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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묵상글 들 ( 연중 4주 목요일-아무것도 없고 주님도 없지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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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4주 목요일-아무것도 없고 주님도 없지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오늘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지금껏 늘 데리고 다니던 제자들을 이제 파견하시는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고 주님도 없이 둘씩 떠나는 겁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왜 극구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실까?
주님께서는 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실까?
그것은 아무것도 지니지 말아야지, 필요하다고 하나씩 챙기기 시작하면
짐이 점점 늘어 여행이 불가능케 될까 봐 아예 싹둑 자르는 걸 겁니다.
코로나 때문에 요즘은 못가지만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출발할 때 짐을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걷다 보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거추장스럽기만 하여
하나씩 하나씩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서 저는 백분 동감합니다.
저도 관구장 임기를 끝내고 쇄신 기간이 주어졌을 때
한 달 순례를 떠나면서 침낭을 들고 떠난 적이 있습니다.
아직 5월이라 노숙을 할 때 침낭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며칠 못가 그 침낭이 너무도 짐스러워 그만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런 실용적인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 곧 영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데
복음선포를 할 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의지치 않게 하려는 겁니다.
또 다른 경우 무전 순례를 떠나면서 만원을 갖고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때 생각으로는 비상금으로 그야말로 급할 때 쓰자는 돈이었는데
그런데 그 만원이 내내 저에게 유혹이 되고 분심꺼리였습니다.
먹을 것을 구걸하다가 실패하여 몇 끼를 굶게 되면
하느님 안배에 맡기기보다 그 돈으로
해결하고픈 유혹이 자꾸 저를 괴롭히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아예 다른 데 써버리고 나니 비로소
마음에 자유가 오고 오로지 하느님께 의지케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것이기에 주님과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북한 선교를 할 때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식량이나 약품이나 농자재 지원 같은 인도적인 사랑 차원에서 그러하기도
했지만 그런 지원이 없을 때 아예 들어갈 수 없으니 그러하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오늘 주님 말씀이나 프란치스코의 예를 보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고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부끄럽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진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군대도 없이
이슬람 술탄에게 갔고, 어떤 목표나 성과를 욕심내지 않고 갔으며
그래서 술탄은 오히려 그런 그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믿게 되었지요.
이제 마지막으로 볼 것은 왜 둘씩 짝지어 보냈느냐는 점입니다.
당신이 함께 가지 않으니 당신 대신 서로 의지하라고?
그런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그 짝이 바로 주님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한 짝이 되었다면 베드로에게 요한이 주님이 되고,
요한에게 베드로가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둘이나 셋이 있는 곳에 당신이 함께 계시겠다는 뜻과도 일치합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부부도 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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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연중 제4주간 목요일 /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열두 제자의 기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열두 지파에서 출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열둘이라는 숫자로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땅’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산이요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선포하신 것은 ‘땅’이 아닌,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촌각을 다투면서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살아 내는 우리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은 아직도 먼 미래의 이야기, 현실감 없는 이야기, 성당에 나와야 가끔 듣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가 차근차근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리고 그 말씀은 제자들을 통하여 다시금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땅’, ‘돈’, ‘명예’, ‘성공’을 약속하셨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이 자리에서 열렬히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우리의 지상 순례의 여정에서, 영원한 생명은 아직은 너무 먼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선포하고 교회가 계승한 ‘회개’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내가 아닌 하느님께 향하게 해 보면 어떨까요?
- 박형순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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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었다.” (연중 4 목)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어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신 것은 선포에는 증거가 동반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그들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었다.”(6,13)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제자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 곧 증거가 복음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선포자는 곧 증거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곧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증거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처신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이지만, 동시에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그들의 환대에 의존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중요한 것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파견 받고, 가서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다.”(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주신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우리는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그리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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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연중 제4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7-13: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두 벌을 껴입는다는 것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또한,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6,34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통하여 완전해지려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다.
그리고 손님에 대한 풍습은 손님에게 친절히 접대하는 것은 거룩한 의무 중의 하나였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마르9,37). 이것이 지금 사목을 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며, 그리하여 참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의 복된 삶으로, 생활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그렇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복된 삶이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말씀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나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태어나시도록 하는 삶이다. 신앙은 우리 이기주의의 바람막이가 아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만 의탁하며 이 순간을 살아내며, 이웃을 통하여 우리의 본 모습인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해가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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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새벽을 열며.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빠다킹 신부님.
얼마 전에 책상 서랍을 정리했습니다. 몇 년 만에 책상 서랍을 꺼내서 그 안에 담긴 것들을 하나하나 꺼냈습니다. 솔직히 아무렇게나 서랍 구석에 처박혀 있는 물건들이 너무나 많았거든요. 그래서 원칙을 세웠습니다.
