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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
信天함석헌
죽음, 사람에게 가장 큰 문제
오늘은 요한복음 11장입니다. 나사로 죽음에 이어 나사로 살리려는 이야기인데요.
어떤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베다니 사람 나사로였으며, 베다니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가 사는 동네였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던 여인이요, 병(病)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였습니다.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주님 보십시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이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유(留)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弟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 하고 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방금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또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낮은 열 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에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 들었다. 내가 가서 깨우겠다”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님! 그가 잠들었으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가 잠들어 쉰다고 하신 말씀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너희를 위하여 도리어 기쁘게 생각한다. 이것은 너희로 믿게 하려 한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그때에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로 가자” 하고 말했습니다.
이게, 사람에게서는 가장 큰 문제가 이러니 저러니 그래도 죽음 아니에요, 죽음? 죽음이라는 소리가 나오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셨나? “어떤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베다니 사람 나사로였으며, 베다니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가 사는 동네였습니다. (녹음중단 다른사이드로 변경 후 녹음 계속)
발을 씻고 했다고 하는 얘기가 하도 유명해서 마리아 마리아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던 여인이요, 이사람이 그 사람인데, 병든 나사로는 그 사람의 오라비였다. 누이들이, 이제 마리아 하고 또 마리아의 언니인지 대개 언니 아닌가 하는데 마르다 하고,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주님 보십시오.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그래 아마 상당히 사랑했던 친구였던 모양이예요.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나 하여간 사랑했는데,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럼 이제 중간에 딴 얘기 하나 합시다. 종교의 말에는 그건 근래에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말 다합니다만, 종교의 이런 글을 볼라면 여기 이 상징주의, 심볼리즘(symbolism)을 그걸 많이……, 옛날은 그런 말을 안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면에 연구가 훨씬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점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의 체험이란 참 깊은 건데, 우리들의 인격에 맨 깊은 말, 우리 마음의 지성소라고 뭐 그럴까요?
하나님하고, 철학적인 말로 실재(實在)하고 직접 만나는 그게 우리 체험인데, 그건 그러기 때문에 말로나 붓으로 할 수가 없어요. 어떤 때는 그림으로 하는 것이 좀 낫고, 그림보다도 더 심한 것은 음악으로 표시하는 것이 좀 더 나을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그것 가지고도 안돼요. 그걸 떠난 지경이예요. 그런 거를 표시하려니까 거기 상징을 쓰게 돼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이 우주가 왼통 심볼리즘 아니예요? 왜? 정신적인 것에 나타난 거니까. 나타난 거는 상징이란 그거 아니예요? 본래 실재라는 건 이 우리 이 눈이나 귀에 직접 경험이, 감각이 안돼는, 우리가 안다는 건 요 눈 귀 코 입 이 소위 오관을 가지고 이걸로 할 수 있는, 요리할 수 있는 그런 것만 알지 않아요?
