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8.19 12:29 수정 : 2012.08.19 12:44
|
법정스님. 한겨레 자료사진 |
1976년 <씨알의 소리>에 실린
장준하 선생 사망 1주기에 쓴 추모글
“8월의 태양 아래 선생님의 육신이 대지에 묻히던 날, 저는 관 위에 흙을 끼얹으면서 속으로 빌었습니다. 건강한 몸 받아 어서 오시라고요... 금생(今生)에 못 다한 한 많은 일들을 두고 어찌 고이 잠들 수 있겠습니까. 가신 선생님이나 남은 우리들이 고이 잠들기에는, 우리 곁에 잠 못 이루는 이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고 법정 스님이 장준하 선생 사망 1주기에 쓴 추모글이 장 선생 37주기를 맞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누리집에 올라와 있는 <씨알의 소리> 1976년 8월호에는 법정 스님이 장준하 선생의 사망 1주기를 기리며 쓴 ‘장준하 선생께 띄우는 편지’라는 글이 실려 있다.
법정 스님은 “장준하 선생님!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이, 정말 어처구니없이 우리 곁을 떠난 지 한 돌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다 그런 것이긴 하지만, 장 선생님의 죽음처럼 그렇게 허망한 경우는 또 없을 것 같습니다”라며 글을 시작한다.
그는 민중신학자인 안병무 한신대 교수가 건네준 신문으로 장 선생의 사망 소식을 알고 “일면 머리기사! 그 비보를 보는 순간 저는 가물가물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라며 당시의 충격을 전한다.
법정 스님은 당시 잡지 <사상계>를 운영하던 장 선생을 만난 뒤,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와 ‘항일 문학의 밤’ 등에서 장 선생을 만난 일을 떠올리며 “그때까지 산에만 묻혀 살던 저에게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눈뜨게 해 주셨습니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그는 장 선생을 “누구보다도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지성이었고 불의 앞에 용감히 도전하는 행동인이었습니다. 이런 선생님을 가리켜 한 동료는 “그는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혁명가” 라고 말합니다”라며 높이 평가한다.
또한 “그토록 파란 많고 수난으로 점철된 일생. 50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해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 가신 분. 서울 장안에 크고 작은 집들이 무수히 깔려 있는데도, 방 한 칸 없이 남의 셋집으로만 전전하다 가신 가난한 분. 커가는 자식들 교육을 남들처럼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시던 아버지”라며 장 선생의 희생 정신을 기린다.
법정 스님이 이 글을 쓴 1976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으로 독재 정치를 펴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시절이 잘못되어 가면서 우리들은 만날 기회가 잦았습니다”는 등 세태를 비판하는 표현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올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더위에 안녕히 계십시오. 분향(焚香) 합장(合掌)”이라고 인사를 하며 글을 맺는다.
|
‘장준하 선생께 띄우는 편지’
법정
<씨알의 소리> 1976년 8월호
장준하 선생님!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이, 정말 어처구니없이 우리 곁을 떠난 지 한 돌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다 그런 것이긴 하지만, 장 선생님의 죽음처럼 그렇게 허망(虛妄)한 경우는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무렵 산거(山居)를 마련하느라고 산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볼 일이 있어 광주에 나갔다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안병무 박사를 만났었지요. 안 박사는 대뜸, 장 선생님 소식을 들었느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요? 무슨 일이? 놀라는 내 표정에 신문을 건네주었습니다. 일면 머리기사! 그 비보(悲報)를 보는 순간 저는 가물가물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그 길로 서울을 향했습니다. 면목동 집에 들러보고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장 선생님의 육신은 우리들 곁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그 길을 먼저 떠나신 것입니다.
그토록 파란 많고 수난(受難)으로 점철된 일생. 50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해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 가신 분. 서울 장안에 크고 작은 집들이 무수히 깔려 있는데도, 방 한 칸 없이 남의 셋집으로만 전전하다 가신 가난한 분. 커가는 자식들 교육을 남들처럼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시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집안 사정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지요. 호권(장남)이 결혼한 사실도 저희는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뒤에 안 사실이지만 친지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전혀 알리지 않으셨다더군요.
장 선생님을 처음 뵙기는 <사상계(思想界)> 시절입니다. 제가 해인사에 머물고 있을 때지요. 서울 올라간 김에 思想界社로 찾아갔더니 아주 반겨주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마침 함석헌 선생님도 계셨지요. 함 선생님이 저를 소개해 주시더군요. 그 후 시절이 잘못되어 가면서 우리들은 만날 기회가 잦았습니다. 그때까지 산에만 묻혀 살던 저에게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눈뜨게 해 주셨습니다.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를 몇 차례 우리 다래헌(茶來軒)에서 열 때, 다른 분은 더러 빠지는 일이 있어도 함 선생님과 장 선생님만은 거르는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외형적인 종파는 달라도 절간의 분위기를 선생님은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실 때마다 작설차(雀舌茶)를 끓여드리고 향을 살라드렸지요. 때로는 좋아하시는 향을 나누어 드리기도 했고요. 선생님 댁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저의 채식을 위해 자상하게 마음을 써주셨습니다.
