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문제의 원인은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 경영학 박사이며,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세 학생의 학부모이기도 한 강수돌 교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강제하는 경쟁 시스템과 ‘돈벌이 패러다임’이 오늘날 교육 문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본래 ‘경제’란 돈벌이, 이윤추구, 부자 되기가 아니라 건강한 살림살이 즉 건강하게 먹고사는 것(경세제민)이며, 돈벌이는 살림살이의 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수단인 돈벌이를 위해 목적인 살림살이를 희생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 더보기 교육 문제의 원인은 자본주의 경쟁 시스템
경영학 박사이며,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세 학생의 학부모이기도 한 강수돌 교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강제하는 경쟁 시스템과 ‘돈벌이 패러다임’이 오늘날 교육 문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본래 ‘경제’란 돈벌이, 이윤추구, 부자 되기가 아니라 건강한 살림살이 즉 건강하게 먹고사는 것(경세제민)이며, 돈벌이는 살림살이의 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수단인 돈벌이를 위해 목적인 살림살이를 희생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효율적인 이윤 추구를 위해 사회의 각 구성원·사회·국가 간 경쟁을 부추기고, 보다 많은 이윤을 창출할수록 ‘능력 있는’ 사람·사회·국가로 대접한다.
보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돈벌이 기계가 되어 이윤추구에 매달리고,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대접받으려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한다.
여기서 ‘능력 있는 사람’이란 ‘쓸모 있는 노동력’을 말한다.
아이에 대한, 결국 한 인간에 대한 이런 관점이 교육과 관련된 조직 및 각 개인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강수돌 교수는 학생의 현실, 학부모의 현재 모습, 교사와 학교·교육 관료들의 행동에서 조목조목 찾아낸다
(그러면서 저자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이름부터 고치자고 한다. ‘백년대계’인 교육을 주관하는 부서에 사람을 인격체가 아닌 ‘자원’으로 보는 말을 붙인 발상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비판하며 ‘지금의 학교는 쓸모 있는 노동력을 양산해내는 공장, 교사는 그 공장에서 우수한 제품과 열등한 제품을 골라내는 노동자, 교장은 그 공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관리·감독하는 기업주’라고 단언한다. 다음과 같이 우리의 일생을 분석한 강수돌 교수의 글에서 우리는 그의 단언이 과장이 아니라 현실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탄생과 유아기 성장―눈치보기를 반복 학습하며 터득하는 생존전략
아기를 흔히 ‘사랑의 결실’이라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경제 시스템은 삭막하게도 ‘제2세대 노동력’이라 부른다. 현재의 1세대 노동력이 수명을 다한 뒤에도 그 노동력 자리를 메워서 생산에 종사할 사람이 대대손손 필요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출산율이 현저히 떨어지면 국가는 제2세대 노동력의 확충 차원에서 출산보조금까지 지원한다).
그런데 과연 ‘제2세대 노동력’이란 관점은 단지 이 체제만이 강제하는 것이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랑의 결실’로만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가지면 “우리 애는 남 부럽지 않게 키울거야!” “아가야, 너는 이 부모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식의 생각들을 한다.
바로 이것이 부모들조차 아이를 제2세대 노동력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우다.
아이가 행복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나온 이런 꿈은 사실 아이들이 ‘제2세대 노동력’으로서 경쟁력 있는 노동력, 취업 잘할 수 있는 노동력,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노동력, 돈 많이 벌 수 있는 노동력으로 경쟁력을 지닌 존재가 되라고 소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체제의 논리를 인간 주체가 굳게 ‘내면화’한 것, 이것이 사태의 본질이다.