더 쉽게 실 예를 든다면, 도량형(度量衡), 자로 재는 거, 또 말로 되는 거, 또 저울로 다는 거, 물건 다룰 때 도․량․형 셋이 있는데, 그럼 그 밖에 거는 우리가 할 수가 없을 거예요. 도량형을 가지고 헤아릴 수 있는 물질인 다음에는 그러지, 물질 아닌 거는 도량형을 가지고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거예요. 몇 십 년 전인가, 유명한 생물학자가 시험관에 암만 흔들고 실험해 봐도 그 속에는 영혼이란 건 없더라, 그러니까 영혼은 거짓말이다, 그건 그 학자 자기 시험관엔 물론 없을 거예요. 하지만 시험관에 들어가는 거라면 영혼이라 할 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리가. 그건 뭐 그것 쯤 어느 실험실에도 가 있는데 하필 뭐 하나님 믿는다고 그럴 필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벌써 그건 생각이, 하나님이라고 그럴 때에는 그 이상, 그 이상 뭔지는 우리가 모르지만 그건 아니니까. 내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맛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이 세상에 수두룩하게 있는데, 또 새삼스럽게 ‘천국에 가서 맛본다’ 그럴 거 없어요. 그러니까 감각으로 아는 세계가 아닌데, 그런데 우리의 사람으로서는 감각 이외의 것을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뭘 생각을 할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거기 뭐이, 우리 영혼이 직접 거기에 대한 체험을 했더라도 그걸 옆에서 교통을, 사람이, 사람이 나 혼자만 사는게 아니라 다른 인격도 있으니까 여기 이 교통이, 서로 주고받고 교통이 있는데, 커뮨(communication)인데, 그걸 할 땐 자연이 상징이, 심볼이 안 갈 수가 없어요. 글자로 하는 수도 있고, 그림으로 하는 수도 있고, 음악 부호로 하는 수도 있고, 우리 손짓으로 하는 수도 있고, 하지만 하여간 무얼로 했든지 그게 다 상징이에요. 쉬운 말로 아주 이런 말을 하면 “팔짝” 하고 성을 내서 말이야, “저놈 저런 저 사탄이다” 그럴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것도 심볼이에요, 상징이에요.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야? 아버지겠어요? 아버지 있고 아들 있고 저 새끼를 낳을 필요가 있는 거라면 하나님이 될 리가 없지.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자람이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하고 우리의 관계를 말하려니까 우리의 있는 걸로 하니까 아버지라고 그래. 그러니까 그런 걸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들으니까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그 우리의 어머니는 누구요? 우리 영혼의 어머니는 누구요? 그래서 또 허무맹랑한 것들이 성령이라, 어쩌구 어쩌구 하지만, 그런 소리가 도무지 진리의 세계가 뭔지를 모르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인데.
상징주의가 뭐 속속들이 들어가 있어. 그러니까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돼. 왜 그런고 하니, 상징을 아무리 훌륭하게 된 상징이라도 상징이지, 그것이 곧 신앙의 대상 그 자체가 돼서는 안돼요.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비유해 말하는 거지. 곧 우리의 진짜로 정말 아버지로 되는, 육신에서 하는 모양으로 그렇게 되면 잘못이예요.
그러니까 심볼은 아무리 교묘하게 된 심볼이라도, 성경이라고 하는 책조차도 한 심볼이예요. 그 조차도. 그것이 곧 그대로 우리가 믿는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말이예요. 어떤 노인네에게는 괜히 굉장히 걱정스럽게 들리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에엥~ 애기가 살라면 어머니의 관문(關門)을, 죽을 각오를 하고 통과해야, 어머니도 죽을 각오를 하고 애기도 죽을 각오를 하고 한번은 죽어야 새생명이지 무서워서 탯줄 속에 있으면 에미도 죽고 애기도 죽고 다 죽고 만단 말야. 천생 종교의 새로운 체험엔 위험이 있게 마련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자람이 없습니다. 자라지 못하면 그 안에서 썩어지고 말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겁니다. 왼통 그 상징이, 그러니까 그 뒤가, 그 상징이 말하는 거기가 뭐냐? 말로 할 수 없는 거기가 뭐냐? 거길 그걸 느낀다고 그래야지, 느끼는, 느끼되 보통 이 감정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감정 이상의 걸로. 그래서 그걸 직관이다, 직감이라 그래요, 인튜이션(intuition)이라, 사뭇 그걸 중(中) 가운데 눈을 매개로 할 필요도 없고, 귀를 매개로 할 필요도 없고, 이 손 촉각을 매개로 할 필요도 없고, 혀라든지 이빨(齒牙)이라든지 이걸 매개로 할 필요도 없고 사뭇, 그럼 뭐이 사뭇 우리 속에 있는 이 영혼이라는 게 중간에 이게 다 일 없이, 선생이 필요치도 않아! 교회가 필요치도 않아! 다른 책이 필요치도 않아! 내가 사뭇 그 이 하고, 그 이가 누군지? 그 이라고 할 수 밖에 없어! 직접 이렇게 막 대화를 한다고 그럴까? 대화라는 말도 또 상징입니다만, 어쩔 수 없이 안 쓸 수 없어 하는, 무슨 교섭을 하게 되는. 그럴 각오를 마음속에 해야 돼!
