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적 미의식, 감각화된 정서
- 조현근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로그인
시를 쓴다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제시되는 시적 세계는 이미지를 통해 구체적인 시적 정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진술 역시 중요한 시적 언술이다. 하지만 시적 진술은 감각적인 묘사와의 호응을 통해 제시될 때 시적 언술로서의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할 여지가 많다. 시는 구체어를 통한 묘사다. 현대시는 중층묘사법을 통해 시의 옷을 입는다.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등단한 조현근의 시는 이런 시법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어서 시적 울림과 함께 공감을 자아낸다.
시집 《더 아픈 사람아》에 실린 에필로그 마지막 대목, ‘특히 아내는 환자보다 수십 배 힘든 사람입니다. 그것을 한참 지난 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안하고, 그래서 더 안쓰럽습니다. 살아야 하는데, 살아나야 더 잘해 줄 수 있는데….’라는 시인의 절규가 들려온다. 그는 반드시 이 싸움에서 승리자로 남을 것이다. ‘이 싸움이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믿음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믿음’으로 암 잔재와 가열찬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현근 시인의 건투를 절절한 마음으로 빌며 눈물의 시평을 적는다.
Ⅱ. 극복의 시심, 생의 찬가
시는 모든 문학 양식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양식이고, 문학 전체를 대표하는 양식이다. 시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중요한데, 20세기 이후 시의 새로운 경향으로 대두된 것은 구조론적인 관점이다. 시를 시 자체의 자족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그것의 내부적인 표현과 구성 원리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방식인 구조론적 관점은 조현근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
바쁘게 살다가
내몰려 도착한 곳은
병원입니다
구백 리 서울 가는 길에는
휴게소가 열 개를 넘는데
오십 년 내 인생길에는
휴게소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 합니다
그러나 병원은
쉬기 위한 휴게소가 아니라
얹혀서 찾아온
바늘이 너무 무서운
용한 어느 할머니집 같습니다
이제 이 집을 나가면
풍광 좋은 추풍령휴게소를 찾아
야외 탁자에 앉아
강원도 찰옥수수를 먹고
천안 삼거리 휴게소에서는
호두과자 한입 맛있게 먹을 참입니다
- <휴게소> 전문
<휴게소>는 힘겨웠던 자신의 인생길을 서울 가는 길에 대비해서 잘 풀어낸 시다. 열 개가 넘는 휴게소에 비해 자신의 인생길에는 휴게소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보다 더 강한 울림을 주는 시어가 어디 또 있겠는가. 자신이 자주 가는 병원을 바늘이 무서운, 용한 어느 할머니집으로 비유해 표현함으로써 육신의 아픔과 그 앞에 선 자의 비애를 잘 드러냈다. 빨리 아픈 곳을 치료받고 병원을 나서면, 추풍령휴게소의 찰옥수수와 천안휴게소의 호두과자를 먹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이 회복과 극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어서 감동을 준다. 섬세함과 애련함이 함께 공존하는 그의 글 마당에 서면, 문체에서도 다정다감한 맛이 느껴진다.
‘암의 잔재와 싸우는’ 상황을 표현한 ‘구백 리 서울 가는 길’과 ‘50년 내 인생길에는 휴게소는 없었습니다’라는 어구와 어절은 벼랑 앞에 선 존재의 한탄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감각은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감각화된 시적 화자의 투병사를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이 시의 압권은 두 정황이 제시하는 미적 인식에 있다. 정황 안에 시적 화자의 투쟁과 아픔을 환기하는 비극적 감각과 사유를 내재시키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의 결핍상황은 보다 선명하게 우리의 미의식 안으로 잠입하게 된다. ‘구백 리 서울 가는 길’이란 표현은 그의 모습을 단순하게 보여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휴게소가 없는 인생길’ 역시 자신의 처한 상항을 극적으로 환기하는 미적 인식을 제시하며 미적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제 이 집을 나가면/ 풍광 좋은 추풍령휴게소를 찾아/ 야외 탁자에 앉아 강원도 찰옥수수를 먹고/ 천안 삼거리 휴게소에서는/ 호두과자 한입 맛있게 먹을 참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담긴 현근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져할 것이다. 절절함은 전봇대에 꽃도 피운다고 하지 않는가. ‘휴게소’는 시인의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시는 삶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며, 그날을 지향하는 인간의 절규요, 소망이다. 그러기에 조현근의 시에는 눈물겨운 삶의 빛깔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생명에 대한 애틋함과 일상적 생활에 대한 기원이 있는가 하면, 구백 리 길의 사무치는 별리의 정한과 병원생활의 아픔이 물결치기도 한다.
Ⅲ. 로그아웃
“한 권의 장편소설을 여덟 줄의 시로 쓸 수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대로 조현근은 우주의 섭리나 세상의 모든 것, 산수나 자연 그리고 정서나 사고의 세계까지 응축된 시형 속에 수용할 수 있는 시인이다. 언어와 그 구조 속에 우주와 삼라만상을 응축해서 형태화할 수 있는 장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조현근이 프롤로그에서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는 위대한 시인이다. 암의 잔재와 싸우면서도 자신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인생과 일상을 시 속에 응축하여 시집을 낼 수 있는 사람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제2의 창조자로 우리 앞에 찬연히 나섰다.
그의 시세계는 한국적 휴머니즘과 모성원리에 기초한 그리움으로 엮어진 것이며, ‘결핍의 시심’이야말로 조현근 시의 본질을 추론해내는 근거라고 하겠다. 그의 시는 한국적 전통과 한의 정서에 충실한 서정시를 지향하면서도 생의 찬가를 바탕으로 보편적이며 한국적인 인정을 생성해 내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그의 시적 관심사는 빛과 어둠, 절망과 희망 등 삶의 근본적인 모순의 인식에 바탕을 두고 양자 간의 갈등을 넘어 원만하고 조화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그의 서정시는 한국 순수시의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