지금 쓸 것, 조만간 쓸 것, 언젠가는 쓰지 않을까 싶은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릴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사실 ‘지금 쓸 것’ 외에는 사용하는 빈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랍의 자리만 차지할 뿐이지요. 몇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사용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나 언젠가는 쓸 것이라는 생각에 차마 버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서랍 정리를 하다가 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분류하실까요? ‘지금 쓸 것’으로 분류되기를 원한다면 여기에 적합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냥 막연한 기대감으로 ‘지금 써 주셨으면 좋겠다’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너무나 다행스러운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주님의 기다림에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을 떠올리면서,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사용될 수 있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지요.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이어지는 명령입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한 것도 아닙니다. 가게가 많아서 쇼핑이 손쉬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돈 대신에 카드로 결제하는 시스템이 그 당시에 있을 리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는 거지처럼 다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명을 주시며 파견하시면서도 이렇게 어려운 제약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것에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야 함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돈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쉽게 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들의 말을 들으면 ‘얼마를 주겠다’라거나 ‘빵을 나눠주겠다’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구름같이 몰려들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자신을 이용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에 의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나를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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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하라. 그러면 내일에는 한 걸음 더 진보한다(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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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변화될지 예측할 수 없는 세상
어렸을 때 정말로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겨드랑이털입니다. 즉, 남성은 겨드랑이털이 있는데, 왜 여성은 없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여성은 겨드랑이에 털이 나지 않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실 여성들이 겨드랑이 제모를 시작한 것은 대기업의 마케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남자에게 팔던 면도기를 여자에게도 팔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민소매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이미지와 함께 ‘여자의 겨드랑이는 얼굴처럼 부드러워야 한다’라는 카피 문구를 넣었습니다. 털 없는 겨드랑이를 미의 기준으로 만든 것이었지요. 이 회사가 바로 ‘질레트’입니다. 이후 다른 면도기 회사들도 동참했고, 여성 면도기 시장은 급성장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화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여차했으면, 얼굴의 수염을 면도하듯 남자도 겨드랑이털을 제모하고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의 불안함 속에 변하지 않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세상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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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연중 제4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능력에만 의지하라
여행을 위해 짐을 챙길 때 이것, 저것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꾸려야 합니다. 잘 챙긴다고 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싸 들고 다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부터 ‘짐을 줄여야지’ 하고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 많이 소유해야 안심이 되는가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6,8-9). 고 이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한눈팔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인간적인 그럴듯한 수단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잔머리를 굴리지만,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7,31). 고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면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17). 하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힘을 비워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보이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외에도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여행을 처음 할 때는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여행을 자주 하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접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기쁨을 누리길 희망합니다. 사람에게서, 물질에서, 나 자신에게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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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식탁의 나무의자가 흔들리기에 살펴보니 다리와 연결된 곳의 나사가 풀어져 있었습니다. 매일 앉다보니 1년이 넘으면서 조금씩 나사가 풀어졌습니다. 나사의 모양이 일반 드라이버로는 조일 수 없었습니다. 공구 상에서 6각 드라이버를 샀습니다. 6각 드라이버는 10개의 세트로 되었습니다. 의자에 맞는 드라이버로 연결된 나사를 조였습니다. 7개의 의자를 확인하고 모두 나사를 조였습니다. 나사가 꽉 조여진 의자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드라이버는 일자와 십자드라이버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손재주도 별로 없고, 한국에서는 한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분 좋았습니다. 제가 한 작은 일로 사람들이 편하게 앉을 수 있다는 것도 기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악, 죽음’으로 흔들리는 세상을 보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가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보셨습니다. 악의 세력에 사로잡혀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드라이버를 준비하셨습니다. ‘겸손, 희생, 나눔’이라는 접착제를 준비하셨습니다. ‘말씀, 표징, 십자가’라는 나사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 하혈하는 여인, 소경, 중풍병자, 나병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세리와 창녀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보셨고, 사랑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버렸고, 배를 버렸고, 가족들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지식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지혜를 보았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능, 지혜, 기적,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돈이 없어도, 지팡이가 없어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였습니다. 마귀를 쫓아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삶을 살지라도 자신의 뜻을 먼저 찾으면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면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직책과 직분은 거룩함의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과 내일은 서울대교구 서품식이 있습니다. 서품식에서 가장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장면은 ‘성인 호칭기도’입니다. 서품 대상자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겸손한 자세를 취합니다. 바닥에 엎드려 있으면서 신자들이 함께 드리는 성인 호칭 기도를 들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학생으로서 지냈던 모든 일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들,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 앞으로의 다짐, 고마웠던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며 그 많은 신자들이 함께 기도 해 주셨던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사목의 결실을 맺어서 칭찬을 받을 때는 그 모든 일의 성과는 하느님의 은총임을 생각하며 좀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집니다. 나의 아픔과 좌절, 나의 실패와 고난까지도 모두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임을 믿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돌아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 호칭 기도’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사제가 되면 매일 ‘성체성사’를 거행합니다. 사제의 축성과 기도로 제병은 성체가 되고, 포도주는 성혈이 됩니다. 그리고 성체와 성혈은 주님의 몸과 피가 되어서 사람들과 하나가 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는 이들은 이제 곧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제에게 주어진 커다란 은총이며 사명입니다. 새 사제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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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려라.(마르 6, 11)
어제와
결별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오늘을
맞이할 수 없다.
발밑의
먼지와의
결별은
새로운 삶의
선택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삶의 기쁨과
살의 의미를
새롭게 만나는
우리의
변화이다.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다.
먼지를 털어
버리는
용기와
결단이다.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실천이다.
과거의 악습을
버리지 않고서는
오늘은
새로워질 수 없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듯
우리 삶은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실천으로
나가야 한다.
잘 털어버리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 사도직을
하다보면
여러 일들을
겪는다.
자존심의
먼지를
털어버려야
할 때가
참으로 많다.
힘겹지만
아프고 쓰린
실패와 좌절이
오히려 큰 은총이
되었다.
우리의
생활자체로
들어오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도
발밑의 먼지를
터시며 이고을
저고을을
다니셨다.
걸림돌과
방해물을
피하지
않으셨다.
흔들리지
않으셨다.
새로운
오늘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난
사람들이다.
발밑의 먼지를
털고 새롭게
맞이하는
새로운
시작이다.
삶이란
결단과 결심
결별과 변화가
어우러지는
선물이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운 오늘을
만날 수 없다.
자아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용기있는
새 아침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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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연중 제4주간 목요일<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아무것도 주시지 않고
복음 선포 임무만 맡기시면서 그냥 파견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예수님께서는 꼭 필요한 것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과 ‘병자들을 고쳐 주는 능력’입니다.