이 인생 전체가 병든 인생 아니냐?
그런데 그러면 이제 그렇게 설명을 하고 이걸 보면, 상징을 보면 재미있는 게, 이게 이 천년 전에 있던 어느 예수님이 잘 알던 어떤 한 사람에 관한 일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심볼라이즈(symbolize)하는 걸로, 상징할 수 있는 걸로 볼 수 있지 않냐? 한 집에 세 식구가 살아, 한 집에 세 식구가! 나사로 하고, 나사로가 맨 오빠 모양으로 그 다음에 마르다 있고 마리아 있고. 그 나사로를 만약 이 집에 사는 주인, 제일 영혼이란다면 말이야, 마르다가 이 몸 쯤 되고, 마리아가 우리의 이 맘, 마음, 마음 쯤 될거예요. 셋이 한 집에 요렇게 살아!
그런데 예수님이 셋을 다 사랑하는 거지만 더구나 영혼을, 나사로를 특별히 사랑해. 그래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습니다.” 그건 인생 전체에 대한 말이라고.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앓구, 병들었습니다, 이 인생 전체가 병든 인생 아니냐? 영혼은, 하나님의 모습은 모습이지만 병든, 병든 씨앗 씨알 아니냐? 그거를 그 마르다와 마리아가 와서 말을 해요. 우리의 이 몸과 우리의 마음이 자기들은 힘이 없지. 병을 나게 한 것도 아니고 고칠 힘도 없긴 없지만 자기의 오라비가 앓는 줄은 알아요. 앓으면 오라비 혼자 아픈 게 아니라 자기네도 아픔을 같이 당할 수밖에 없는 한 집안의 아픔이 돼요. 그러면 사랑하는 그 거기 그 생명의 주인에게, 그 능력 있는 분에게 호소 안할 수가 없어. 그것이 종교 아닐까? 그 당시에. “주님!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당신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물론 사랑하지만 특별히 그를 대접하느라고 그래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나사로 안에는 자기 둘이 포함된 말이예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앓습니다. 그 사람이 앓고 있는 동안에 그 안에서 우리도 둘이 다 앓고 있습니다. 셋이 다 앓습니다. 이 집이 왼통 앓고 있습니다”
이 세계가 왼통 앓는 세계라고, 그런 말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이 그림을. 이 천 년 전에 있던 일을 하나로만 보지 말고. 하나로만 봐서는 이것도 물론 뜻이 있긴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옅어요. 왜 그런고 하니, 내 그런 말 했다가 언제 한번 젊은이가 저 울면서 야단을 해서, 그 이는 아주 지금 교회 좋은 장로님입니다만 나 아주 혼난 일이 있습니다. “아, 저 예수님이 고쳐준 것도 아마 어떤 때는 도로 되지는 일도 있었던 것 같더라. 아, 저 낫는 것도 있고 안낫는 것도 있는지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랬더니 “아, 이제 그런 소리하면 공산주의자들이 기뻐하겠지만 왜 우리 크리스천(christian)이 이렇게 모욕을 합니까?” 그러구 그래서 “아, 그러면 그만 두자. 난 뭐 그런 뜻으로 한 건 아니다” 그리구 해서, 어려웠던 일이 있긴 있습니다만, 그런 의미가 그렇게 깊이 생각을 하면, “주님 보십시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호소하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오면 종교의 문제가 아주 질적으로 변해