아이는 세상에 나온 뒤에도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처럼 아무것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부모의 사랑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아이는 시간이 가면서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어른의 칭찬을 받을 만한 행동만 골라하게 된다. 이때 부모가 아이의 순수한 욕구를 그대로 받아주거나 절대적인 사랑을 주지 않으면 아이는 건전한 인격체가 지녀야 할 ‘내면적 자율성’을 충실히 기르지 못하고 외적인 상벌 메커니즘에 종속되기 쉽다. ‘눈치보기’를 반복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아
이들은 이렇게 해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실상의 ‘성과주의’(부모가 원하는 좋은 결과를 내면 칭찬받고, 반대면 벌받는 것)를 체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기의 내면적 욕구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그에 기초해 생각하고 행위하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외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오히려 자기 욕구를 억압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학교 교육 과정―쓸모 있는 노동력을 양산해내는 공장 시스템
이제 아이는 가정을 떠나 학교라는 공간으로 삶의 자리가 이동하게 된다.
앞으로 노동시장에 팔려 나갈 노동력이 체계적으로 육성되는 과정이다.
현재의 학교는 한마디로 ‘쓸모’ 있는 노동력을 만드는 공장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교육 기간 동안 다양한 잠재력과 고유의 꿈을 가진 한 인격체가 아니라 오로지 일개 ‘생산요소’로 축소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 심대한 마음의 상처(트라우마)를 입게 된다.
그러면 기업가에게 ‘쓸모 있는 노동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건강한 신체, 국어, 수학, 영어, 컴퓨터 등 노동능력과 성실성, 책임감, 복종심, 충성심 등 노동자세의 측면이 좋은 노동력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학교 교육 속에서 훈련되는데, 노동능력 측면은 졸업장과 각종 상장 등으로, 노동자세 측면은 개근상, 봉사상, 생활기록부 등으로 측정된다. 본래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가능성(잠재력)을 가진 한 인간이 이런 식으로 일개 ‘생산요소’로서 쓸모 있는 노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좋은 성적과 결과를 내는 학생은 그런 학생대로, 하찮은 결과를 내는 학생은 그런 학생대로 심대한 정신적·심리적 상처를 받는다. 잘 하는 학생은 잘 하기 위해서,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자신을 갈수록 억압해야 하고, 다른 이들의 정서와 감정, 의견과 주장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다.
모든 경쟁 상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라이벌 의식, 자기억압, 그리고 자신의 억압이 고조되면서 쌓이는 보상심리, 때때로 나타나는 친구나 어머니, 선생님 등에 대한 공격성(왕따, 짜증, 폭력 등) 따위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반대로 공부를 못 하는 학생은, 자신의 다른 소질과 재주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대개 만성적인 열등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학교와 가정, 사회 모두에서 학업 성적을 잣대로 대접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든지 행복이 성적순은 아니라든지 하는 말은 익히 알면서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껴안기에는 역부족이다. 세상의 커다란 흐름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은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해 다른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려 하고 그 결과 돌출 행동이나 문제성 있는 행동을 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의 전형적 특징이라는 식으로 오히려 열등의식을 강제당하는 근거가 되기 십상이다.
결국 이들도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열등감에 시달리며 마음속에 커다란 상처가 쌓이게 된다.
노동시장 진출과 노동과정 편입―그대 과연 행복한가?
이런 식으로 오로지 훌륭한 노동능력과 노동자세를 갖춘 노동력이 대량으로 학교라는 공장에서 양성되나, 그 과정 자체가 인간적으로는 일종의 파괴 과정(내면파괴로서의 인간파괴)이다. 이렇게 양성된 노동력은 마침내 취업을 하게 되면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이 노동력은 노동과정이나 관리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상품, 그것도 경쟁력 있는 상품의 생산과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먹고살 수 있는 임금을 받는다.
이제 공장이나 회사에 취직을 한 사람들은, 성장기에 가정과 학교에서 받은 상처들을 보상받거나 치유하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하지만 또다시 성과주의, 생산성주의, 경쟁력주의의 패러다임에 갇힌 채 살아가야만 한다.
자본주의 경쟁 체제가 이런 것들을 강제한다.
이런 것들을 주체적으로 거부할 의사가 없는 한, 그리하여 주어진 체제 속에서 더 높은 곳을 더 빨리 차지하려는 출세 패러다임을 가진 한, 이런 경쟁 체제는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모두에게 더욱 강제된다.