마르코복음에는 마귀들에 대한 권한만 언급되어 있지만,
루카복음을 보면 병을 고치는 힘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그 두 가지 외에는 주신 것이 없었을까?
복음 선포는 우선 ‘말’로 해야 하니까,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능력도 주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4-15).”
(이 말씀은 ‘말재주’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서 ‘말씀의 은사’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그냥 떠나보내신 것은 아니고, 늘 함께하면서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셨을 것이고, 약속하신 대로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3,13).”
(사실 언제나 함께하면서 도와주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그 약속에 대한 믿음만 확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다른 것이 없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실 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물질적인 것은 하나도 주지 않으셨고,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과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만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2).”
2)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지시는,
재물을 섬기지 말고 하느님만 섬기라는 명령입니다.
(세속 재물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최소한의 활동비와 생활비는 필요하다.
완전한 빈손으로는 복음 선포 활동을 할 수가 없다.” 라고
‘말대꾸’를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라고 비웃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루카복음에 바로 그런 경우가 나옵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3-15)”
바리사이들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누리는 것은
‘하느님의 복과 은총’을 많이 받은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것은 하느님의 복을 못 받은 것이다.” 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하느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장사도 아니고, 영업도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의 봉사활동입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 활동은 돈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만 해야 하는 일입니다.
3) 복음 선포 활동은 믿음과 사랑의 봉사활동이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지도 말아야 하고, 호의호식할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거든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도움으로 믿고 감사히 받아들여라.” 라는 뜻이기도 하고,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 좋은 대접을 받기를 바라고 다른 집으로 옮겨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4) ‘복음 선포’는 ‘심판 선포’가 되기도 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기뻐하면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되지만, 믿지 않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에게는
‘심판과 멸망을 경고하는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행동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 때에
먼지처럼 사라지게 된다는(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행동입니다.
이 경고는 예언도 아니고, 예고도 아닙니다.
멸망을 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믿고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제자들이 어디로 가서 얼마나 활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뒤의 14절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마도 제자들의 활동이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것 같습니다.
또 제자들이 병자들을 고쳐 줄 때에 ‘기름’을 사용한 것은,
‘치료제’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한과
병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의술’로 병자들을 고쳐 준 것이 아니라, ‘기적’으로 고쳐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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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고,
오늘 독서는 믿는 이들이 목표로 하는 곳은 하느님의 도성이라는 계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의 파견은 열두 지파의 파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열두 지파로 나누어 편성하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까지 나아갈 것과 그 땅에서도 이 지파의 체제로 살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열두 제자는 지리적인 땅이 아니라 영적이고 사회적인 하느님의 도성입니다.
그래서 이 도성은 죽은 후 내세에 누릴 영원한 생명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죽기 전
이 세상에서도 누려야 할 천상의 품위도 상징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물리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악령은 성령으로만 대적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악령을 물리칠 권한은
곧 성령의 이끄심에 따를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 위한 자격으로서,
철저한 가난과 비무장 그리고 하느님 백성에 의탁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떠날 때에 빵이나 여행 보따리, 돈 그리고 여벌 옷 등을 구태여
지니지 않아도 도처에 흩어져 있는 토박이 제자들이 그들을 성심성의껏 도와줄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생존과 생활에 매이지 말고 이 막중한 임무에 집중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열두 제자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선포할 말씀과 토박이 제자들의 보살핌으로
하느님 백성이 비로소 가시화될 수 있었고, 다만 그들이 짚고 갈 지팡이가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열두 제자와 토박이 제자들은 말씀 선포와 악령을 몰아낼 권한과
성령께 순명할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세울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자유는 그 백성의 공동선을 증진시키고 보호할 권한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약속받은 하느님의 도성이었습니다.
이 도성은 새로운 하느님의 법에 따른 사랑의 계약을 맺게 될 시온산과 같은
천상적 품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세상 도처에 천상적 가치로 세워질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부여받은 공동체의 자유와 공동선의 권한은 자동적으로,
악령이 조장하는 사회악에 저항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었고 이 사회악에
희생되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도 질병이나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감싸안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책임은 그들이 제자로서 스승의 행적을 보고 배운 바에 따라서 당연히 주어지는 필수 임무였습니다.
오늘날 제자로 파견된 이들의 처지도 이 모든 권한과 의무,
자유와 책임을 계승하고 있는데, 그 관건은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퍼져있는 더러운 영의 활약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믿음을 서약하고서도 무책임하게 냉담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겨우 남아 있는 이들에게서도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각종 봉사직책을 맡기를
꺼려하는 일도 분명 마귀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구역장이든 반장이든, 단장이든 회장이든, 사목위원이든 사목회장이든,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무언가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는 회피하려고 하는 풍조가 팽배해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 그리고 사회 활동에서도 자본이나 권력 또는 무신론적인 지식을 가진 자들이
퍼뜨리는 유행이나 풍조에 아무 생각없이 따라 사는 일도 이미 거의 관행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지내고 있는 이 희년의 주제도 괜히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요?” 이 물음을 주제로 내걸어야 할 정도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이유는, 신앙이 무엇인지 숙고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을 포기하고 사는 신자들도 태반입니다. 목표도 없이 정처없이 헤매는 나그네들 같아 보입니다.
이 모두가 더러운 영들이 우리 교회를 공격하고 있는 마귀 현상입니다.
그래서 파견된 제자들이 받고 있는 권한으로 신자들을 무장시켜야 합니다.
