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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있어 존재하고 소멸하는 생명들에 대한 헌사
--권예자의 시세계
김명원(시인, 대전대 교수)
몸을 이성의 종속물로 비하했던 시각은 탈근대화의 담론에서 경계가 사라지거나 혹은 몸을 정신과의 일체 구조로 보거나 우위에 둠으로써 활발한 문학적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이는 1980년대 현상학과 후기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철학이론과 사회이론에서 배태되었으며, 서구 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정신/신체’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 영혼 중심의 주체성 개념에 신체성을 개입시켜 이원론적 사고를 해체 시키려는 노력이었다. 몸, 혹은 신체 담론이 인문 사회과학에서 논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메를포 퐁티를 주목해야 한다.
메를포 퐁티는 모든 외부적 지각은 즉각적으로 신체에 대한 지각과 동일한 것이며 신체 이미지 이론은 암묵적으로 지각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신체를 통해 세계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우리가 신체로 세계를 지각하는 한,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에 대한 경험을 다시 각성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체와 세계와의 접촉을 재시도함으로써 자신을 재발견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 신체로 지각하므로 신체는 자연스러운 자아이며, 다시 말해 지각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즉 우리의 감각은 몸과 동떨어져서 기능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처럼이성에게 억압되어 왔던 몸은 서구 근대성에 잘못된 길을 입안하였으나, 그 후 현상학과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몸에 대한 담론은 정신과 신체를 동시에 수렴하는 것으로, 이원론에 입각하여 세계를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근대의 논리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등을 비판하고, 이러한 타자를 배척한 많은 중심주의들에 의해 피억압기제로 있었던 것들을 귀환시켜 존재성을 정립하게 되었다. 몸은 분열이 아닌 통합의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몸의 정치가 상호 관계에 미치는 내재성 내지 전체성을 정립하려는 운동에 있어서 중심 담론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당연히 남성중심주의에 억압되어 있던 여성의 몸에 대한 발견과 해방이라는 정치 철학으로 부상되면서 신체를 강조하는 페미니즘 운동으로 연결되어 활성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이리가라이는 ‘전신적 기쁨(jouissance)’이라는 단어를 중시하며, 전신적 기쁨이야말로 신체 페미니즘의 미르바나 원리인데, 이것은 여성적인 살이 자연의 순환적인 리듬과 공명하고 일치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여성과 자연은 동일한 육체의 달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생태철학을 구현하게 된 신체 페미니즘의 이리가라이는 여성적 글쓰기를 주장한다. 그녀는 차이(diffrerence)의 개념과 감촉(tactility)의 감각이 서로 얽히고 보완하는 역동적인 글쓰기를 피력하며 여성에게 주어진 몸과 창작에 주목하고 찬양한다.
권예자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신체 페미니즘을 구현하여 정신과의 관계에서 밀려 난 신체에 대한 심오한 성찰과 함께 자연과 여성의 몸에 대한 상관성을 긴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외부적으로 감지되는 지각은 즉각적으로 신체에 대한 지각과 동일한 것이며, 또한 몸에 대한 물성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죽음이라는 삶의 종말을 통해 철학적인 사유에 가닿는 시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다
요리에 대해
노래에 대해
찾아야 할 어떤 것에 대해
새로움은 늘 생각의 바깥이었다
정해진 틀 속,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주변의 변화에 맞춰 자연스레 돌고 돌았다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더러 칭찬도 받으며,
속으로 흐느낀 저녁들
그날들엔 이유 모를 눈물도 있었다
코다리 냉면은 누가 만들었나
코다리는 누가 잡았나
식당의 손님들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코다리가 궁금해지는 시간
무슨 인연으로 이 코다리는
그녀 안에 제 찢어진 시신을 부리는지
그녀는 왜 그의 묘지가 되어야 하는지
일면식도 없던 코다리와 그녀 사이에
왜 왜 왜? 가 생겼다
아무렇지 않던 일들에
불쑥 제동이 걸리는 저녁
말린 코다리보다
그녀가 더 말라 있진 않을까
왜? 왜? 에 하얀 시트가 스르륵 덮인다
죽은 건 코다리
그녀는 아직 숨 쉬고 있지만
- 「코다리가 궁금한 시간」 전문
현대인들이 자행하고 있는 삶은 반복되는 익숙함 속에 함몰되어 세세한 삶의 본질을 생각하거나 근원적인 질문을 잊는 양상인지도 모른다. 톱니바퀴처럼 주변의 변화에 맞춰 자연스레 돌고 돌았던 화자의 삶은 산업화라는 기계적인 구조 속에서 개인의 자동화된 무력함을 그대로 직시한다. 더구나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는 고백은 수동적으로 살아온 일상으로 인한 자각의 부재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에 시 「코다리가 궁금한 시간」은 바로 이 번복의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치던 코다리 냉면을 통해 내면 깊숙이 잠재된 몸을 가진 생물과 그 생물을 먹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오랜 기간 습관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오다가 코다리 냉면을 두고 ‘코다리의 몸’과 ‘그녀의 몸’ 사이에 생성된 ‘왜?’라는 질문에 의해 태홀怠忽의 균열을 경험하게 되고, 그 순간을 포착해 내고 있는 것이다.