그러는데 말로 할 수 없는 그 뒤를 더듬어 보아야, 그러면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참 좋지 않아요? 왜 그런고 하니, 이제 하려던 얘기입니다만, 만일 나사로를 불쌍히 여기고 라사로 사는 것만이 그 문제의 의미의 다였다 그런다면 말이야, 뭐이야? 그적에 살렸으면 뭘 하겠어? 지금 라사로 있어? 그적어 나흘만에 살렸지만 지금은 다 죽어 없어졌지만, 왜 또 살리지 않았나? 그 사람을 살리는 건, 그것은 한 심볼이지. 인생의 생명이 이것이 참 생명이 아니다, 제가 앓지만, 누이동생이 오빠를 그렇게 사랑하지만 앓으니 이렇게 보고 있지 어떻게들 못한다, 죽으면 내다가 묻을 줄이나 알았지 살려낼 줄은 모른다, 그런데 인생의 의미가, 거 인생이 형편이 없다, 애비라고 그러지만 애비가 애비가 아니다, 자식이 죽어도 어물어물 나가서 지고 나가 묻을 줄이나 알았지 살릴 줄은 왜 모르냐? 살릴 엄두도 내지 못하지 않느냐? 그런데 네가 뭣이 아비냐?
그런 의미가 거기 들어 있지 않을까. 그럼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습니다.” 하는데 인생으로서도 비통하고 부끄러운 말, 아니 참 할 수 없는 말, 그렇게나 생각을 해보아야 우리들의 속에 종교적인 요구라는 게 무언지, 그래야지 그것이 마리아, 나사로 하나의 일, 그 전에 살려주고 또 죽을 걸 살려놓으면 뭘 해? 쪼금, 한 번 죽으면 그만이지 두 번씩 죽게끔 그건 무슨 일이야? (웃음소리 들림)
그러니까 그 나사로 그때 그 육체의 생명 그거 살리는 것이 의미가 아니여! 어차피 그건 이다음에 살려놔서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죽었구, 나사로도 죽었구, 고쳐주었던 것도 그 담에 다 죽고 그랬지. 그게 뭐 한 번 예수가 고쳐주었다고 장생불사(長生不死)로 지금까지 있는 게 아니야. 그럼 예수는 과거의 모든 종교에서 했던 모양으로 장생불사 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인류가 처음엔 몰라서 종교의 문제가 임모텔리티(immortelity)라, 장생불사에 있는 줄 알았지 예수님에게 오면 아주 질적으로 변해. 장생불사는 뭐이 장생불사래? 이거 안 죽는 게 장생불사야?
그렇지 않아! 이건 썩어진다, 이건 죽어져 죽어져, 그 속에 썩지 않는 그 영원한 생명이 있는 그게 생명이지 이게 기냐? 그래 그걸 말로만 해? 실제 자기가 해봐! 그래 죽는 거 볼래? 나도 죽고 만다, 예수 십자가에 죽고 말았어요. 살아오면 그게 살아난 줄 아시오! 그적에 살아났다, 그게 살아났다면 오늘날 어디 있어요? 어디 숨어 있나요? 굴 속에 있나요? 어디 뭐 뭐 인제, 왜 그럼 그 적에 아주 없어진 건 육신은 살아서 그러더라! 어딜 가 있다가, 별 위에, 별 위에 가 있나요?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말을 한다구 하면 할 수가 없어요, 육체의 부활이라 그러구 그런 말 합니다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게만, 간단하게만, 감정으로만 믿을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 어차피 이거는 설명을 한다면 이것은 보다 깊은 생명에, 보다 높은 생명에 대한 상징이다, 그걸 나타내는데 의미가 있다, 이 세상의 아버지의 의미가, 아버지가 뭘 정말 아버지 노릇 하냐? 나 죽을 때는 젊어서 장가도 가기 전에 죽어도 아비가 어쩔 수 없는, 나 죽는 것만 들여다 볼꺼다. 모처럼 외딸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애끼던 딸이 자동차에 치여서 병신이 되야 돼, 에미가 ‘제 생명으로 바꾸지’ 아이구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그러구 말지,
이 실제 생명의 세계를 더듬을 수가 있다
그럼 무슨 에미 자격이 뭐냐? 아버지 어머니라고 그러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실지 자격이 정말 없다, 없지만 그럼 어디가 의미가 있나? 응, 이 세상에서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살아보면, 정말 내 생명의 아버지 어머니 되는 걸 있는 걸 짐작을 할 수가 있어. 참~. 아버지 어머니는 뭔고 하니 참아버지의 심볼이야! 이 세상의 나라는 참나라의 심볼이야! 이 땅위에서 가지고 있는 생명은 참생명의 심볼이야!