악령의 실체를 알려주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을 수 있는 무장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신앙의 무기는 겸손과 청빈, 순명과 기도이며 무엇보다도 말씀에 열려 있는 귀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지금 여기서 그리고 나와 우리로부터 출발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천상적 가치로
무장함으로써 성총지위를 누리며 살다가 죽은 후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세의 목표가 현세의 성적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성총지위는 공동체를 천상적 가치로 무장시키는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의 성적은 공동체가 속한 더 큰 범위의 공동체, 즉 나라와 겨레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성과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나아갈 곳은 돈과 권력과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랑 아닌 것이 위세를 부리는 곳은 어디나 지옥입니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이웃이 아니라 자신의 최고치이며,
천상적 품위를 서로가 함께 누리기 위해 연대해야 하는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열두 제자들처럼,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순명하는 의무를 이행하십시오. 공동체를 세우는 자유를 포기하지 말고
공동선에 기여할 권리도 빼앗기지 마십시오. 사회악에 주저앉지 말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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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연중 제4주간 목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
- 배움, 섬김, 나눔 -
어제 입춘에 이어 지난밤 참 좋으신 주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하셨습니다. 새하얀 순수의 사랑으로 빛나는 흰눈 가득 덮인 온 세상이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같았습니다. 하얀 눈길을 걸으니 예전 써놨던 시가 생각났습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의
초롱초롱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 되어
임의 품 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 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어제 수요일 교황님의 일반 알현 시간에는‘전례와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일치시킨다’는 제하에 전례기도에 대한 참 유익한 가르침이 있었고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교회의 전례는 그리스도를 우리 삶안에 현존케 한다. 전례는 자발적 기도 그 이상으로, 전 교회 신자들의 기초가 되는 행위의 기도이다. 전례는 사건이며 발생이며 현존이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사적 표지들을 통해 성령 안에서 자신을 현존케 하신다.
전례 없는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와 같다. 그리스도는 성사가 거행되는 모든 시간마다 현존하신다. 미사는 언제나 사제뿐 아니라 그것을 체험하는 모든 신자들에 의해 거행된다.
그리스도는 전례의 중심이다. 모든 신자는 성사에 온 마음으로 참여하도록 초대된다. 삶은 하느님께 대한 경배가 되도록 불림받고 있으며, 이것은 기도없이는, 특히 전례기도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자명한 진리이지만 신선한 느낌으로 와닿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영성은 전례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개신교와의 결정적 차이이기도 합니다. 새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교회 전례에 참석할 수 없음은 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적 손실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인 전례의 생활화, 일상화, 습관화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전례의 생활화, 생활의 전례화를 통해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살게 하는 전례기도의 은총입니다. 물론 전례거행에 앞서 필히 전제되는 바, 회개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생활화, 일상화, 습관화를 이뤄주는 전례기도 수행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모세의 시나이산과 예수님의 시온산을 대비시키며 새계약이 이뤄지는 하느님의 나라 현실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전안에서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미리 맛보는 영적이며 천상적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뿌리신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하는 피가 있는 곳입니다.”
그대로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전례 축제 집회를 통하지 않고 어디서 이런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맛보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중개자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는지요! 하여 미사감사송 끝무렵에 우리는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한목소리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나이다.’노래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이 되어 하느님의 도성, 천상 예루살렘을 앞당겨 체험케 하는 전례기도은총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 체험의 관상적 행복은 선교활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파견하신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복음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명령이 참 엄중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문자 그대로 보다는 그 깊은 가르침의 속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전폭적으로 주님께 의탁하고 가능한 최소한의 간편하고 홀가분한 차림으로, 무소유의 정신으로, 영성으로 선교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전례기도중 주님을 만났을 때 무소유 영성의 은총입니다.
정말 행복한 부자는 필요를 최소화한 사람입니다. 필요가 적을수록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소유물을 지녔어도 끝없는 탐욕의 사람이라면 영적으로 영원히 불행한 가난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만으로 행복한 무소유의 영성으로 충만한 자유로운 제자들이요 민폐를 최소화한 ‘짐이 아닌 선물’로서의 복음 선포자의 삶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제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
그대로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회개로 응답할 때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어제는 주님 제자들의 우선적 자질인 배움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참으로 회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이들에게 필수적 자질이 배움이요 동시에 사랑의 섬김과 나눔임을 깨닫습니다. 참 좋은 순수한 우리 말마디가 배움에 이어 섬김과 나눔입니다. 회개의 선포, 많은 마귀를 쫓아냄, 병의 치유등 모든 사랑의 활동은 섬김과 나눔으로 요약됩니다.
어제 저는 참 뜻밖에 귀하고 고마운 하느님 나라를 선물 받았습니다. 존경하는 조광호 선배 사제의 사랑의 나눔과 섬김을 통해 크게 배웠습니다. ‘번거롭고 힘든 시절, 강화도에 갔다가 찍은 사진 그리고 그 에스프리(esprit;프랑스어로 "혼, 마음, 정신" 혹은 "기지, 재치"를 뜻하는 말.)를 적은 졸시拙詩옵니다.’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신비로운 바다 풍경 사진 그리고 ‘강화 황산도에서' 라는 맑고 깊은 시였습니다.