시의 1연에서 시적 화자는 요리나 노래, 혹은 주변 사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 타성에 젖는 일과에서 사물들은 더 이상 질문의 대상이 아니고, 그녀 역시 그러한 사물에 습관적으로 대응하는 자동적 존재자였다. 그러나 화자는 어느 순간 코다리 냉면을 접하며 갑작스러운 인식의 변화를 경험한다. 코다리는 누가 잡았는지, 무슨 인연으로 코다리는 그녀 안에 제 찢어진 시신을 부리는지,그녀는 왜 그의 묘지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은 궁금함을 넘어, 자신이 외면하고 있던 감각과 상실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코다리는 더 이상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다. 생물의 죽음을 무심히 소비하는 인간의 삶을 돌아보며 의식 없이 살아온 자아를 비판하는 검열의 대상으로 기능한다. 폭력적인 살의가 농후한 ‘찢어진 시신’이나 주검을 지칭하는 ‘묘지’와 ‘하얀 시트’ 등의 표현은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엄정한 논리를 가열하게 제시하여 말린 코다리보다 그녀가 정서적으로 더 말라 있었음을 간파해낸다. 시의 마지막 연에서 죽은 건 코다리이고, 죽은 코다리는 먹은 그녀는 아직 숨 쉬고 있다는 대비를 통해 이 시는 일상의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문득 발견해 낸 실존의 문제와 몸을 지닌 생물들의 비극성을 아프게 묘파하고 있다.
아무리 침묵을 가르쳐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평생 굽힌 적 없었다며
길고 반듯이 누운 꽁한 족속
짭짤한 소금기로 무장하고
죽어서도 제 짝을 백허그하는
고등한 족속
참숯화로에 나란히 누웠거나
시큼한 묵은지에 덮혀 있거나
칼칼한 양념 무에 올라앉아도
사방팔방 비릿한 소리를 띄우는
요란한 족속들이 있다
나는 이제 두 번째 죽는다
죄도 없이 두 번이나 죽는다
등 푸른 것들 요란스럽다고
하얗게 눈 흘기다가 울컥 목이 멘다
유언 한 마디 못 전하고 쓸쓸히 떠난
자식 자랑에 침이 마르던 독거노인
그 어르신 생각이 나서
- 「등 푸른 것들의 유언」 전문
시 「등 푸른 것들의 유언」은 낯익은 사물을 매개로 하여 몸을 가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끌어내고 있다. 시적 화자는 참숯화로에 나란히 누웠거나 시큼한 묵은지에 덮혀있거나 칼칼한 양념 무에 올라앉아 인간의 식탁에 헌납되는 꽁치나 고등어와 같은 등푸른 생선들을 꼼꼼히 관찰해간다. 최종포식자인 인간에게 먹히는 등푸른 생선들은 평생을 굽힌 적 없이 식탁에서도 길고 반듯이 누워있는 자존적인 존재이다.
