‘강화선원사지(江華禪源寺址:사적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선원사지(禪源寺址) 앞에 작은 법당을 지어놓고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진척상황은 미미한 편이다. 절 바로 앞에는 얼마 전, TV에 혀를 똑딱똑딱 쳐서 목탁 소리를 낸다고 알려진 ‘우보살(牛菩薩)’, 상당히 넓은 면적의 연꽃 연못 연당(蓮塘), 매년 열리는 연꽃 축제 등으로 유명하다.
(9) 청수암(淸水菴/남산절)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남산>
청수암은 강화읍성이 있는 자그마한 남산에 있는데 1936년 봉법(奉法) 스님에 의해 창건된 암자라고 하며, 1969년 덕룡(德龍) 스님이 미륵전(彌勒殿)을 새로 지으면서 본격적인 절의 모습을 갖추었고, 1972년에는 대웅전을 중수(重修)하였으며 1976년에는 대웅전, 미륵전, 칠성각, 요사(寮舍) 등의 건물이 중건하였다.
이 절은 경내가 숲이 울창하고 조망이 좋아서, 또 절 뒤편에 있는 언덕은 임금이 되기 전 이곳 강화에 살던 철종(哲宗)이 애용하였다는 약수터가 있다. 예전에는 강화 남산(南山) 북록(北麓)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남산절로 불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