모두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잖아요? 몰라요, 신학자들은 이 말을 잘하는 말이라고 하는지, 부족한 말이라고 하는지 나 모르겠습니다마는, 나는 이렇게 생각해서 내게는, 그 사람들이야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함으로 인해서 이 속에 있는 보다, 이거 이 생명이 아니고 보다 확실한 생명이라고 하는 거를 체험을 할 수가 있어. 그랬기 때문에 또 남이야 뭐랬던지 간에 확신을 가지고 나는 이 말을 할 수가 있어. 그 생명이란 말이 뭐냐? 난 받은 지식이 그것 밖에 없기 때문에 고런 설명을 해. 지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좀 더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그 말 내용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말 내용을 너무 붙잡히지 마시오. 죄라구, 기독교에서 합니까 죄라구 그러지. 불교에서 한다면 아마 전도상(顚倒想)이라고 한다든지, 무슨 무명이라구 한다든지 뭐 그럴거예요. 상관없어요, 뭘로 발표가 됐든지 간에 우리 처음에 지경이 그게 무슨 지경이냐? 그러면 그래 역사적으로 있던 그 사실 그것만이 말이, 그 사실이 빙산의 일각이야. 고걸 봐서 뵈이지 않는 굉장히 보다 높고 큰 확실한 이 실제 생명의 세계를 더듬을 수가 있어.
나사로라고 한 집에 두 누이동생하고 있다가 나사로가 앓다가 죽었다, 고 며칠 있다가 살아난 그 사실을 통해서 굉장히 인류 전체에, 세계 전체에 이 세계의 근본 성격이 거기 드러나고, 그걸 통해서 보다 높은 참생명이 뭔지를 우리가 거기서, 이제 거기 내려가면 내가 참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만 그런 걸 알게 되는 데가, 물론 예수님이 연극으로 한 건 아니야요. 하지만 예수님이 예수님 된 점은 현실적인 이걸, 이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걸 이것을 표시하고 있는, 상징하고 있는 속 뜻이 뭐냐? 거길 들여다보는 데가 예수님의 놀라운 점인데 우리와 다른 점이, 다르지만 근본 다른 게 아니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 해서 우리를, 그래서 그걸 배워두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어리석은 증거
그래 두 동생이 보냈어. 그게 생각을, 이걸 생각하면 참 비통한 말이야요. “주님! 주님의, 보시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류 전체에 관한 말 아니예요?,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했습니다. 더 놀라운 말이예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이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게 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못하는, 다른 사람은 못하는 말이예요.
