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산 조선의용군 유적지. 조선의용군은 주로 깊은 계곡에서 활동하며 조국 해방을 위해 힘썼다.
조선의용대의 하부에서부터 전위동맹 계열의 대원들이 동북 노선을 다시 제기했고,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주력이 비밀리에 북상하는 것을 승인했다.
각 지역에 분산돼 있던 조선의용대는 1941년 초부터 뤄양(洛陽)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국민당 군대에 들키지 않고 팔로군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김원봉과 본대는 충칭에 그대로 남기로 하고, 조선의용대 주력 80여 명은 그해 6월
황하를 건너 타이항산 지역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역으로 무사히 진입했다.
조선의용대의 일부 30여 명은 최창익이 주도해 이미 1939년 옌안을 거쳐 타이항산 지역에 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조선의용대를 자신들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생각하고 상당히 공을 들였다.
충칭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김원봉에게 적극 설득하기도 했다.
조선의용대는 이곳에서 40일간의 대토론을 거쳐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1구대, 2구대를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조선의용대가 충칭의 본대의 지휘를 받는 형식은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주도권이 김원봉에서 진광화·최창익 등 사회주의 운동가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1942년까지 무장선전과 치열한 전투 그리고 일본군 지역에서의 조선인 지하조직 활동이 전개됐다.
무장선전 수행 중에 바로 이들 4인이 전사하고 김학철이 부상당한 후자좡 전투가 발생했던 것이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대대적인 팔로군 소탕전을 벌이는 가운데
팔로군 지휘부와 조선의용대가 포위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조선의용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팔로군 참모장 쭤취안(左权)과 조선의용대 진광화·윤세주가 전사했다.
조선의용대 지휘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에 대해 팔로군은 성대한 추모대회를 열었고,
후자좡 전투는 중국의 소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공산당 측에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두 사람의 묘는 허베이성 남부의 한단시(邯郸市) 열사공원에 있다.
스자좡에서 한단까지는 고속열차로 이동했다. 시속 300㎞로 달리니 30분 조금 넘어 도착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한단, 어둑해지는 시간이었으나 숙소에 배낭을 던져놓고는
진지루위(晋冀鲁豫) 열사능원을 찾아갔다.
진지루위는 각각 산시·허베이·산둥·허난 네 개 성의 약칭이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한 이후 최초로 세워진 대형 열사능원이다.
진지루위 열사능원은 남원과 북원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북원에는 이 열사능원의 주인공인 쭤취안 팔로군 총참모장의 기념관과 묘가 있다.
쭤취안 묘 양옆으로 잘 꾸며진 6기의 묘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진광화(1911~1942)다.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묘비명에는 김창화라는 본명으로 시작해 서른두살에 전사한 젊은이의 일생을 기록해 두고 있다.
진광화는 조선의용대가 북상해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온 다음 조선의용대의 정치위원이 됐다.
그리고 1942년의 일본군의 소탕전에서 전사했다.
“원명 김창화, 평안남도 대동군 1911년 출생, 1931년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반일 정열로 중국에 유학,
1937년 광저우에서 중산대학 교육계를 졸업했다.
한국국민당 조선청년전위단과 중국청년항일동맹에 참가했고, 1936년에 중국 공산당에 참가했다.
38년에 화북 타이항산 항일 근거지에서 중공 북방국 진기로예구 당부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았다.
1941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창설하고 영도했고 1942년 5월 28일 타이항산 반소탕전에서
산시성 볜청 화위산(花玉山)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진기로예 변구의 당정군민과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열사의 공적을 기억하면서 묘를 쌓고 비를 세우고 잊지 않고자 한다. - 중화민국 31년 10월 10일”
윤세주(1900~1942)의 묘는 진지루위 열사능원의 남원에 있는 인민해방군 열사묘역에 있다.
가로 1m 정도 되는 비에, 세로 3m는 됨직한 석판으로 덮은 묘가 예사롭지 않다.
윤세주는 김원봉과는 생가부터가 앞뒷집인 고향 형제와 같은 사이였다.
둘 다 의열단 창단에 참여했다.
윤세주는 창단 직후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다가 검거되는 바람에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이육사와 함께 난징으로 가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로 교육을 받았다. 육사는 귀국했고,
윤세주는 난징에 남아 군정학교 2기의 교관을 맡았다.
이후 민족혁명당을 거쳐 조선의용대에 이르기까지
김원봉의 복심이라 할 정도로 좌우합작 운동이나 의용대 창설 작업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지금도 윤세주를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열사능원의 기념관에도 두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반소탕 전에 희생된 간부들을 소개하면서 ‘걸출한 국제주의 전사’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전사 경위를 알려주고 있다. 1942년 7월 18일자 신화일보의 관련 기사도 전시돼 있다.
‘마지막 주둔지’였던 윈터우디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