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달은...해가 꾸는 꿈> 1997 <3인조> 2000 <공동 경비 구역 JSA> (프랑스 도빌 아시아 영화제 대상, 대종상 영화제 작품상) 2001 <복수는 나의 것> 2003 <올드보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최우수 작품상) <여섯 개의 시선 If you were me> 중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2004 <쓰리 몬스터> 중 <증오> 2005 <친절한 금자씨>
지난해 5월 프랑스에서 열린 칸 영화제에는 아시아 영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리고 그중 가장 거센 바람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일으킨 돌풍이었다. 특히 이번 수상은 우리 영화가 소재와 주제, 치열한 작가 정신에서도 빼어나다는 사실을 전 세계 영화계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미 임권택, 이창동, 김기덕 감독이 국제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지만, 이는 개인상이라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평가받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영화 작가로 불리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에 대해 알아보자.
칸의 태풍 <올드보이>
2003년, 그러니까 재작년에 열린 제56회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는 1972년에 열린 제25회 칸 영화제와 함께 최악의 영화제로 평가받았다. 칸 영화제의 집행 위원장인 티에리 프레모의 고민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거장에 대한 예우와 숨겨진 감독의 발견, 신예 발굴’ 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도, 할리우드 스타들이 ‘팔레 데 페스티발’칸 영화제의 주 상영관앞을 북적이게 만들 수는 없을까? 그런 면에서 이례적으로 월드 프리미어전 세계에서 처음 상영되는 영화가 아닌 이미 국내에서 개봉한 박찬욱(1963~) 감독의 <올드보이(Oldboy)>를 경쟁 부문에 넣은 것은 티에리 프리모의 히든카드였던 셈이다.1
그뿐 아니라 영화제의 최대 인파가 모이는 일요일에 <올드보이>의 공식 시사회를 잡을 정도로, 칸 영화제는 이 영화에 보이지 않는 큰 배려를 했다. 영화 전문지 <스크린 인터내셔널>에 실린 평론에서 패트릭 프레이터 기자가 ‘<올드보이>야말로 창의적인 이야기 구조와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폐부를 찌르는 잔혹함이 있는 영화’ 라고 평가하는 등 현지의 반응도 호평 일색이었다.
그러나 <올드보이>가 칸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게된 데에는 무엇보다 심사 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1963~)의 입심 덕이 컸다. 그는 가는 곳마다 ‘<올드보이>는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영화’ 라고 선전하여, 심지어 칸 영화제 말미에는 영화 주간지 <버라이어티>에 ‘타란티노가 <올드보이>를 황금 종려상으로 밀고 있다.’ 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결국 <올드보이>는 칸 영화제의 3대 성향, 곧 ‘반미, 아시아 영화 발견, 프랑스 영화 우대’ 라는 세가지 원칙 중 아시아의 발견, 아니 한국 영화의 발견 부문에서는 단연 그 중심에 박찬욱 감독과 <올드보이>가 있었던 것이다.
탁월한 스타일리스트, 박찬욱
그렇다면 <올드보이>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누구인가? 그를 알기 위해, 먼저 영화 청년으로서 박찬욱 감독의 야심이 생생하게 담신 작품 <올드보이>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박찬욱의 적자(嫡子)답게 영화 형식에 대한 온갖 실험으로 가득차 있다. 우선 이 영화에는 폭력과 웃음이 절묘하게 공존한다. 15년이나 감금되어 있는 주인공 오대수(최민식 분)는 매일 똑같은 것만 먹는데도, “아이고 옆방 아저씨는 젓가락 한 짝으로 밥 먹겠구나.” 라며 넉살을 부린다. 또한 감독은 희대의 ‘길게 찍기’한 장면을 여러 개의 커트로 나누지 않고 길게 한 숏으로 처리하는 기법가 빛나는 장도리 싸움 심(scene)과 360도 트래킹 숏trscking shot, 선로를 따라 움직이는 이동차를 이용해 찍은 장면으로 오대수의 광기를 표현하고, 광각 렌즈2로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적 거리를 벌려 놓는다. 싸움 장면에서는 속도를 변주하고, 텔레비전과 주인공의 얼굴을 이중 분할하여 시간의 흐름을 압축한다.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 활발하게 움직이는 영상을 갑자기 정지시켜 강한 영화 메시지를 전달하는 촬영기법 대신 정지 동작으로 숏을 시작하는 만화적 스타일도 여전하다.