시인은 ‘등푸른 생선’을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단일 존재의 흔적을 지닌 주체로서 재현해 내고 있다. 등푸른 생선 자신이 살아낸 정체성대로 사방팔방 비릿한 소리를 띄운다는 것은 죽어서도 자신의 삶, 그 증거의 시간들을 당당하게 표명함이며, 죽어서도 사랑의 실천력으로 제 짝을 백허그 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 동지애로 함께하고자 하는 연대, 즉 아름다운 확장적 생의 의지를 내시한다.
그럼에도 시의 3연에서 반복되는 “나는 이제 두 번째 죽는다/ 죄도 없이 두 번이나 죽는다”라며 등푸른 생선이 내는 직접적인 목소리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인간에 의해 한번 죽임을 당하고나서 보존되었다가 다시금 여러 조리법에 의해 또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비정한 절규인 탓이다. 인간에 의해 어획되고, 다시금 그 인간을 위해 여러 요리 방식으로 먹혀야 하는 슬픈 운명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두 번이나 죽음을 당하는 등푸른 생선의 암담한 비애가 스며드는 순간이다.
이는 시의 마지막 연에서 유언 한 마디 못 전하고 쓸쓸히 떠난 독거노인을 떠올리고 목이 메는 화자의 심경이 드러나면서 반전이 발생한다. 인간에 의해 두 번이나 죽는 등푸른 생선은 오히려 두 번 죽을 때조차 비린내라는 자신의 향취를 노골적으로 요란스럽게 드러내지만,유언도 못 한 독거노인의 죽음이 대조되기 때문이다. 인간도 등 푸른 생선도 모두 몸을 가지고 있기에 각자의 삶이라는 명분과 의지를 가지고 살아내야 하며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때 몸은 더 이상 단지 육체적인 외양이 아니라, 생의 고통과 기쁨을 내장한 서사가 된다.
시인은 침묵을 가르쳐도 자신을 드러내며 자기 증명을 끝끝내 해내는 등푸른 생선과 살아서는 자식 자랑에 침이 말랐지만 유언 한 마디 못 전하고 쓸쓸히 죽은 독거노인을 극적으로 비교하면서 몸을 가진 생물로서의 죽음들을 통해 몸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기억하게 한다.그렇다면 두 번의 죽음에서조차 주체적인 등푸른 생선은 고등어의 언어유희이기도 한 고등 족속이고, 홀로 저속低俗하게 죽어간 독거노인은 저등 족속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 이 시의 놀라운 통찰이 숨어있다.
몸을 가지고 있기에 견지해야 할 숙명적인 질병과 고통을 내포한 시들로는 아래의 시들이 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 더위에 지친 내 몸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콧속에 진입해 훌쩍훌쩍 시위를 시작하더니, 막힘없던 목구멍에 콜록콜록 제동장치를 달고, 거들먹거리던 머리까지 지끈지끈으로 동여맸다.
애초에 내가 부르려던 이름 하려던 말들이 보이지 않는 화살표를 따라 죽죽 미끄러지고, 생각의 속살이 자꾸 감춰지는 건, 분명 저 침입자의 요사스러운 잔재주 때문이다.
아파트 앞 내과에 들러, 최신형 반격 무기를 엉덩이에 장착하고, 깐깐한 의사의 잔소리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과로하면 안 돼요. 식사 거르지 마세요. 푹 주무시고 약도 잘 챙겨 드세요.
그는 도대체 어디에 숨었다가 접근했는지, 헐렁한 내 레이더로는 근원지를 알 수 없다. 지끈지끈, 어질어질, 캑캑에 맞서, 따끔한 무기의 성능을 믿으며, 잔소리 한 움큼을 목구멍에 털어 넣는다.
오늘의 실외 온도 37°C.
춥다.
