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쿠빌라이가 고려를 특별대우 한 이유 둘
몰골 칸 쿠빌라이가 고려를 특별대우 한 이유는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외형적으로는 쿠빌라이 세조의 유훈이다. 이 유훈은 쿠빌라이가 몽케칸의 사망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고려 태자(훗날 원종)가 정세를 종합한 뒤 쿠빌라이 쪽을 방문 입조하면서 30년동안 몽골이 정복하지 못한 고려의 태자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스스로 화의를 청하면서 쿠빌라이에게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라는 몽골 귀족들의 평가를 받게 한 것에 대한 답례의 성격이다.
2.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몽골의 시조 칭기스칸의 유훈과 몽골 황족들의 계보 및 족보를 기록한 <몽골황실비사>라고 하는 몽골 황족들만이 볼 수 있는 기록에서 잘 드러난다.
칭기스칸은 여기서 자신의 칭호를 <칭기스 칸 = 진국의 칸 = 즉 "진국의 대왕">이라고 부르게 했다.
우리민족 발해의 국명이 원래 <대진국=고구려>이었음을 국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고구려가 망할 때 선조들이 고려와 대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자신은 3형제 중 대진국으로 들어온 셋째의 후예였으며, 두 형은 고려에 남아 조상들의 선산을 지키고 제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형제들이 헤어질 때 약조하기를 <우리는 헤어져 있어도 반드시 형제들간의 혼사를 이뤄 형제간의 우애를 영원히 세세손손 이어나가겠노라> 하였으니 이로써 고려의 공녀(여기서 공녀란 조공으로 바친 여자의 의미가 아니라 귀한 집안의 여인이라는 의미였다)를 기 황후가 없앨 때까지 근 400여명을 받아 몽골황족들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몽골의 황실(황후와 황제들을 포함해서)과 조정 관리들은 죄다 고려인과 고려인의 후손들로 넘치게 되었고 이러한 고려인들로 인하여 몽골에 고려양,고려풍,고려속 등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며 몽골이 명나라에 쫓겨 물러난 뒤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 초기에도 이러한 몽골의 세시풍속들이 여전히 유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행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부담이 커서 사치로 보게 됨에 따라 명 태조 주원장은 이를 금하게 하였다.
오늘날 중공이 우리의 한복에 대하여 한푸라고 하면서 명나라 때 유행한 중공의 풍속이라고 강변하는 이유는 다 여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한족 중심의 중국이 원나라는 아니다. 엄연히 중국은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가 아니가? 이와 같은 칭기스칸의 유훈이 있었기에 몽골의 황족들은 고려를 한 집안으로 대우한 .것이다.쿠빌라이가 고려를 특별대우한 내역이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국호인 <몽골 = 말갈 = 물길= 마갈 = 마을(말)과 고을(골) = 크고 큰 나라>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 이는 또한 <마쟈르, 만주>와 같은 형태로도 나타나고 이들은 또 스스로를 <여진=추센=조선=숙신=직신=활 잘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으며 이런 사람들 중 특히 뛰어난 이를 <주몽=츄모우= 활 잘 쏘는 사내>라는 의미로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츄모우= 츄(활 잘 쏘는), 모우= 마 (사내,장부 ) > 인데 <모우= 마>로 보는 용례는 <임마, 일마,절마,글마, 꼬마,>등에서 사람을 지칭하는 접미사에서도 잘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