한편 이 영화에서는 보라색, 미로 이미지 같은 몇 개의 공통적인 코드가 손수건, 우산, 벽지까지 모두 통일된 형태로 제시된다. 그리고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의 그림이나 루이 부뉴엘(Luis Bunuel, 1900~1983)3 영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이미지들을 등장시켜 영화 전체에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그뿐 아니라 박찬욱 감독은 고등 학교 인터넷 홈 페이지가 실제 학교로 변모하는 디졸브dissolve, 화면이 점차 흐려지면서 다른 장면으로 바뀌는 것 장면에 자동차가 곧바로 들어가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편집 감각을 보여 준다. 그만큼 <올드보이>는 일단 보는 살마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할 정도로 영화적 스타일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기법들은 데뷔작 <달은...해가 꾸는 꿈>에서부터 변하지 않는, 스타일리스트 박찬욱의 전매특허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달은...해가 꾸는 꿈>에서는 두 명의 남자 주인공이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데, 박찬욱 감독은 그들이 여자에게 다가가는 장면을 찍을 때도, 보스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좀 더 손쉬운 숏인 줌 인(Zoom-in)을 사용한다. 반면 그의 하수인이자 지고지순한 남자 주인공을 찍을 때는 좀 더 어려운 숏, 곧 카메라 자체가 피사체를 향해 움직이는 트랙 인(Track-in)을 실험한다.
그런데 완성도 면이나 실험적 형식이 이미지와 통합되는 차원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는 <복수는 나의 것>이 박찬욱 최고의 작품이자 A급 연출이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보여 주는 걸작이 아닐까 한다. 암전(暗電)과 막간 자막, 시각과 청각의 부조화, 사운드 몽타주4, 면도날같은 편집, 수시로 변하는 시점 숏 등을 생각해 볼 때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박찬욱이 지닌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때 가장 주목한 점은 그가 우리 나라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비디오 세대 감독의 맨 앞줄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수만 편의 영화를 보고 007 시리즈와 이소룡(1940~1973)에 매혹되었던 영화광이자, 샘 페킨파(Sam Peckinpah, 1925~1984)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5 그리고 수많은 B급 영화의 감독을 ‘영화 스승’으로 생각하는 영화감독이다. 우리 나라 감독 가운데 박찬욱만큼 탁월한 영화 형식과 강박적인 영화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도 없는데, 이는 그의 영화광 경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박찬욱 감독은 고급․저급 문화를 가리지 않는 문화의 향유자로서, 청각적․시각적 이미지의 부조화, 자유로운 연상의 흐름을 따라 컷을 자르고 붙이는 편집 등 갖가지 실험적인 영화 형식으로 자신만의 아우라예술가․예술 작품 등이 지닌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한 감독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영화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기에, 그의 영화는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하짐나 이와 동시에 데뷔 초창기에는 ‘형식 과잉 영화과의 현학적 영화’ 라는 비판도 아울러 들어야 했다.
친적한 복수씨, 결핍과 죄 의식
박찬욱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 있는 것을 상실하거나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 없는 것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유도 모른 채 감금당하고, 그의 아내는 살해된다. 이전의 주인공들도 그랬다. <공동 경비 구역 JSA>에서 누군가와 의사 소통을 하고 싶어 하는 이수혁(이병헌 분)의 소망은 결국 자살로 끝을 맺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송강호 분)은 이혼을 하고 아이가 있다가 사라지며, 류(신하균 분)의 몸에는 없던 흉터가 생겨난다.