- 「무단침입」 전문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키가 크거나 작거나
덩치가 남산만 하거나 종잇장 같거나
부자나 가난뱅이나
자신을 필요로 하면 주저 없이 출동한다
종교도 도덕도 배운 적 없고
위로라는 말은 입에 올린 적 없지만
누군가 겪는 고통의 성벽을 허물기 위해
거침없이 진격한다
약간의 워밍업은 늘 있어 온 일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스물네 시간
철통 방어막을 세우고 근원을 공격하며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넘어진 상대는 틈을 엿보다
벌떡 일어설지 모르므로
교대 근무조가 올 때까지 빗장을 지르고
빈틈없이 잘 지켜야 한다
그래도 앓아누울 권리는
오직 주인의 것이다
- 「진통제」 전문
몸을 가진 생명체인 인간은 시간의 속도에 거역하지 못하고 노화하며 질병과 맞닥뜨린다. 발병을 하거나 신체에 손상이 있을 때 발생하는 불쾌한 감각적이고 정서적 경험이 통증이다. 우선 발병을 하게 되면 일차적으로 통증이 유발되고, 그러한 통증은 신경계 전체가 관여하는 복합적인 생리적 반응으로서 발병을 인지하게 한다. 결국 통증은 병의 원인을 찾아 치료를 시작하게 하는 지각知覺 경고警告인 셈이다. 이때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약물을 투약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약물이 진통제이고 부차적으로 항우울제나 국소제가 활용된다.
인용 시 「무단침입」 에서 화자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려 더위에 지친 몸을 순식간에 점령당하기에 이른다. 과로하면 안 되고 식사 거르지 말고 푹 자고 약도 잘 챙겨 먹으라는 깐깐한 의사의 잔소리를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화자의 토로는 계속 이어지는데, 어디에 숨었다가 접근했는지, 헐렁한 레이더로는 근원지를 알 수 없지만 몸의 이상변화는 지끈지끈 어질어질 캑캑 등 신체 증상이 음성상징어로 반복되어 고통의 생생함을 고지하고 있다. 이에 맞서 처방약 한 움큼을 목구멍에 털어 넣는다고 해도 쉽사리 여름감기가 진정되지 않을 듯한 예감은 시의 결미에 단호히 드러난다. “실외 온도 37°C”지만 “춥다”는 아이러니한 결말은 육체적인 냉기뿐 아니라 심리적 고립감까지 암시하며 자신의 몸이지만 통제되지 않는 질병의 현주소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또 하나의 인용시 「진통제」 에서 주제어 ‘진통제’는 단어의 풀이 그대로 중추 신경에 작용하여 환부의 통증을 억제하는 약이다. 시인은 이 진통제를 인간이 자행해 온 반윤리적인 행태에 비견하여 얼마나 훌륭한 성정을 지녔는지를 시의 첫 연에서부터 설파하고 있다. 키가 크든 작든 덩치가 남산만 하거나 종잇장 같거나 부자나 가난뱅이거나 외양 여부, 재력 차이 등 가리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면 주저 없이 출동한다는 유쾌한 서술을 통해 만인에게 차별 없이 평등하게 작용하는 진통제의 헌신적인 보편성을 강조한다. 얼마나 모범적이고 존경스러운 진통제인가.
이어 종교도 도덕도 배운 적이 없고 위로라는 말은 입에 올린 적이 없지만 누군가 겪는 고통의 성벽을 허물기 위해 거침없이 진격한다는 시의 2연은 다시금 인간의 복잡다단한 성장 배경에 준하여 진통제가 가진 단순한 기질을 강조하며 활동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로지 고통을 줄이기 위해 충실한 진통제의 실천력을 역설하는 부분이다. 시의 3연과 4연에서는 진통제의 성실성이 두드러진다. 짧게는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스물네 시간 동안 교대 근무조가 올 때까지 철통 방어막을 세우고 근원을 공격하며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진통제의 통증 경감을 위해 책임감 넘치는 태도는 가히 압권이다.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침투하는 진통제와 발병한 인간의 상호연결성이 유려하게 전개되다가 시의 마지막 연에서 절망이 발생한다. 몸이 있어서 발병을 하게 되는 인간의 생리와 병든 몸에만 투약되는 약물 사이에서 그들의 결곡한 관계가 깨어 지기 때문이다. “앓아누울 권리는 오직 주인의 것”으로 몸을 지닌 인간 대신 몸이 없는 진통제가 대신 아파해 줄 수 없다는 극적인 한계를 오롯이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에 견주어 출중한 성품의 진통제라도 환자를 위한 보조적인 수단일 뿐 환자를 대신해서 앓아누울 권리가 없다는 비감은 몸이 있어 감각하는 인간의 고통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평생을 두고 해온 일은