물론 사람마다, 업종마다, 자기 직무마다 나름의 유연성과 운신의 폭이 다를 수는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성격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며 살아가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대개 40년 내외의 직장생활 기간 동안, 즉 자신의 노동력을 노동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긴 시간 동안,
효율성 내지 생산성의 패러다임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나가게 된다.
이제 마침내 돈벌이 경제의 패러다임이나 ‘자원은 유한한데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는 엉터리 가설들, 그리고 ‘경쟁력(또는 일등)만이 살 길이며 생산성 향상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는 식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내면화하고 또 몸으로 직접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일상적 노동과정 속에서 반복적으로 강화된다.
이 속에서 설사 임금, 지위, 복지 수준은 향상되더라도 진정한 삶의 질과 참된 행복은 망가지게 마련이다.
노동력의 효용이 다한 뒤―이렇게 우리는 헛살기 쉽다
그 뒤 60세 전후에 퇴직하면 대개는 마침내 노동시장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지만 이제 남은 것은 병든 몸과 황폐화된 정신뿐이다. 삶의 생동하는 에너지들이 효과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자본에 의해 추출되어졌기에, 이제 ‘노후의 행복’을 위해 여유롭게 여행을 하거나 창작 활동에 종사할 기력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평생 일만 하며 살아왔기에 정년 이후에는 자아상실감이나 허탈감 속에 방황하기 일쑤다.
나아가 20대, 30대, 40대, 50대 등 각각의 시기에 찾아야 했던 행복을 이제 와서 한꺼번에 찾을 수는 없다.
은행 이자와는 달리 우리의 행복은 삶의 매순간마다 찾으며 일상적으로 느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직 팔십 평생의 고생스런 역정 끝에 남은 것은, 자신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훌륭한 노동력이 되도록) 학교 공부 하나 시켜냈다는 사실, 그것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보통 사람들의 삶이자 대중들의 삶이다.
결국 인생의 전 과정에서 한 번도 ‘온전한 인격체’로서의 행복감을 느껴보지 못한 채 허탈감만을 안고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비극적인 현실을 우리는 ‘어쩔 수 없다’며 아이들에게도 되풀이하려 한다.
아니, 마치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덜 허탈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착각)하고, 비극적 삶을 적극적으로 부추긴다. 그러나 앞의 일생에서도 보았듯 경쟁 시스템이 없어지지 않는 한,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늘 더 높은 자리가 눈앞에 있고, 내려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밟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타개할 대안은 무엇인가?
교육 문제가 사회의 경제 시스템과 맞물려 있다면 그 해결은 더욱 요원한 것이 아닐까?
강수돌 교수는 의외로 이 문제의 해결은 작은 실천에 있다고 말한다.
바로 ‘경쟁’이 아닌 ‘상생’의 원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돈벌이의 패러다임에서 삶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삶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생태적 삶’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부터의 생태적 삶―교육 문제를 푸는 열쇠
견고한 바위도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 한방울에 뚫리는 법이다.
강수돌 교수는 견고한 경쟁 체제와 거기에서 비롯된 교육 문제를 뚫기 위해 ‘나부터’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가자고 말한다. 앞에서 말했듯 지금의 교육 문제는 ‘교육’이라는 한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와 관련된 총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가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 ..
대안학교, 주말농장, 유기 농산물로 밥상 차리기 ― 나부터의 작은 실천
문제는 결단이다. 작은 실천이지만 결코 쉬운 실천은 아닌(쉬운 실천이 아니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방법이 근본적 해결책에 가까움을 반증한다) 생태적 삶을 지금부터 가족과 이웃과 공유하고 하나하나 직접 체험할 준비를 갖춰가자. 여건을 만들어서라도 지금부터 실천하자.
| | - 강수돌 교수의 더불어 교육혁명
-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 행복한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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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다르게 사는 게 두렵고 내 아이가 옆집 아이보다 뒤처지게 될까 걱정되어, ‘더불어’ 모색해야 할 변혁에 다가서지 못하는 학부모와 교사들, 또 이러한 어른들의 주저함으로 인해 끝 모를 경쟁과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 안에서 고통 받는 많은 학생들에게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나부터, 지금부터!’ ‘우리부터, 여기부터!’ 이 책은 지금, 여기서 실천할 수 있는, 그리고 실천해야 할 여러 가지 시도들을 제시하고, 척박한 교육 현실을 타파하는 삶의 변혁과 희망을 향한 각성을 일깨우며, ‘더불어’ 행복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혁신적인 대안을 전해준다.