특히 박찬욱 감독은 구약적인 인과응보6에서 비롯된 죄 의식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을 자주 등장시킨다. 예를 들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은 유괴당해 죽은 딸을 부검할 때는 피눈물을 흘리다가, 범인인 류의 누나를 부검하는 자리에서는 하품을 한다. 사막처럼 메말라 가는 그들의 영혼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연민과 동정 대신 이상한 유머를 툭툭 던져 놓는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는 신장이 아파 방바닥을 뒹구는 누나를 등 뒤에 두고도 태연히 라면을 먹고, <3인조>에서 주인공 남자는 심각하게 자살하려는 찰나에 무선 호출기가 울려 그만 죽지 못한다. 이렇게 박찬욱의 웃음은 냉소적이며 인간의 근원적인 부조리를 꼬집는다. 이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박찬욱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원하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박찬욱 영화의 주인공 가운데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아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없는, 지극히 단순한 결핍에서 비롯된 허전함을 매우기 위해 죄를 저지른다. 작은 것에서 시작된 인간적인 행동은 점입가경으로 운명의 춤을 추며 악마의 그것으로 변모한다. 박찬욱 감독은 이에 대해 ‘죄가 죄 의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죄 으식이 죄를 낳는 경지’ 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자신이 카톨릭 전통이 강한 집안에서 자랐음을, 이처럼 유달리 튀는 죄 의식은 그의 가정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은 얼마 전부터 ‘복수’라는 소재를 차용해 이러한 죄 의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 ‘친절한 복수 씨’ 라고 이름 지을 만한 그의 복수 테마 안에는 과도한 폭력과 유머,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비관적이면서도 냉소적인 건조함이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가진 자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계급적 모순이 일상적인 풍경 안에서 얼마나 깊이 침잠해 있는지를 즐겨 보여 준다. 예를 들어,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노동자가 자살을 하고, <3인조>에서는 미혼모와 조직 폭력배 두 명이 도둑질을 하짐나 해피 엔딩을 맞게 된다.
한국 영화의 미학적 성과
지난해 칸 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점은 많은 영화인들이 박찬욱의 영화 세계에 대해 이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네아스트> 편집장부터 칸의 기자실에서 자원 봉사를 하는 영화광까지, “<올드보이>는 연습 게임이에요. 그가 만든 <복수는 나의 것>을 봤어요?” 라고 물으면 그들 대부분이 ‘봤다’고 대답한다. 그만큼 한국 영화의 미학이 전 세계 영화인들의 자장자석이나 전류의 주위에 생기는 자력이 미치는 범위에 걸려든 탓일 테고, 그중에서도 김기덕․홍상수․박찬욱은 새로운 한국 영화의 동인(動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칸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은 그 모든 소란에도 불구하고 담담해 보였다. 인터뷰 수백 건을 치르는 빡빡한 일정과 시상식 직전의 긴장감 속에서도 호텔 방에서 다음 작품의 시나리오를 썼을 정도였으니까. 특히 “한때는 충무로에서 제일 한가한 감독이었는데, 이젠 거장이야.” 라고 주변 사람들이 농담을 해도, 박 감독은 “다 한때죠.” 라고 가겹게 받아넘겼다.
사실 박찬욱 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부터 놀라운 연출 솜씨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배우의 힘을 믿게 된 것’ 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인간을 다룰 줄 알게 되면서부터 영호의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게 된 것 같다. 자, 그러니 이제 평론가로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고 다음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를 기다릴밖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구약적 세계관을 지닌 그가 이제 어느곳에 복수의 날을 갖다 댈지 궁금해진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가 왠지 친절하지만은 않ㅇ르 것 같은 느낌이 벌써부터 물씬 다가온다.
주 1. 칸 영화제가 장편 경쟁 부문 작품으로 국네에서 먼저 개봉한 <올드보이>를 선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원래 비경쟁 부문에 선정되어 있었는데, 칸 영화제 측에서 막판에 경쟁 부문으로 바꿔 발표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2. 광각 렌즈 - 촬열할 수 있는 수평 범위가 넓은 렌즈로, 좁은 장소를 넓게 보이게 하고, 원근감을 과장되게 왜곡하며, 움직이는 피사체가 렌즈에 다가올 때 그 속도를 실제보다 빨리 보이게 하는 특징이 있다.
3. 루이 부뉴엘 - 에스파냐의 영화감독으로, 달리와 친교를 맺으며 초현실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1928년에는 달리의 도움을받아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전위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발표했다.
4. 사운드 몽타주 - 음향과 화면을 조합․대립시키거나 음악과 음악을 충돌시키는 기법. 이는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하거난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때, 그 밖에 장면 전환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주로 사용된다.
5. ‘폭력 미학의 피카소’로 불리는 샘 페킨파는 주로 서부극 장르를 통해 어둡고 비장한 1970년대 전후 미국 사회의 뒷면을 그린 감독으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와일드 번치>, <겟 어웨이>, <가르시아> 등이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스릴러․서스펜스 영화의 거장’으로, 대표작으로 <현기증>, <사이코>, <새> 등이 있다.
6.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표되는 구약적 인과응보론은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만큼 가해자도 돌일한 상해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 같은 인과응보론은 기원전 18세기경에 만들어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가장 처음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