자신을 천천히 구겨버리는 일
도를 넘는 차별은 도르르 말아 품에 넣고
보이지 않는 압력 앞에
얇게 엎드려 부피를 줄였다
가끔은 바른말도 해보고
정의로운 자의 편도 들어줬지만
결과는 늘 강한 자의 뜻대로 정해졌다
그럴 때마다 보일 듯 말 듯
제 몸에 그려 넣은 상처의 습작들
눈가와 입꼬리에 잔물결로 번지다가
이마에 가로줄 죽죽 새기고
사이사이 세로줄 섬세히 그렸다
이제 앞으로 나아갈 일도
돌봐야 할 꽃과 나무도 없는 나이
무심히 고개 든 엘리베이터 거울 속
평생 습작한 작품과 눈이 딱 마주친다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웃음 반 울음 반
우글쭈글 어색한 작품 한 점
- 「습작, 작품이 되다」 전문
시 「습작, 작품이 되다」는 이번 시집 중에서 감동적인 수작 중 하나이다. 자아 성찰의 깊이가 이보다 더할 수 없으리만치 시인의 생애를 처절하고도 애틋하게 응축해낸 내면적 ‘자화상 시’인 까닭이다. 어느 날 문득 화자는 무심히 고개 든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살아온 세월이 이미 넘치도록 길었기에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일이 없다는 자조적인 체념은 돌봐야 할 꽃과 나무도 없는 나이임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활동력이 저조한 나이 든 화자의 현재를 표출한다.
가끔은 바른말도 해보고 정의로운 자의 편도 들어줬지만 결과는 늘 강한 자의 뜻대로 정해졌기에 약자의 진실이 외면당하는 냉혹한 현실 인식 앞에서 자포자기했던 자신의 얼굴로 이어진다. 단념의 순간마다 보일 듯 말 듯 몸에 그려 넣은 상처의 습작들은 눈가와 입꼬리에 잔주름으로 번지다가 이마에 가로줄 주름을 새기고, 그도 모자라서 틈 사이사이의 세로줄 주름을 섬세히 그렸다고 토설하게 된다. 주름들은 지나간 생애와 축적된 세월을 몸에 새긴 흔적으로서 인생의 굴곡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차별을 당하거나 목도했다고 해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보이지 않는 압력 앞에서 얇게 엎드려 부피를 줄였다는 묘사는 자존심을 낮추고 다소 비굴하게 생존해 왔던 삶의 방식을 가감 없이 내보인다. 그렇기에 화자는 생을 두고 해온 일은 “자신을 천천히 구겨버리는 일”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른다. 차별에 저항하고 항거하는 자아를 방기하고, 사회적인 절대 권력이나 억압 앞에서 무력하게 방치된 자기 연민과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사회 정의와 실제 현실의 괴리를 체험한 화자의 무력감은 시의 말미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바로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웃음 반 울음 반”의 “우글쭈글 어색한 작품 한 점”이 바로 화자의 자화상으로 완성되는 연유이다. 거울 속 화자의 자화상에 독자들의 얼굴이 겹치며 투영되는 순간, 각자 자신들이 살아낸 세월이 중첩되면서 인간관계라는 사회적 상호작용 내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 집단 속 자아정체성을 자문하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 사이에서, 혹은 사회라는 규범 내에서 나의 처소는 어디인가? 나는 잘 살아온 것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의 근원적인 질문을 독자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살아온 생의 집적은 자신만의 역사가 된다.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기에, 그리고 돌이켜 복기하고 수정할 수 없기에, 매번 실수하고 좌절하고 다시금 용서하며 화해해 간 모습 그대로가 빛나는 자신만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시인은 독자들을 위로하기에 이른다.