책 속으로
자, 이제 정리해보자.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고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도대체 왜 사는가? 우리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이 계속되는 자살 행렬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가?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가? 이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혹시라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시에 “그러나 현실은…”이라며 또다시 중독의 덫으로 빠지고 있지나 않은가? -제1부 ‘교육 현실, 무엇이 문제인가’에서(31쪽) 학교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왕따 현... 더보기 자, 이제 정리해보자.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고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도대체 왜 사는가?
우리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이 계속되는 자살 행렬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가?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가? 이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혹시라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시에
“그러나 현실은…”이라며 또다시 중독의 덫으로 빠지고 있지나 않은가?
-제1부 ‘교육 현실, 무엇이 문제인가’에서(31쪽)
학교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왕따 현상은 결국 어른들의 세계가 효율성 및 경쟁력을 중시하는 시스템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며, 이것이 획일성과 분열성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결 방향도 인간성과 생명력을 복원하는 형태로 가야 하며, 그 속에서 다양성과 개방성을 추구하는 형태로 가야 한다. “모든 아이들은 제 나름의 빛깔과 제 나름의 속도로 자란다”는 말을 기억해두자.
-제1부 ‘교육 현실, 무엇이 문제인가’에서(92쪽)
우리 자신이 사랑의 힘을 믿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긴 하지만 그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이것이 오래 가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모든 아이가 특별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여러 가지 측면이 있겠지만, 우선은 시험을 줄이고 획일적인 성적표를 만들어내지 않아야 한다. …… 성적표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여러 과목 중에서 아이가 어떤 과목에 관심이 많고 흥미를 많이 느끼며 어떤 분야에 소질이 있는지 알아보는 의미다. 둘째는, 아이의 발달 과정을 시간적으로 챙겨본다는 의미다. …… 굳이 성적표가 필요하다면 이 두 가지 차원에서만 활용하면 된다. 그 이상 무엇을 바라랴?
-제2부 ‘인생의 내비게이션’에서(173쪽)
이런 교육 혁명이 실효성을 발휘하려면 ‘고교 평등화’를 넘어 ‘대학 평등화’ 그리고 ‘직업 평등화’를 향한 사회 혁명이 계속되어야 한다. 제1차 5개년계획을 세우고, 그게 부족하면 제2차 5개년계획을 세워서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될 때까지 하면 된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자신의 개성과 적성, 꿈과 사명에 따라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행복과 사회 행복에 도움이 되는 한, 누구나 비슷한 대접을 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부모, 아이, 교사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소통하고 연대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야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의 서열화 구조를 타파하고 모두 ‘일류인생’을 살 수 있다.
-제3부 ‘교육 혁신, 우리도 할 수 있다’에서(257쪽)
나중에 아이가 커서 이성 친구를 사귀거나 배우자를 데리고 왔을 때도, 다른 건 몰라도 인성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데리고 올까 두렵거든, 지금부터 ‘내 아이’ 중심이 아니라 ‘우리 아이’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교육에 접근해야 한다. 나아가 교육의 근본 원리를 우열로 경쟁시키는 패러다임이 아니라 자부심과 더불어 겸손함을 함께 길러주는 패러다임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데에 공감하고 그런 변화를 만드는 일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해야 한다. 사회적 부모로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편협한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적 자아’로 거듭나는 것이다.
-제4부 ‘사회 혁신 없이 교육 혁신 없다’ (314쪽)
이제, 더 이상 ‘전문가 백치’를 만드느라 시간, 돈, 열정을 낭비하지 말자. 대학이 정말 큰 배움터가 되도록 변화를 만들어가자. 프랑스나 독일, 스웨덴이나 핀란드 등 유럽의 대학들처럼 교육비는 온 사회가 공동으로 부담하고 꼭 대학을 갈 사람만 가게 하자. 한국처럼 대학에 가서 영어와 컴퓨터, 경영학만 배우고 취업 준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진리탐구를 해서 온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활동을 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문가 백치가 아니라 철학 있는 전문가들이다.
