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동시를 발표했던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인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곳. 그곳이 바로 민족시인 윤동주의 용정 자택이다. 지금은 쓸쓸함만이 남아있는 용정 윤동주 생가를 찾아갔다.“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밖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그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우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우리는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 같이 과수원 울타리로 되어있는 뽕나무 오디를 따 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 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 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선생이 그림처럼 묘사한 윤동주의 생가 풍경이다. 연변행차를 하는 외지 사람들이면 선참 찾아보는 관광코스의 일번지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생가. 하지만 용정 시가지에 또 하나의 윤동주의 거처가 있고 그 곳에서 윤동주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바랜 줄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2010년 가을 필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 역사 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용정의 ‘산 증인’ 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선생(85)을 모시고 용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용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어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뒤 윤동주는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대랍자(大槇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 소학교 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 리라는 등교 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 격인 용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잡지《나라사랑》에 기고한 추모문〈윤동주의 생애〉에 따르면 “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용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고 밝히고 있다.윤동주 일가의 용정 이주는 어찌보면 일대 변혁이었다. 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 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평 윤씨 가문의 장남이었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 크게 변했다. 윤동주 일가가 이사 온 용정 집은 ‘용정가 제2구 1동 36호’ 로서 20평방미터 정도의 초가집이었다. 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초가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미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 하는 환경 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시절이 시작되였다.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 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다시 윤일주 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 문익환 목사는《월간중앙》(1976년 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다.“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 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 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문익환 목사는 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여학교와 한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곳에는 또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 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용정 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 ‘영국더기’ 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 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 는 지금 용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 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 600평의 본관과 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 있는, 명실상부한 용정 최고의 신식 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따라서 우리 한인들은 이 언덕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용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었던 것이다. ‘영국더기’ 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 8년 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 200미터 떨어진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 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 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따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윤혜원 여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용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고 윤 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용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 잘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 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 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1940년 은진중학 졸업 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 사람이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쿄 립교대학 영문과, 도쿄 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 ‘사상범’ 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1945년 3월 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새로운 길〉이 낭독되었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용정 자택에 대한 확인은 역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그가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 1985년에 이루어졌다.
윤동주 동기생이 생가 확인
1930∼40년대 용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용정 자택과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 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 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 후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 문제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 19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 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 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용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 를 찾으면서 용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최근갑 선생은 1930년대 김약연 목사의 자택(현재 용정 안민가 ‘해란의 별’ 아파트 부근)에서 당시 벌채조합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고 조선족역사에 관한 어제의 ‘산 증인’ 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 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 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어난 최근갑 선생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 12년 후배로 되는 것이다.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 수 차례 길림성 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 선생은 1986년 용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역사 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역사 관광전적지 건설에 혼신을 바치고 있다.최근갑 선생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용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 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 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 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오줌싸개 지도〉 를 산출시킨 곳, 〈초 한 대〉등 자신의 시 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곳이 바로 이 용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 한국, 지어 그를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 조차 없어,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한다.
윤동주선생이 조선족이라 고 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