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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강성의 근원, 개마무사를 찾아서!!!
우리에게 있어 가장 자랑스러운 국가를 꼽으면 주저없이 고구려를 꼽을 것이다.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중국의 중심지인 북경 일대 등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게다가 중국과의 거듭된 전쟁에서 승리하고, 거대제국 수와 당과의 대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북방의 패자(覇者)임을 실력으로 입증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구려하면 가슴이 뛰고 벅차오름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대륙을 호령하면서 사상 최대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가 중국과의 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고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중국은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기 이전에 수많은 국가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맹멸하였다.(춘추전국시대) 더욱이 유비, 관우, 장비로 유명한 삼국지에는 각 전투에 맞는 병술과 병법이 등장할 정도로 중국은 전쟁에 관한한 탁월한 전술을 비축하고, 이를 상황에 맞게 운용할 수 있는자산을 갖추었다. 게다가 중국은 어느 나라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장병을 동원할 수 있었다. 고대 전쟁에서는 장병의 수가 승패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함에도 고구려가 중국과 맞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중국을 공략할 수 있었던 건 고구려가 앞선 철기 문명으로 동 시대 다른 국가에 비해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중국보다 우수한 철의 산지를 보유했다. 고구려의 중심지 요동의 철산지는 중국의 그것보다 우수하고 탁월했다. 게다가 고구려는 북방민족 실위에 철을 수출할 정도로 철이 많았다. 고구려가 강력한 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바로 이 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고구려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개마무사(鎧馬武士)다.
개마무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동천왕조에 보인다.
"왕은 보기병 2만을 인솔하여 비류수 위쪽에서 방어하며 적 3,000명을 죽였다. 철기(鐵騎) 5,000을 인솔하여 적을 토벌하였다"
윗 구절의 철기가 바로 개마무사를 뜻한다. 개마무사는 말에 갑옷을 입히고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이르는 말인데, 이들은 모두 강철 갑옷으로 무장하고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하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말을 달린 탄력까지 합하여 적에게 돌진하였는데 마치 오늘날의 탱크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드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고구려가 이를 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철기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음과 아울러 경제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개마무사를 중국에서 운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고구려에 비해 중국은 이들을 운용할 제철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던 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차산 제4 고구려 보루에서 출토된 철기를 금속학적 미세조직으로 분석한 결과 연철을 가지고 제련한 침탄제강법과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관강법으로 강철을 만들었다. 이는 고구려에서 고대 제철 기술의 양대 산맥으로 볼 수 있는 두 가지 제강법은 물론 이들을 토대로 하는 다양한 제강법을 통해 각 제품에 알맞은 철기를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고굴의 도자적인 제철 기술로 여러가지 철기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고구려의 철기 문명 수준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중국보다 앞선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는 한나라에 철기군이 등장하는 모습은 실제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무시한 채 우리 민족이 중국 한족에 비해 문명 수준이 뒤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비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삼국사기 동천왕조의 철기 5000을 운용하려면 철이 얼마나 필요할까? 개마무사 1인당 말 갑옷 최소 40kg, 장병의 갑옷 20kg, 기타 장비 10kg을 휴대한다해도 최소한 70kg의 철이 소요된다. 이런 식으로 5,000명을 무장시키려면 단순한 수치로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염두에 둔다면 최소 500여 톤이 있어야 한다. 1,800년전에 500여톤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제출기술이 있었기에 고구려는 실위에 철을 수출할 수 있었고, 개마무사를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마무사는 광개토태왕의 남해안 대전과 고수대전에서 그 활약을 볼 수 있다. 399년 가야가 왜와 연합해 신라를 치자, 신라의 상국(上國)인 고구려는 구원군을 보낸다. 그런데 가야는 이때 개마무사를 운용하고 있었다. 부산시 복천동 10호 고분에서 출토된 말 안면갑인 마주의 발견은 가야 역시 고구려와 유사한 철기군을 보유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가야의 개마무사를 격파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전투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술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의 개마무사가 판갑(큰 철판을 앞뒤로 이어 몸을 둘러쌈, 중기병)을 착용한데 비해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찰갑(피갑:가죽에 쇠를 덧씌운 것, 중갑기병)을 착용하였다. 찰갑은 창검에 비해 방어력이 떨어지지만 기동력이 뛰어나다. 고구려는 이 기동력을 잘 살리고, 중국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술을 바탕으로 가야의 판갑 개마무사를 무력화시켜 크게 승리하여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얻을 수 있었다.
개마무사의 위력은 고구려와 수나라가 맞부딪힌 고수 국제대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13만이나 되는 대군을 거느린 수 양제는 석 달이 넘도록 요동성 하나 깨뜨리지 못하자 우문술, 우중문에게 30만 별동대를 주고, 내호아로 하여금 따로 4만의 수군을 운용하게 하여 패수로 향하게 하였다.
내호아에 의해 고구려 수군이 격파되고 수나라 수군이 평양 외성까지 육박해들어올 때 고구려 영양태왕의 동생 건무가 이끄는 개마무사 500여 명이 수나라 수군을 격멸하였다. 개마무사 500명으로 구성된 결사대가 4만이나 되는 적을 격파한 것을 보면 개마무사가 지닌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개마무사의 활약으로 고구려는 패수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전략상 차질을 가지고 오게 되었고, 수나라 수군이 육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을지문덕은 보다 쉽게 수나라군을 몰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살수대첩)
그럼 개마무사는 어느 시기에 등장했을까? 문헌상의 기록을 근거로 하면 3세기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개마무사의 등장 시기에 대한 견해는 각각 다르다. 이인철 박사는 동천왕의 철기병을 근거로 3세기 중반에 개마무사가 출현하였고, 진정한 의미의 개마무사는 광개토태왕 대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그는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 중국에 쇠뇌의 보급이 늘었기 때문에 쇠뇌에 제압되지 않으려고 개마무사로 무장했다는 견지를 펼쳤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가 낮은 무장 수준, 특히 쇠뇌 조차 만들지 못할 정도였다는 설명으로 말이 안되는 논리이다. 이미 고조선에서 쇠뇌로 무장한 예가 있는 것으로 볼 때도 말이다.
여호규 박사는 고구려 개마무사의 기원을 3세기가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 그는 고구려 중장기병의 기원을 북중국이나 선비계 국가로 찾고 있다. 312년 선비족의 단부가 개마 5,000필을 보유했다는 기록을 그 근거로 든다. 하지만 이는 선비족이 고구려의 부용 국가(속국)였다는 기록을 무시한 결과이다.
『삼국사기』 유리명왕 11년조를 보면 고구려가 선비를 격파하여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선비족은 고구려의 세력 하에 고구려와 함께 후한을 공략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 같은 종족에 대해서는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 그들 고유의 생존 영역을 비호, 보장해주는 대가로 그들에게서 노동력과 병력을 확보하였다. 이는 공납적 수취관계에 기반한 속민제도 또는 이종노예제인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바로 이러하였다.
개마무사로 무장하려면 막강한 경제력과 철갑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족인 선비족에게는 그러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있다면 바로 농경국인 고구려에 있다. 고구려의 부용세력인 선비족이 개마무사를 보유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이들에게 개마를 공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중국을 공격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맞서 싸울 전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중국을 수시로 선공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차대왕은 중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했을 정도이다. 고구려가 동방의 강국으로 중국을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었던 것,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수립하여 중국에 맞서 대륙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구려의 숨은 힘 개마무사가 있었고, 그런 개마무사를 육성할 정도로 고도의 제철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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