-“얼어붙은
동토의 갯펄 같은
내 영혼에
당신은 저녁 밀물로
은밀히 스며들어
눈물도 메마른 내 가슴
텅 빈 물바다
하늘로 여시어
그 흔한 목선 한 척 없는
적막한
내 생애의 포구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물고
희끗희끗
눈보라로 날리시네.”-
우리의 배움과 섬김과 나눔의 삶 중심에 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배우고 섬기고 나누면서, 묵묵히, 한결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머무르고, 그분의 의로움은 대대손손, 그분 계약을 지키는 이들에게 머무르리라.”(시편103,17-18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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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지상 순례자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마르 6,8)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명령하십니다. 낯선 미지의 길 위에서는 그동안 누려온 것들이 아쉬울 수도 있고, 굶주림과 강도와 맹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 벌 옷과 신발, 그리고 지팡이만 지니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단호하기까지 합니다.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마르 6,10)
게다가 예수님은 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기웃거리며 옮겨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호평과 대접과 칭찬은 당장 달콤할지 모르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착각하게 만드는 진실의 훼방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복음이 물질로 선포되지 않고 비움과 가난, 겸손과 낮춤으로 선포되는 신비라는 것, 그리고 두둑한 주머니와 든든한 뒷배가 기쁜 소식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을 제자들이 실제로 체험하길 바라시는 겁니다.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되 이 세상에 매이지 않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구약의 현장과, 우리가 향하고 있는 천상 예루살렘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히브 12,22)
구약의 백성은 주님께서 시나이에 나타나셨을 때 모세에게 중개를 요청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류가 맺은 새로운 계약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계약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계시고 천사들과 의인들의 영이 우리를 기다리며 응원해 주시는 곳입니다. "주님의 피"로 속량된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지복직관의 행복이 기다리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요.
지상 순례 여정을 지나는 우리는 저마다 떠나온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귀로 안에 있습니다. 천상 예루살렘으로 귀향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지상 순례길을 더 가볍고 단순하게 걸으라고 권하십니다. 자기 맘대로 안 되는 자신에게도, 내 맘 같지 않은 타인에게도 안달복달 연연할 것 없이, 담백하고 순수하게 당신께 의탁해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12)
제자들의 두려움을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그처럼 명령하시니 제자들은 씩씩하게 나아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마와 치유의 기적을 베풀지요. 제자들은 자기들의 재산과 능력으로 우쭐하기보다, 가난과 결핍 중에 주님의 힘이 드러난 것을 흡족히 여길 것입니다.
매 미사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복음 선포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충만함과 능력 뿐만 아니라, 보잘것없음과 약함, 가난과 부족함을 통해서도 주님께서 드러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세상 물질과 욕망에서 자유로울수록 복음의 향기는 더 멀리 향기롭게 퍼져 나갑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허락받은 생명에 대해 감사하며 충실히 채워나가야 할 선물임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주인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니라고 허락하신 것만으로도 사실 인생길이 모자람 없이 충만하다는 걸 우리는 삶의 질곡을 통해 알아가는 중입니다. 복음이 그런 우리를 통해서도 전해지니 놀랍지요. 이 또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지상 순례길을 걸으며 말씀에서 힘을 얻고 주님께 의탁해 나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이 길에 동무가 있으니 더 큰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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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아쉽지만 낡은 나를 허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 새로운 시야가 활짝 열립니다!
인적이 드믄 피정 집에서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였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나서는 저를 향해 수사님 한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습니다.
깜짝 놀라며 하시는 말씀.
“이렇게 그냥 맨몸으로 나가시면 절대 안됩니다.
이곳은 들개들, 멧돼지들 출몰 지역이라, 요즘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거라도 꼭 들어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길죽하고 튼튼한 지팡이를 하나 제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이 사목 실습을 떠나기 직전,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씀하시는데, 참으로 특별합니다.
적어도 일주일 남짓 되는 장거리 일정 일텐데도 불구하고,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참으로 난감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문전걸식을 하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팡이는 왜 지닐 수 있게 하셨을까요? 마찬가지 이유였을 것입니다.
산짐승이나 전갈, 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로서 지팡이와 신발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명씩 파견하지 않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혼자 가면 외롭고 쓸쓸하고, 얻어먹을 때도 부끄럽고 난감 할 텐데, 둘이 함께 하면 용기도 생기고 의지도 되고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서로 지탱해주고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큰 선심을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당부하신 강조점은 단순하고 검소한 정신이었습니다.
복음 선포라는 엄중하고 중차대한 일을 행함에 있어 안락한 것에 대한 포기는 가장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오로지 복음 선포에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게 하기 위한 포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한 순례자가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더니, 건장한 남자들이 묵직한 햄머 하나씩을 들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대체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요?”
“저희 수도원 수사들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 수사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지금 수도원을 허물고 있는 중이랍니다.”
“아니, 멋진 수도원인데, 대체 왜요?”
“저 건물을 허물면 새벽에 동이 트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더 큰 포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쉽지만 낡은 나를 허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 새로운 시야가 활짝 열립니다.
아깝지만 어제의 나를 포기하면 새로운 세상, 새 아침이 밝아옵니다.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그대는 길을 떠날 때 전대도 지니지 말고, 여벌 옷을 생각하며 걷지도 마십시오.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떠오르는 해와 함께 일용할 양식도 들어올 것입니다.
어떤 새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하느님 섭리로 먹이를 얻으리라 근심 없이 희망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합니까?”
(프루텐티우스 교부)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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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4주간 목요일].
혼란의 시대, 누가 사이비고 누가 정통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동시에 예수님 공동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공동체를 분별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알아야 합니다.
마르코는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 공동체의 특징들을 제시합니다.
기준이 없다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부마자를 분별하는 기준도 제시합니다.
보통 부마자와 정신병을 앓는 사람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몇 가지 특징들을 제시합니다.
부마자가 배우지 않았던 여러 언어를 말하고, 동시에 성물, 성수, 기도문 등에 반응하여 고통스러워하며,
또 교회를 저주하고, 나아가 몸이 붕 뜨는 등의 현상과 괴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마귀 들린 것을 확신해도 좋다고 제시합니다.
이런 기준이 없다면 부마자와 정신병자를 구별하는데 많은 애를 먹어 정신병자에게 마귀를 쫓아낸다고 고통을 가할 수도 있습니다.
