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이홍주(1562-1638)선생은 전주이씨이며 선성군파의 후손이며 영의정을 지낸 분이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나도 조금 생소한 분이다. 선성군파 명산종중 회장이신 이윤중 회장님과 통화를 하였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송천동) 374-13번지 명산회관 테마빌딩 601호에 사무실이 있다. 나는 평소 선성군파 후손 가운데 이응백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와 이명준 전회장님을 잘 알고 있다. 선성군파의 족보를 보면 저술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다. 개인의 약력 중에서 개인 저술을 중시하여 목록을 만든다.1980년대에 나온 족보를 보니 이응백 박사가 중심이 되어 편찬되어서 그러한지는 몰라도 저술에 특색을 부여하고 있다.
한편 2010년 10월 9일에 한북사학회와 의정부문화원이 주관하여 <이천 이홍주의 생애와 전주이씨 선성군파 명산종중 묘역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라는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홍주 선생은 조선 선조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른 뒤 인조대까지 50여 년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영의정까지 오른다. 내직으로 사헌부, 승정원, 홍문관의 여러 관직을 지냈고, 평양서윤, 안동부사, 전라감사, 함경감사 등의 외직을 거쳐 능력을 발휘하며 이조, 예조, 병조판서를 두루 거친 행정가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인조조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임진란의 국란에서도 여러 맡은 직임을 다하였고, 광해군대에 국제관계가 얽혀 있을 때 사은겸천추사의 외교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인조조의 이괄의 난 때도 도원수로 임명되어 난을 평정하여 능력을 인정 받았고 병자란에는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강화 교섭을 하면서 항복을 끝까지 반대하는 등 전란기와 정국 변동기에 구국의 소임을 다하였다. 특히 공직에 몸담고 있는 동안 소신과 기백을 겸비하여 파당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공평하고 청렴하여 공직자의 사표가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한 분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 정의와 도덕성이 무너지는 이 때에 우리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그리고 정치분야 외에도 문화 예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어서 서예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촉체에 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금석문으로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문묘 중수비문을 비롯하여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명산종중 묘역에 있는 그의 부친 극인공의 묘갈비문은 직접 쓰신 글씨이다.
이 책의 편저자인 김대길 박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기획실장으로 재직 중이고 이 책에 <이천 이홍주의 생애와 청치활동연구>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실었고, 한북대 평생교육원 홍정덕 교수는 <전주이씨 선성군파 명산도정 묘역의 역사적 , 문화재적 가치>라는 중후한 논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