찾아가야지만 마주하게 되는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윤동주는 시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고독하게 탐색하였고, 유안진은 시 「자화상」에서 허공 속 자신을 구름의 딸이자 바람의 연인이라고 자연에 빗대어 드러냈다면, 권예자 시인은 생활의 도구인 ‘엘리베이터 거울’이라는 일상속에서 마주치는 매개체를 통해 어디서나 언제나 자기 검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여기에 권예자 시인의 자화상이 그 어떤 기존의 자화상 시들보다도 위대하며, 권예자 시인의 자화상이 당장 지금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각자의 자화상을 그려보도록 일깨우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하루도 빠짐없이 먹는 밥
쌀밥, 잡곡밥, 김밥, 주먹밥
한 생을 밀고 가는 여러 가지 밥
때론 감자, 고구마, 채소도 밥이었다
동행과 걸음을 맞추려
속이 쓰려도 먹는 밥
어둠 속에 웅크리고 먹는 콩밥도 있다
누군가는 진수성찬으로
누군가는 눈물에 말아 먹는다
더러는 죽지 못해 씹기도 하는 밥
어떤 밥이 완성되기까지
평생이 걸리기도 하고
밥솥에 전기 꽂기보다 짧기도 하다
지겹다, 지겹다 하면서도
너에게 꼼짝 못 하는
나도 밥이다
- 「밥」 전문
밥은 액면 그대로 생존을 위해 섭취해야 하는 수단이자 매일 매번 누군가를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 공급원이라는 측면에서 삶 자체이거나 사랑이라는 속성으로도 환치된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먹는 밥이라는 가장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인간 삶의 복잡다단한 양상을 점층적이고 다층적으로 풀어낸 작품이 시 「밥」이다. 그렇기에 인용시 「밥」에서 ‘밥’은 단순한 음식뿐만이 아니라 삶의 지속성과 인간관계를 상징하는 핵심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다.
시에서 밥은 쌀밥, 잡곡밥, 김밥, 주먹밥 등 여러 밥이 있으며, 감자 고구마 채소 등 대체재로서의 밥도 있다고 나열된다. 밥의 다채로운 종류는 다시금 생애의 속성상 다양한 밥의 역할로 확산된다.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맞춰가야 하기에 동행과 속이 쓰려도 먹는 밥이 있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먹는 콩밥도 있음은 감옥이라는 소외 공간의 밥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는 진수성찬으로 먹고 누군가는 눈물에 말아 먹기도 하고 더러는 죽지 못해 씹기도 하는 밥이라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도 밥이 지닌 평등한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각해 낸다.
이러한 밥은 죽기 전까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화자는 밥을 인생으로 비유하며 어떤 밥이 완성되기까지는 평생이 걸리기도 하고, 평균 수명 보다도 일찍 하직해야 하는 생을 지칭하여 밥솥에 전기 꽂기보다 짧기도 하다고 표현한다. 이어서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지겹다 하면서도 “너에게 꼼짝 못 하는 나도 밥이다”는 선언은 밥은 곧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소모되는 희생적 존재이자 무조건적으로 공여되는 사랑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문화에서 밥과 인간관계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밥을 먹자는 청유는 단일한 식사 행위를 넘어서 관계 형성이나 관계 유지의 실천으로 작동하며, 정효구가 발음의 유사성으로 기술한 바대로 밥(Bob)을 먹기 위해서는 잡(Job)을 구해야 하는 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밥심, 밥줄, 밥값 등의 표현들이 많듯 밥과 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등가적 연관어임이 확인된다. 더불어 밥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이 집약된 문화적 기호이자 삶의 근간을 이루는 헌신이라는 점에서 사랑 그 자체가 된다. 시인은 이런 다각적인 메시지를 이 시에 밥처럼 꾹꾹 눌러 담아내고 있다.
비닐 막 아래 구부정한 그림자
오일장의 끝자락
할머니의 하루가 길게 누워 있다
좌판에 먹을 것 그득해도
종일의 허기가 신호를 보내온다
점심인 듯 저녁인 잔치국수 한 그릇
허겁지겁 빨아들이는 국숫발 사이
근심 몇 가닥도 함께 욱여넣는다
내일의 생활비
뒤틀린 무릎의 통증
대책 없는 불안도 억지로 삼킨다
빛나던 시절을 지나 하얗게 바랜
누군가의 어머니 또 어머니의
목구멍을 타고 넘는 허름한 식사
서쪽 하늘이 붉게 젖는 폐장 무렵
소리 없이 철수하는
한 생의 그림자
- 「폐장 무렵」 전문
시 「폐장 무렵」은 좌판대에서 물건을 파는 노인의 고단한 삶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는 오일장의 끝자락에서 비닐 막 아래 구부정한 그림자로 앉아 있는 할머니와 마주친다. 그 할머니는 좌판의 먹을 것들이 그득해도 오직 판매를 위해 종일 허기를 견디며 점심인 듯 저녁인 잔치국수 한 그릇을 허겁지겁 빨아들이고 있는데 국숫발 사이 근심 몇 가닥도 함께 욱여넣는 모습이라는 묘사에는 시인의 애잔한 연민이 들어있다.