타 종교에서 그런 구마를 하다가 사람을 아예 죽인 예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구원의 공동체를 분별할 명확한 기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혼란의 시대, 누가 사이비고 누가 정통인가?”라는 식의 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처음엔 신천지만 사이비인 줄 알았지만, 일반 사람들의 눈엔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으로 각인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코로나는 참으로 여러 종교집단의 문제점들을 밝혀냈습니다.
우선 신천지라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단체가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그다음엔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사랑제일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말은 사랑을 제일로 삼는 교회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에 큰 피해를 줬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BTJ 열방센터, 그리고 IM, 혹은 그 산하 IEM 선교회가 말썽입니다.
학생들을 싼값에 유학 보내준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학원화하여 코로나 시대에 크게 부흥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많이 와서 터져나갈 것 같다고까지 즐거운 비명을 지르다가
집단 감염의 원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러저러한 목사들의 개인적인 문제들도 TV에 자주 등장하니 이젠 정말 누가 사이비이고 누가 정통인지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일반인들이 믿는 것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마르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어떠한 특징을 가졌는지 말하며 그러한 특징이 있으면 참다운 구원의 공동체임을 믿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마르코가 전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공동체”여야 합니다.
열두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뽑으시고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십니다.
그러니 본인이 재림예수라 말하는 모든 집단은 그리스도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많은 교회에서도 구마를 하지만 가장 철저하게 악령에 관한 것을 교리화하여 구마를 하는 종교는
가톨릭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검은 사제들’과 같은 영화도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시는 공동체는 정말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합니다.
혼자 특정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에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나주 율리아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한 명씩 파견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번째는 “가난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지팡이나 신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여벌 옷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마태오나 루카는 신과 지팡이도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르코는 여행 다니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많이 걷기 위해서는 신도 필수적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어쨌건 여행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을 제외하고는 돈을 모으는 공동체는 주님께서 파견하신 공동체와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돈벌이하는 종교는 거짓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도 조심하여 프란치스코 영성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한 고장에서는 한 집에만 머물라.”라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머물지 생각하여 이집 저집 옮겨 다닌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마음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주교가 정해주는 자리에 떠나라 할 때까지 머뭅니다.
자신이 원한다고 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머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믿지 않으려 하면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며 떠날 줄 아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그렇게 떠나셨습니다.
부부로 맺어졌다면 싫어도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그런 애정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애정에 집착하여 더는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는데도 끝까지 머물려고 고집부린다면 그 사람은 복음보다 애정을 더 중요시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즘 특별히 수도회에서는 성소가 줄어든다고 성소자들에게 지나치게 기울고 심지어 휘둘리는 경향까지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다운 그리스도의 파견된 공동체의 위엄을 잃습니다.
일곱 번째는 “회개하라고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면 집안이 잘된다는 식의 기복신앙이 아니라 이전의 세속-육신-마귀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공동체가 참된 복음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나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향하고,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향하게 만드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처음부터 내 안에 있던 좋은 것을 키워내는 식의 그런 악으로부터의 회개가 아닌 발전만을 말하는 종교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는 “기름을 발라 병자를 고쳐준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기름을 바른다는 것도 마르코 복음만의 특징입니다.
이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사’(聖事)를 의미합니다.
성사는 물이나 기름, 밀떡이나 포도주와 같은 것들로 주님의 은총을 전하는 수단입니다.
마르코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그리고 베드로가 행하는 이 성사들을 보며 참된 공동체는 성사를 통해 은총을 내어주는 공동체임을 본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마르코 복음 사가가 말하는 구원의 공동체는 가톨릭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사이비나 뉴에이지 같은 것에는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공동체는 반드시 그 공동체만의 분별 기준이 있습니다.
어느 공동체에 속하느냐가 구원의 절대적인 요인입니다.
이 기준들을 잘 익혀 절대 속지 말고 또 그 기준의 모습대로 공동체를 쇄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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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김 로마노 형제님.
2021년 2월 4일 목요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열 두 제자 파견 (마르6,7-13)
제1독서<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입니다.>(히브12,18-19.21-24)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19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21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세는 “나는 두렵다.” 하며 몸을 떨었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23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24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뿌리신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하는 그분의 피가 있는 곳입니다.
화답송 시편 48(47),2-3ㄱㄴ.3ㄷㄹ-4.9.10-11(◎ 10 참조)
◎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누리나이다.
○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우리 하느님의 도성,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아름답게 솟아오른 그 산은 온 누리의 기쁨이라네. ◎
○ 북녘 끝 시온산은 위대한 임금의 도읍이라네. 하느님은 그 궁궐 안에 계시며, 당신을 요새로 드러내신다. ◎
○ 만군의 주님 그 도성에서, 우리 하느님의 도성에서, 우리가 들은 대로 우리는 보았네. 하느님이 그 도성을 영원히 굳히셨네. ◎
○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
복음<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히브12,18-19. 21-24)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나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22-23ㄱ)
옛 계약을 가졌던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대하여 품고 있었던 공포감에 대하여 기록한 히브리서 12장 18-21절과는 달리, 히브리서 12장 22-24절에서는 성도에게 부여된 새 계약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가지는 새로운 관계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으로 번역된 '알라 프로셀렐뤼타테'(alla prosellelythate)는 히브리서 12장 18절과 첨예한 대조를 이룬다.
옛 계약 아래에 있는 성도들은 지상에 임재하신 하느님 대전에도 나아가지도 못했고 그 음성 듣는 것도 두려워했지만, 새 계약 아래 있는 성도들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 대전에도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에 대해 말한다.