-제4부 ‘사회 혁신 없이 교육 혁신 없다’ (354쪽)
출판사 서평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난 로봇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밟히다 밟히다, 내 소중한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1986년 1월, 열다섯 살 여중생이 세상을 버리면서 남긴 유서의 한 부분이다. 당시 전교 1등을 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 양. 이 유서가 신문에 공개되면서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한 기획소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 고... 더보기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지 못하는 교육 현실이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또 그 현실에 대한 잘못된 대응이 또다시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순환은 그 뒤로도 이어져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른들은 물론 청소년들에게도 ‘자살공화국’이 되고 말았다. 거의 하루 평균 한 건 꼴로, 어린 학생이 자기 목숨을 끊는 현실.
내 아이가 이 안에 포함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
물리적인 죽음뿐만 아니다. 살아 숨 쉬는 아이들조차 핏기 없이 목표 없이 식물인간처럼 가정, 학교, 학원만 왕래하며 내일의 꿈을 꾸어보지 못하는 정서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이런 상황을 탈피할 방도는 없는 건가.
죽음의 행렬에서 벗어나 ‘더불어 삶’을 향한 혁명으로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다른 개념이 필요하다. 기존의 개념, 즉 우리가 내면화한 개념들은 대부분 지배체제 또는 기득권 세력들이 심어놓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의 그림은 무엇인가, 그런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다.
개념이 바뀌면 실천이 바뀌고 실천이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그래서 ‘개념 혁명’이 필요하고 ‘실천 혁명’이 필요하다.”(12쪽)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를 깊이 주시하며, 끊임없이 대안을 모색하고 제시해온 강수돌 교수.
2003년 써낸 『나부터 교육혁명』은 “노동력을 길러내는 학교가 결국은 자본주의 기업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 현실을 냉정하게 꼬집어내기 위한 작업이자, 직접 아이 셋을 키우는 과정에서 겪는 고민과 갈등을 ‘줏대 있게’ 극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11쪽)
그사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아이 셋은 모두 중등과정을 마치고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10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는 교육 현실, 그 안에서 최선의 방도를 찾아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린 나름의 결론은 ‘척박한 현실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면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교육혁명』은 ‘나부터! 지금부터! 여기부터!’라는 구호로 모인 여러 ‘나’들이 ‘더불어’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희망과, 그 희망을 현실화하기 위한 대안을 말한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아이를 보는 시각이다. 즉, 아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다.
아이를 그 자체로 ‘작은 우주’로 보거나 ‘우주의 선물’로 본다면 아이를 절대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아이들이 순진하고 어린 껍질을 깨고 나와 지혜롭고 주체적인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경제적?정서적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경제적 지지는 형편이 닿는 만큼, 정서적 지지는 무한정해야 좋다.
물론, 경제적 지지에 따라 아이의 성적이 달라지는 차별적 현실도 바꾸어야 한다.
즉,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도 아이들이 원하는 공부를 실컷 할 수 있도록, 핀란드나 독일, 쿠바처럼 돈 없어도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지지도 필요하다.
지금 한국의 부모들은 대부분 거꾸로 한다. 경제적으로는 잔업, 철야, 특근을 해서라도, 나아가 빚을 내서라도 무한 지원을 하려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아이의 꿈이나 뜻을 지지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라는 말로, 아이의 생각과 마음을 틀어막는 일이 많다. 이렇게 자녀를 소유물로 보거나 투자 대상으로 보는 시각은 단순한 부모의 관점이 아니라 사실은, ‘자본의 관점’이다.
부모 자신이 일터에서 자본의 논리에 복속되어 살아가는 것처럼,
동일한 논리와 방식을 부모가 자녀에게 적용하고 있는 게 솔직한 우리 현실인 것이다.