선생님이 내게 준 인상은 결코 시정(市井)의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지성(知性)이었고 불의 앞에 용감히 도전하는 행동인(行動人)이었습니다. 이런 선생님을 가리켜 한 동료는 “그는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혁명가”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로 보고 한 말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촌의 김 박사 댁에서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항상 그러했듯이 선생님의 차로 저를 바래다 주셨습니다. 원효로 함 선생님 집과 제가 거처하는 다래헌(茶來軒), 그리고 면목동 쪽은 도심을 벗어난 변두리로 거리가 먼 삼각 지점이었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은 전에 없이 저의 방에 까지 들어오셔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선뜻 발기인 명단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세 번째였습니다.
물론 그 성격은 다르지만, 편집회의 석상에서는 전혀 내비치지 않던 일을 은밀히 따로 말씀하신 것을 보고, 일을 위해서는 이렇게 신중해야 하는구나 하고 저는 그때 배웠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께 죄송한 일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주문(一柱門)에서 우리 방까지는 밋밋하게 오르는 길인데 걸음이 빠른 저를 따라오시느라고 숨차게 해드린 일입니다. 선생님이 떠나신 후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문득문득 그 날 밤일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그 무렵 건강도 안 좋았는데 ‘큰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일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긴급조치 제1호에 걸려 15년 형(刑)을 받고 복역 중 고질인 심장병의 악화로 형 집행이 정지되어 병원으로 옮겨오신 후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갔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건강이 몹시 안 좋더군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베개 밑에서 서류를 한 뭉치 꺼내시면서 초지(初志)를 관철해야 할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선생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또 대성빌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모임이 거기서 있을 때마다 청중들의 불타는 그 눈들을, 그 중에서도 선생님이 주관하시던 민족학교 주최로 열린 ‘항일문학의 밤’을! 젊음의 그 열기, 그것은 곧 어떠한 불의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이 겨레의 강인한 생명력입니다. 흩어져 있던 그 열기를 선생님이 하나로 뭉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
고 장준하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 선생님이 가신 후로도 세월은 그대로입니다. 지난 가을 산으로 들어온 이래 누구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저 반야검(般若劍)을 갈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소모되어버린 ‘밧데리’를 충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느라 글도 쓰지 않고 말도 하지 않은 채 산의 나무들처럼 덤덤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씨알의 소리』에도 전혀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장 선생님 1주기를 추모하는 특집이라고 해서 이렇게 사연을 띄우고 있습니다.
지난 봄 서울에 올라가 면목동 집에 들렀더니 감회가 무량했습니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그 집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예나 이제나 사모님은 꿋꿋하셨습니다. 호권 군이 얼마 전에 딸을 보았다는 소식과 취직이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집에는 찾아오는 친지들의 발길도 드문 것 같았습니다. 입이 무거우신 사모님은 별 말씀이 없었지만 집안 살림이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무성의와 무력을 부끄러워 할 뿐입니다.
1주기에 참례 못하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안거중(安居中)이라 불전에 향다(香茶)의 공양이나 올리겠습니다. 안거 후에 찾아볼까 합니다. 옛날 그 집에 사시는지 또 다른 전셋집으로 옮기셨는지 산에서는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장 선생님!
8月의 태양 아래 선생님의 육신이 대지에 묻히던 날, 저는 관 위에 흙을 끼얹으면서 속으로 빌었습니다. 건강한 몸 받아 어서 오시라고요. 고이 잠드시라고 명복을 빌지는 않았습니다. 금생(今生)에 못 다한 한 많은 일들을 두고 어찌 고이 잠들 수 있겠습니까. 가신 선생님이나 남은 우리들이 고이 잠들기에는, 우리 곁에 잠 못 이루는 이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고이 잠들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도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 50대 초반을 보내며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괴로워한다.” 고 『돌베개』에 붙이는 글을 선생님은 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괴로움이 덜릴 때까지 우리는 잠들 수도 쉴 수도 없습니다. 지하에서나 지상에서나 우리들의 염원(念願)은 결코 다를 수 없습니다.
할 말을 줄입니다. 우리들의 시대가 보다 밝고 건강해질 때까지 우리들의 걸음은 멈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늘 함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올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더위에 안녕히 계십시오.
분향(焚香) 합장(合掌)
| |
|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고 장준하 선생을 기억하며
재판정에 선 양심 ‘유신 헌법을 개헌해야 한다’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1호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돼 재판정에 선 장준하 선생.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고 장준하 선생을 기억하며
47년 결성한 복음동지회 회원들. 원내가 문익환 목사. 앞줄 왼쪽 첫번째가 장준하. 이 모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