그는 지금 자신의 독자들 중에 영육간에 지친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 배교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탁월한 영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그 최후의 승리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풀코스를 거의 다 달려와서 결승점이 보이는 트랙의 마지막 지점인 직선 코스에 접어들어 주저앉으려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자신의 독자들이 지금 이 직선 코스에 접어 들었다고 격려하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기술해 주고 있다.
즉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다시 뒤로 돌아가거나 주저앉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과거 옛 계약 아래 있던 백성들은 그렇게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가지 못했던 반면에 새 계약 아래있는 성도들은 하느님 대전에 너무나 손쉽게 나아갈 수 있다.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지상의 시나이산 그리고 지상의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하늘의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표현이다. 그곳은 계속해서 살아계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도성으로서, 바오로가 증거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갈라4,26) 및 사도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묵시21,2)과 일치한다.
여기서 '도성'에 해당하는 '폴레이'(pollei)의 원형 '폴리스'(pollis)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리스의 자유 시민은 '폴리스'에 개인의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고, 행정과 통치에 관여하였다. '폴리스'는 아무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독립된 표현이었다.
그러나 구약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이르'(yr)의 역어로 나타나며, 이 '이르'(yr)는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는 모든 요새화된 고지가 '이르'로 지칭되었다. 즉 이것은 외적이 침입하지 못하는 안전한 곳이란 의미가 강조되는 단어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구약 시대에 '이르'로 지칭되었던 예루살렘은 특별한 곳으로 언급된다.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요(2역대6,38), 하느님의 도성(시편46,5; 48,2), 대왕의 도읍이다(시편48,3).
그러나 이 찬란한 명성을 지닌 지상의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새 계약 아래 있는 성도가 이른 곳은 그림자가 아닌 실체, 곧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그곳은 하느님께서 지배하시는 곳이요, 새 계약 아래 있는 모든 성도는 그곳의 자랑스런 시민이 되었다(필리3,20).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
하늘의 도성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하느님 대전에서 그분을 모시고 있다. 여기에서 '무수한'으로 번역된 '뮈리아신'(myriasin)의 원형 '뮈리아스'(myrias)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수(an innumerable multitude),무제한적인 수(an unlimited nember)를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그 숫자가 '수백만 수억만' 라 했으며, 그렇게 어마어마한 숫자의 천사가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찬미하고 있다고 진술했다(묵시5,11.12) 그 많은 무리의 천사들이 날마다 찬양하는 광경을 통해 하늘 예루살렘의 축제의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다.
예언자 다니엘도 환시 가운데 천국을 보았는데, 그가 볼 때 하느님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다니엘7,10) 이라고 하였다. 천사들은 또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성도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이들이기도 하다(히브1,14).
'축제 집회'로 번역된 '파네귀레이'(panegyrei)의 원형 '파네귀리스'(panegyris)는
'모든'을 뜻하는 '파스'(pas)와 '집회'를 뜻하는 '아귀리스'(agyris)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명절의 모임' 이나 '축제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고전 그리스 문헌에서는 사람들이 신들을 축하하기 위해 즐기는 축제일을 가리켜 쓰였다. 이 축일에는 국민 모두가 모여 신들을 축하하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한 그리스 개념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를 묘사했다고 본다.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
'맏아들들의 모임'에 해당하는 '엑클레시아 프로토토콘'(ekkllesia prototokon)은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택한 백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어휘이다.
먼저 '교회'를 뜻하는 '엑클레시아'는 '~에서 밖으로'를 뜻하는 전치사 '에크'(ek)와 '불러내다', '소환하다'를 뜻하는 동사 '칼레오'(kall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구원받은 모든 이들을 지칭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왕국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마태16,18; 에페5,24-32; 콜로1,18).
또한 '맏아들들의'로 번역된 '프로토토콘'의 원형 '프로토토코스'(prototokos)는 '처음'을 뜻하는 '프로토스'(prot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그 기본 의미는 '장자의','처음 태어난'이다.
구약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 문자적 의미(창세25,25; 탈출13,2)와 전이된 의미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후자의 경우는 은총을 받은 자들 또는 선택된 자들을 가리키는 영예의 칭호로 나타난다.
신약에서도 이 단어는 예수님께 대한 영예의 칭호로 나오며,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행동의 불변성을 명확하게 표현한다(로마8,29; 콜로1,15.18).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은 모든 이들의 맏아들이시다(로마8,29). 이 말은 그가 하늘의 영광을 상속하는 모든 이들의 첫째가 되심을 뜻한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복수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맏아들로 본 것처럼(탈출4,22.23)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상속하는 모두를 맏아들(장자)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도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계승한 공동 상속자라고 가르친다(로마8,17). 이것은 성도가 일시적인 고난 때문에 주춤거리거나 달음질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곧 구원입니다.
(마르 6,7-13)
7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권한, 더러운 靈에 대한 권한입니다. 권한- 엑소우시아- 엑소(밖으로) 우시아(본질)
내 안에 세상이 참이라 말하는 윤리의 법을 비워내고 하늘의 대속 그 진리를 받아 들였다면~ 그 내안에 진리가 밖으로 드러난, 선포된 그 진리의 말씀의 힘 그 본질로~ 뱀의 거짓말 그 더러운 영의 선악의 그 두 법의 본질- 판단, 심판을 부수는 권한입니다.
제자, 사람 그들 안에 들어있는 그 선과 악, 그 둘을 짝하여 하나로 보내심- 그 자체가 권한입니다.
(창세2,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 선과 악을 알게, 깨닫게 하는 나무입니다. 알아서, 깨달아서 생명 그 하나를 얻어라 입니다.