‘내 아이’ 중심에서 ‘우리 아이’를 바라보는 시각으로의 전환,
‘나부터’ 바로 서는 것, ‘더불어’ 함께 서는 것,
여기서 희망은 시작된다
독일에서 약 30여 년 전에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말이 ‘팔꿈치사회’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옆 사람을 팔꿈치로 쳐야만 하는 냉혹한 경쟁사회를 상징적으로 비꼬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은 이렇게 옆 사람을 팔꿈치로 쳐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살벌한 경쟁사회다.
이러한 경쟁의 구도는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입시 준비를 시작하는 시기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제는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잘해야 자기가 원하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그것도 늦다고 태아 영어교실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사교육 대리모’의 손에 아침부터 밤까지 빡빡하게 짜인 입시 트레이닝을 받으며 길러지기도 한다.
경쟁을 하다 보면 더욱 잘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전체 사회가 한층 고양될 것이며, 경쟁을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정체된다는 논리 하에 ‘맹목적 속도전’으로 내몰리는 아이들.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달려가면서 아이의 감각, 감성, 내면은 망가진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부모가 지시하는 대로 빨리만 달려가다 보니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능력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지 못한 채 스펙 쌓기에 열중하다 ‘철학 없는 전문가’ 또는 ‘전문가 백치’가 되어 세상을 망치면서 망치는 줄도 모르고 자기 잘난 맛에 젖어 산다.
그렇게 자라나 자신의 부모와 똑같은 우를 범하는 부모가 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팔꿈치사회, 곧 경쟁사회는 인류 초기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 가운데 95퍼센트 이상은 협동사회, 공생사회였다. 지금과 같은 경쟁사회는 불과 500년 내외의 일인 것이다. 희망의 근거는 여기 있다.
살벌한 경쟁 속에서 파괴된 협동사회, 공생사회를 되살리면 된다. 경제적 /정서적 지지를 넘어선 ‘사회적 지지’도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 혁신을 넘어 사회 혁신이 필요하다.
경쟁을 혼자 할 수 없듯이, 더불어 사는 협동 또한 혼자 할 수 없다.
옆집 아이를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닌, 옆집과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 다 같이 행복해지는 삶을 꿈꾸고 실천하는 가운데 희망은 생긴다.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라고 아이들을 닦달하는 대신 아이들이 자기 개성을 찾아 마음껏 발휘하도록 도우면서, 나와 너, 나와 네 아이가 서로 소통하고 협동하는 사람으로 키우며 상부상조하는 사회, 연대와 소통의 사회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면, 50년 뒤 한국 사회는 희망이 생긴다. 반면 지금처럼 앞만 보고 계속 달린다면 50년 뒤 한국은 절벽 끝에 매달린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과연 우리 아이들이 어떤 세상에 살기를 바라는가?’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게 두렵고 내 아이가 옆집 아이보다 뒤처지게 될까 걱정되어, ‘더불어’ 모색해야 할 변혁에 다가서지 못하는 학부모와 교사들, 또 이러한 어른들의 주저함으로 인해 끝 모를 경쟁과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 안에서 고통 받는 많은 학생들에게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나부터, 지금부터!’ ‘우리부터, 여기부터!’
이 책은 지금, 여기서 실천할 수 있는, 그리고 실천해야 할 여러 가지 시도들을 제시하고, 척박한 교육 현실을 타파하는 삶의 변혁과 희망을 향한 각성을 일깨우며, ‘더불어’ 행복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혁신적인 대안을 전해준다.
첫댓글 12운성의 주기성중에서 한가지 특성을 확대해 늘어놓은 듯한 글로 읽혀요...
자신이 교수니까 인성적인 성향이 있겠고 본인이 볼때 다른 사람들이 욕지에 있는 불안한 경쟁상태의 사고뭉치로
보인다 이렇게 써놓은 것처럼... ㅋ
사주명리식 관법이랄까요? 그렇게 보는게 뭔가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볼수 있어 좋은거 같아요. 한가지에 매몰되지 않고.. ㅎ
@아로 차이가 있다면 전 일부러 12라는 숫자로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이들은 알던 모르던 그논리 안에서 글쓰는 것이구요..
알고 감추는 경우도 있을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