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죄 용서를 간구하는 이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___마 6:12
여기서 '죄'의 원어를 보면 '빛'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란 하나님께 빚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하나님께 내 빚을 탕감 받았으니 나도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결단의 고백입니다.
죄 용서를 날마다 간구하는 것은 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합니다.
오늘날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의 대부분은 죄에 무감각해진 때문입니다.
죄가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또 내 죄가 타인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들 죄짓는데 어떠냐는 것이지요.
물론 크리스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서 받은 죄인,
용서가 필요한 죄인,
날마다 죄를 자각하고 죄로부터 돌이켜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죄에 무감각한 죄인과 구별됩니다.
그는 용서 받은 것을 알기에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는 자신이 용서 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관계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 가는 힘입니다.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동력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내가 용서 받는 전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를 자각하지 못할 때부터 용서 받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알고 나서 깨달은 사실입니다(롬 5: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___롬 8:1-2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죄에 민감해집니다.
죄에 민감할수록 아버지 사랑의 깊이를 더 깨닫습니다.
그 깊고 넓은 사랑을 위해 우리가 추구할 것은 더 많은 성취가 아니라 더 맑고 깨끗한 영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용서 받고 용서함으로써 우리가 죄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내가 받은 용서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받았기에,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을 몰아세우지 않겠다는 다짐인 셈입니다.
기도의 목적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끝은 우리가 순간순간 눈앞에 닥치는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___마 6:13
시험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시험(test)과 시련(trial)과 유혹(temptation)입니다. 여기서는 유혹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믿음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그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시련과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시험과 시련은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유혹은 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로 유혹합니다. 심지어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도 유혹하는 손길을 늦추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졸면 당합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당합니다. 그 모든 것이 시험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시험은 겪어야 하고 시련은 이겨 내야 하지만 유혹은 피해야 합니다.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___약 1:12-14
야고보는 시련을 견디라고 독려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나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시험과 혼동하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유혹당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사기꾼들은 이 욕심, 탐심을 기막히게 이용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외할머님이 한 냥짜리 금비녀를 빼주고 파카 만년필 50개를 얻어 오셨습니다. 물론 다 가짜지요, 속이 다 빈 것들인데 집에 와서 큰돈 벌었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1950년대 일인데 지금도 언론에 계속해서 비슷한 일들이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실소합니다.
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바르게 살기 위해섭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을 못 이깁니다. 악을 못 이깁니다. 바르게 기도하지 않으면 잘 살기 위해 기도하고,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기도하다 결국 바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 열심히 해도 바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유혹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악을 못 이기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는 기도는 하면 할수록 내 생각, 내 욕망, 내 나라, 내 뜻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는 기도의 틀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 반드시 이대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칫 이대로만 항상 기도하다가 이 주기도문조차 주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마지막 송영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이 고백은 누가복음에는 안 보입니다. 마태가 이 기도문이 예배 때 사용될 수 있도록 덧붙인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 송영을 기록하지 않았다 해도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하고 반드시이 송영을 드렸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송영을 통해서도 나의 나 된 것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어떤 것인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다음 말씀은 기도의 핵심을 다시 짚어 주시는 예수님의 강조점입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___마 6:14-15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형제와 자매 간에 다투는 것을 보고 타이르는 부모의 심경을 느낍니다. 제발 좀 다투지 마라. 제발 좀 서로 용서해라, 너희들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렇게 으름장을 놓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낍니다.
기도 왜 합니까? 여전히 잘 살기 위해서입니까? 예수님은 바로 살기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살기 위해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하고, 바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고, 바로 살기 위해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하고, 바로 살기 위해 유혹과 악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라고 다 알려 주신 뒤에도 후렴처럼 다시 말씀하십니다. 제발 서로 용서하고 살아라. 서로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서로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것이고, 서로 따지면 지옥을 경험할 것입니다. 서로 잘 살겠다고 기도하면 지옥을 만들 것이고, 서로 바로 살겠다고 기도하면 천국을 이룰 것입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