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선언 이후 35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우리 국민들의 뿌리 깊은 관존민비 사상

[정임표]

대건고 23기 동기들에게

"6.29 선언은 우리 역사의 큰 전환점이었다(6월 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6월 29일 집권당 민주정의당의 대표였던 노태우가 전격 발표한 선언. 이 선언 이후 그해 말 개헌을 통해 한국 대통령 제도는 오늘날의 직선제, 5년 단임으로 정착되었다.)" 

그 위대한 민주시민 혁명 이후 3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바뀌지 않는 우리 국민들의 뿌리 깊은 관존민비 트라우마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필자의 졸작 수필 <칠보 형님>을 올린다. 이 칠보형님을 올해 봄 집안 숙모항렬 아주머님께서 별세하여 장지인 산소에서 만났다. 필자가 영구차 보다 먼저 산소에 도착하였는데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인부 한분과 둘이서 산소작업을 하러 왔었다. 잠시 한숨을 돌리는데 형님께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이 헛되도다"하며 솔로몬의 <전도서>를 읊조리시는 게 아닌가. 청년의 때에 참으로 열심히 예배당에 다니셨다는 것을 아는 지라 나는 속으로 감탄하면서 "아직도 <전도서>를 기억하십니다" 하고 말을 건냈다.

우리가 정녕 이땅을 살아내면서 무엇을 가장 가치있는 일로 숭상해야 할 것인가?

돈인가?

벼슬인가?

자기 출세인가? 

자기 집단들만의 의리인가?

왜 우리는 전세계인이 깜짝 놀랄 6.29 선언을 이끌어 내고도 아직까지 이 모양 이꼴로 말라빠진 이념투쟁에 몰두하는가? 

순혈주의 이념 뒤에 숨긴 가면을 벗은 우리들의 진짜 얼굴은 어떤 얼굴들인가?

내가 청소년 시절에 공부한 내 모교인 대건중고등학교 교훈이 "언제나 어디서나 양심과 정의와 사랑에 살자"이니 살아 낸다고 허겁지겁 좌충우돌 하며 교훈대로 살아 내지는 못했지만 그 정신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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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형님

우르르 몰려 왔다 우르르 떠난다. 그들은 무슨 마음으로 왔다 가는가. 회관을 짓는데 벽돌 한 장 나르지 않은 사람들이 관내 유지랍시고 포켓 꽃 하나씩 꽂고 우르르 몰려 왔다 우르르 떠났다. 고향 마을회관 준공식 날의 풍경이다.

몇 일전 칠보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칠보형님은 고향마을 이장이다. 학력도 별로 없고 언변도 뛰어나지 않고 요령도 없는 분이다. 잔꾀나 잔재주는 처음부터 없으며 평생을 고향을 지키며 이름처럼 우직하게 살아온 분이다. 칠보형님은 이장이 되고나서 많은 마을 숙원사업들을 해결했다. 안산 모롱이 돌아오는 시멘트 포장길도 하고 오목고랑 복개공사도 하고 골짜기에 길도 만들었다. 자기 땅은 한 뼘도 희사하지 않으려는 앞뒤 꽉 막힌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이제는 마을 회관까지 지었다. 물론 그 많은 비용을 칠보형님이 낸 것은 아니다.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자기 농사일에도 바쁘면서도 묵묵히 잘 해 내었다.  큰일에는 뒷공론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런데 개의치 않고 성심을 다하였다.

나는 칠보형님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내가 그것을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 칠보형님은 쥐꼬리만 한 일을 해 놓고 대단한 업적이라도 쌓은 양 자기자랑을 늘어놓지 않는다. 칠보형님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례하고 쌍스러운 언사로 윽박지르지 않는다. 칠보형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칠보형님은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하인 대하듯 하지 않는다. 칠보형님은 수하로부터 어른 대접 받기는 좋아하면서 자신은 수상에게 어른대접을 안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칠보형님은 남이 먼저 인사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칠보형님은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사사건건 헐뜯는 사람이 아니다. 칠보형님은 어떤 모임에서든 상석에 앉으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칠보형님은 시답지도 않은 말로 대중 앞에 한 말씀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칠보 형님으로부터 고향 마을 회관 준공식 잔치를 하니 객지에 사는 모든 향민들에게 연락하여 놀러오도록 하라는 부탁전화가 왔다. 초대를 받는 사람들에게 찬조나 부조금이 부담을 줄까봐 그냥 몸만 오라고 당부하면서-

개관식 테이프를 끊는 시간이었다. 청,황,록색의 테이프가 쳐졌다. 우르르 몰려 온 사람들 십 수 명이 흰 장갑을 끼고 가위를 들고 줄 앞에 모여 선다.  오늘 이 잔치의 진정한 주인을 찾는 이는 하나도 없고 다들 제자리 찾기에만 바쁘다. 그 줄 뒤로 설자리가 없어진 칠보형님이 어색한 모습으로 줄의 맨 끝에 가서 선다. 우리 마을 이장이, 내 고향마을을 대표하는 칠보형님이 걸레질 한번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밀려나 꼬랑지에 가서 붙다니. 관중 속에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뛰어 나왔다.

“ 이장 형님 자리는 거기가 아니고 군수님 옆이니 이리로 오십시오. 형님은 마을 대표이고 오늘 이 잔치의 주인이니 형님이 가운데 서는 것이 법도입니다.” 하면서 손을 잡고 안내하여 군수님 옆자리로 옮겨 드렸다. 내 말이 당연하니 다들 주춤주춤 자리를 물렸다.

기념촬영을 하고 모두들 이층 내빈석으로 안내되어 음식대접을 하였다. 칠보형님은 그 자리에도 얼마 있지를 못하고 다시 내려와 다른 어른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형님은 이층에 가서 내빈 대접을 하시라 하였지만 자신은 그런 일에 익숙지 못하니 뒷수발이나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신다. 

사람들은 다들 섬김을 받기는 좋아하면서도 남을 섬길 줄은 모른다. 단상에 서기는 좋아 하면서 단상을 만들 줄은 모른다. 인사를 받기는 좋아 하면서 인사를 할 줄은 모른다. 존경 받기만을 바라고 남을 존경할 줄을 모른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겸손의 미덕을 모른다.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옛말이 있다. 참 지도자란 무엇인가. 자기 백성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을 참지도자라 한다면 칠보형님은 당신의 이름처럼 마을의 보배이며 참 지도자임이 분명하다.

나는 칠보형님과 집안 형수 아주머님들, 그리고 고향을 지키면서 남을 기쁘게 하다보니 자신의 등이 휘어 버린 마을주민들을 위하여 새로 들여놓은 노래반주기 앞에서 한바탕 어우러져 놀다 왔다. (200자 원고 11.1매 2007년 12월 22일)

[코트 박기옥]

고개가 꺾이는 이야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