내일의 생활비와 뒤틀린 무릎 통증이며 대책 없는 불안도 억지로 삼킨다는 시의 3연은 이 시의 정점으로 노인의 고통을 참아내는 의지와 고독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어두운 현실에의 목도이자 더 어두울 미래를 시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시의 변환을 도모하는 4연에서는 할머니의 과거가 회억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빛나던 시절”이라는 구절이다. 모두에게 빛나는 청춘은 있었을 것이다. 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젊음과 변색 되지 않을 듯한 꿈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어머니”라는 가족 내 어머니로서의 뜨거웠던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하얗게 바랜, 지난한 세월이 길게 누워 있던 하루를 접고 폐장 무렵 소리 없이 철수하는 한 생의 그림자인 할머니는 시의 말미에서 무기력해 보인다. 그런 할머니의 배경으로는 서쪽 하늘이 붉게 젖고 있어 이 시를 더욱 색조 대비로 인한 애상스러운 장면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서 누군가의 어머니라는 모성 역할로서의 할머니가 견뎌냈을 세월의 아득함이 전해지며, 신체 페미니즘을 구현한 여성적 글쓰기로서의 권예자 시인의 따스하고도 섬세한 눈길이 드러나는 것이다.
난생처음
딸기를 깎다가 울컥,
과도를 떨어뜨린다
놀랍고 놀라워라
하얀 살 가득 빼곡히 새겨진
작디작은 큰 상처
심장에서 뻗은
길의 촉수가 가리키는 곳
새까만 씨앗 촘촘히 맺혀있다
무른 살 다독여 길을 내고
길 끝에 무기와 후손을 장착한
저 딸기의 모성애
대학병원 암 병동의 25시
구부정한 어깨 아득바득 세우고
단 한 곳으로만 촉수를 뻗는
어머니, 어머니들
병상의 그림자 아래 웅크린
환자보다 더 아픈
- 「딸기를 깎다가」 전문
화자는 난생처음 딸기를 깎다가 울컥하는 감정의 파고를 감지하며 과도를 떨어뜨린다.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감정적인 충격으로 불안정한 심리가 발현하게 된다. 하얀 살 가득 빼곡히 새겨진 작디작은 큰 상처를 발견해서인데 심장에서 뻗은 길의 촉수가 가리키는 곳에 새까만 씨앗들이 촘촘히 맺혀있는 연유이다. 무른 살 다독여 길을 내고 길 끝에 후손을 장착한 딸기의 모성애에 눈길이 가닿는 순간 시인은 시의 현장을 ‘딸기’에서 ‘대학병원 암 병동’으로 옮겨 조명해 낸다.
암 병동은 난치병인 암을 치료하면서도 치료가 불가능할 경우 죽음이 공존하는 냉혹한 공간으로, 환자와 보호자의 극심한 고통이 감지되는 장소이다. 하루도 모자라 25시를 견인하는 구부정한 어깨 아득바득 세우고 단 한 곳으로만 촉수를 뻗는 환자 보호자인 어머니들과 딸기 씨앗들이 포개지면서 병상의 그림자 아래 웅크린 환자보다 더 아픈 그들의 속내를 관통하고 있다. 바로 ‘모성애’라는 단어가 지닌 엄중한 사랑의 무게를 딸기 속에 산재한 검은 씨앗들과 암병동에서 자식의 삶을 지켜내려는 어머니들로 함께 짚어내려는 의도인 것이다.