선과 악, 그 두 법을 근거로 한 인간의 의로움은 개짐, 오물이라 하셨고(이사64,5) 그 사람의 의로움으로는 구원이 없다 하셨으니(로마10,3 참조)~~~
어제~ 사람들의 환대, 인정을 받기 위해 사람들의 뜻, 그 마음을 만족시키는 땅의 복을 위한 복음 선포하지 않도록 하느님의 뜻을 위한 구원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도록~ 주님께서 멸시 받으시는 모습을 제자들에 가르침으로 보여주심을 저희 또한 배웠습니다.
선이 악을 대신해 죽어 생명을 주는~ 그 선과 악을 올바로 깨달아~ 그 하늘의 진리의 말씀으로 살려내시려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 하느님의 일 그 길을 갈 때는 지팡이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길 그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 봉사 활동을 하면서 말씀을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지팡이 곧 주님의 말씀만 지니고 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빵(양식)등 전도, 여행 경비를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은~ 너희가 준비한 그 너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 신발- 복음의 신발입니다.
(에페6,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두 벌옷- 선과 악 그 두 법으로 ‘가지 말라’입니다. 선의 대속으로 악, 죄를 용서받아 생명을 주는 그 ‘의로움의 옷을 입고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사61,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 이집 저집 사람들의 대접을 ‘받지 말라’하십니다.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 두 법이 아닌 -구원을 위한 생명, 그 하나의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그들을 떠나는 이유(증거)를 보여라, 정확하게 알려라 하심입니다.
그들의 그 두 법의 생각, 뜻이 틀렸음을 알려줘야 회개의 기회가 생겼을 때 깨닫게 될 것이니까요. 그들의 두 법의 智慧, 善 그 모든 것이 그릇된 발밑에 먼지일 뿐임을 보여주어라 하십니다.
(요한14,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16,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 회개-반성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가던 길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것, 메타노니아-회개입니다.
두 법에 의한 그 행위의 그 자기 의로움에서~ 하늘의 대속의 죽음, 그 하늘의 의로움을 거저 받아 의탁 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위한 길로 돌아서는 것, 회개입니다.
(1베2, 2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 대속의 십자나무이기에 우리의 죄가 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의인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세15,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 믿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 뱀(마귀)이 준, 선악의 두 법의 말, 그 거짓 가르침 때문에~ 하늘의 대속의 죽음 그 사랑, 의로움, 그 진리가 덮여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죄의식이라는 질병에 걸려있습니다. 신앙의 무거운 짐(질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질병, 무거움 짐은 기름, 곧 성령으로 치유됩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참 진리로 증언하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15,26참조)
(로마8,7-13) 7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 선 악의 그 두 법에 의한, 육의 행실의 본질- 죄의식을 성령의 법(로마8,2)으로 죽이십시오. 말씀이 권한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의로움을 깨달아, 찾았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마태6,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 아멘 -*^ㅇ^*-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6,7-13)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7)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시어 실제로 파견하여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일하게 하신 마태오 복음 6장 7절부터 13절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기 활동이 끝나고 후기 갈릴래아 활동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당하신 이후에 복음 전파와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복음의 봉사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파견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심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복음을 전하는 스승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6장 7-13절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시어 복음 전파자에게 필요한 교훈을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부르시어'에 해당되는 '프로스칼레이타이'(proskaleitai; he called to him)의 원형 '프로스칼레오마이'(proskaleomai)는 '~을 향하여', 혹은 '~을 위하여'라는 뜻을 갖는 전치사 '프로스'(pros)와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칼레오'(kaleo)의 합성어로서 '~로 초대하다' 혹은 '~을 위하여 부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천국 복음의 봉사자로 파견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로 번역된 '아포스텔레인'(apostellein; sent out)의 원형 '아포스텔로'(apostello)는 '~로부터'라는 뜻으로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떠나다'는 뜻이 있는 '스텔로'(stello)의 합성어로서 '~로부터 분리되어 보내다'는 문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단어에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여 파견한다'는 뜻을 지닌다. 이 단어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열두 제자를 따로 분리하여 복음 전파의 봉사자로 파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단어의 명사형인 '아포스톨로스'(apostolos)가 그리스도의 사도를 의미한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에 해당하는 '뒤오 뒤오'(dyo dyo; two by two; '둘씩 둘씩')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상호간에 도움을 주는 협력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복음을 듣는 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벙법이기도 하다.
또한 6장 11절에서 등장하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증거와 관련해서 증인의 최소 인원을 확보하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둘'은 증인의 수였으며, '둘'의 증언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한 거부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민수35,30; 신명17,6; 마태18,16).
이 둘씩 짝지어 파견되는 전통은 초대 교회 선교 여행에서도 계속하여 이어져 갔다(사도15,22).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문맥으로 보아 이 권한(권세)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령을 내쫓고 거룩함을 회복시키는 권세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마귀(악령)의 특징을 더럽다고 규정하는데, '더러운'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톤'(akatharton; unclean)의 원형 '아카타르토스'(akathar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정결하게 하다', '속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카타이로'(kathairo)의 합성어로서 '정결하지 않은', '속죄되지 않은', ' 불순한' 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신성(神性)과 접할 수 없는, 즉 우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을 뜻한다(사도10,28; 1코린7,14).
특히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쫓아내야 할 '더러운 영들'은 단순히 하느님의 적대자로 존재하는 악령(마귀) 자체만이 아니라, 그러한 악령의 활동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악하고 더러운 모든 영적 현상과 인간 마음의 상태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주시고'에 해당하는 '에디두'(edidou; gave)는 원형 '디도미'(didomi)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12제자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그러한 권한(권세)으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부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일회성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요청해야 하며, 또한 계속적으로 부여받아 사용해야 함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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