모성애는 어머니 사랑이라는 단순한 뜻풀이를 넘어서 조건 없는 헌신이라는 자장을 지니며, 자식을 위해서 무어든 할 수 있는 강한 본능을 함의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생물들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기도 하며, 문학적이나 사회심리적으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모든 생물들은 존재근거로서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태어나 생명이 존속되었으며 무한한 성장을 실현해 왔을 터이다. 그러한 모성애를 시의 터전으로 삼아서, “살은 물러도/ 씨는 단단한 딸기”를 “불임을 앓는 이웃 새댁”에게 “기도를 담아 건네고 싶다”는 시 「빨갛게 물든 하루」를 통해 시인은 불임을 겪는 여성에게 딸기로 전달하려는 잉태의 희망을 담아낸다. 긍휼한 모성애의 눈길로살아온 시인의 시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겨운지를 확인하는 부분이다.
수잔 그리핀이 “우리는 여성이고 자연이다”라고 여성과 자연이 동질임을 표명하며 남성들은 자연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지만 여성들은 들을 수 있다고 확언하였듯이, 권예자 시인은 이번 시집의 도처에서 자연과 여성 간의 상보적인 관계를 상정하는 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인용한 시들 외에도 만찬장에서 때 빼고 광내고 나체로 누워 있는 광어의 유언(「광어의 유언」)을 말하게 하거나, 쭉 뻗은 몸매 날카로운 입매로 바다의 칼이라 불리던 갈치도 진짜 칼 앞에서는 속수무책임을 간파(「제주 은갈치의 꿈」)해 낸다.
동물에서뿐 아니라 식물에서도 자연과 여성의 연결성은 드러나는데, 몸을 열면 고여 있던 투명한 슬픔이 당신을 적실지도 모른다며 슬픔이 가득 차 있어 살이 무른 수밀도는 화자와 동일시(「수밀도」)되고, 요양병원 창문 안으로 줄줄이 누워있는 희미한 백일홍 물결(「지지 않는 백일홍」 ) 에서요양병원 환자들과 백일홍이 겹쳐진다. 이에 더 나아가 자연물에서도 여성 신체와의 동일성 회복은 이어진다. 어둠 저편에 맨발로 서서 제 몸을 씻어 무지개로 피어나는 그녀(「짝사랑이 길다」)인 노을이 등장하기도 하고, 불 밝힌 점 하나 환하게 타고 있는(「그믐을 건너는 달」) 달이 직접적인 언술로 출현하기도 한다.이렇게 자연의 몸과 여성의 몸을 연결하여 몸의 지각을 통한 세계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구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몸을 지니고 태어나 성장하고 노화하며,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도 이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몸은 단순히 생존을 증명하는 생물학적 기제가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숙명과 함께 시간의 한계를 품고 있는 실존의 그릇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스스로를 자각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와 접속하고 이별한다. 태어나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랑하고, 출산하고, 죽는 모든 행위는 몸이라는 물질적 조건 위에 놓인 다양한 삶의 층위들이다.
즉 삶은 몸을 기반으로 한 끊임없는 섭생의 과정이자 존재의 전제여서 몸이 있기에 우리는 복합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몸으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인간 존재가 지닌 본질적인 모순이며 끊임없이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몸을 영혼과 하나인 목적 실현의 수단으로 보았으며,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 정의했다. 그들은 몸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과 유한성에 주목한 것이다.
권예자 시인은 이번 시집으로 몸에 대해 정치한 사유를 하고 있고, 죽음을 자각함으로써만 삶을 깊이 있게 인식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시에서 발견하게 되는 아들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항암 주사 부작용으로 눈만 퀭한 사랑하는 둘째의 앙상한 손”(「노란 봄날의 기도」)이라든가“천국으로 떠난 우리 둘째 프란치스코”(「숨결 머무는 자리」)에서 드러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처소에 머물던 자녀와의 결별은 시인에게 가혹하리만치 첨예한 시적 고투를 요구했을 것이고, 몸을 가진 인간이기에 사라져 버리는 운명의 비극이 탄생했을 것이다. 몸은 단순한 물체가 아닌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중심임을 설파하는 지점에, 그리고 유려한 신체 페미니즘의 여성적 글쓰기의 핵심에 권예자 시인의 이번 시집이 값하는 탁월한 시적 성취가 드러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