우리는 아까 말대로 죽음이라면 말이 막혀요. 도둑질을 하다가도 어디 순사한테 대고 “그럼 굶어 죽게 됐는데 어떡하랍니까?”, 그럼 뭐 순사도 별 수가 없어. 굶어 죽게 돼서 했다는데 뭐 밥을 갖다 주지 못하는 이상 어떻게 해? 그 죽는다는 데는, 빚을 지고도 말이야 “없습니다. 우리 집 쌀도 없고 다 죽게 됐습니다”, 빚 받으러 왔다가도 손 툭툭 털고 가지 그 어떻게 하겠어요? 다 죽게 됐다는 사람하고 빚을 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죽는 고 제 일보 전(第一步 前)이 뭐냐 하면 병이라는 거예요. 앓는 건 마지막에는 죽는 거, 앓다가 죽는 거. 그 병의 결과는 죽는 거. 그러는데 거기 대한 말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사람은 다 뭔고 하니, 앓다 앓으면 죽는 거, 앓으면 죽는 건 줄. 그러니까 우리나라 보시오. 이 나라가 어떻게 된 나라인지. 라디오 TV에 광고라곤 주로 약 광고 참 많이 해. 죽긴 참 싫어하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약이 정말 고칠 수 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건만. 그게 우리나라 사람이 어리석은 증겁니다. 좀 깨달은, 뭘 아는 국민은 약, 광고를 도대체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무식한 사람일수록 광고를…….
그러게 광고 내는 사람이 뭘 겨누냐 그러면 암시를 겨누는 겁니다. 사람은 의식적으로만이 아니라 무의식리(無意識裏)에 암시를 받아도 암시의 지배를 받는 겁니다. 신문에 자꾸 자꾸 이렇게 내놓으면 말이야, 슬쩍 슬쩍 안보는 것처럼 그저 그저 그런 것도 있다 그렇게 지내간 갔어도 이 내 이성보다도 이 속에 있는 잠재의식이 그것에 암시에 그 서제션(suggetion)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어딘지 그 약을 사 가게 된다는 거예요. 장삿꾼이 그걸 노리기 때문에 자꾸 그래.
그런데 여러분 딴 이야기가 됩니다마는 이거 참 어떻게든지 이런 점을 좀 우리가 사회에 시정하고 그래야 됩니다. 장삿꾼은 자기 돈 벌기 위해 그러는데 그걸로 인해서 우리의 자유를 얼마나 침범하냐 그말이야. 내가 물건 살라면 사고 싶은 데 가서 사면 그만인데 말이야, 이걸 내가 자는 시간에도 라디오 소리 들려오지 기차에도 들려오지, 듣기 원하거나 듣기 원치 않거나 간에 자꾸 강제로 우리 속에 이걸 자꾸 줘야 장사를 해. 이렇게 하면 저것들이 암시를 받고 이다음에 이제 우리 물건 사게 된다, 이래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게 얼마나 많아?
절도 강도는 아주 정직한 사람들
집이, 아! 이따금 들어와서 물건 가져가는 저 절도, 강도는 그거는 또, 아주 고거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웃음) 이제 그 안하는 척 하면서 우리 물건을 도둑질해가는 이거야말로 참 그런……, 이게 우리 상식이 좀 발달이 돼서 이런 걸 저절로 피차 하지 않고 또 사회 규정으로도 그런 일이 좀 없도록 그렇게 해야 되겠는데, 이게 참 멀었습니다.
왜? 서울역, 정거장마다가, 저희는 잘하느라고 한다고 해서 틀어놓고 그랬지만 잘하는 면만 보지 말고 다른 면으로 보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왜 그 끼치는 해독이 얼마나 많아? 얼마겠나 보시오. 그것을 도무지 돈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말이야, 우리가 그런 손해를 다 받고 있어요. 왜? 자본주의 때문에. 그 사람들이 왜 그런고 하니, 라디오 방송 하려면 그 장삿꾼에게 돈 받아먹어 가지구야 하고, 돈 받아먹었으니까 광고 안 내줄 수 없지. 그럼 광고해야지. 하면 손해 받는 건 누구냐 하면 이 우리, 우리 아니예요?
누가 나라를 해 달래? 정치해 달래? 정치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저희가 한다고 그러고, “우리 정치하니까 세금 내야 하지!” 그러고. 국민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붙여가지고 우리 걸 빼앗아가요. 그걸 꼼짝 못하구 우리가 내야 돼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야, 이 장사로 되는 일, 장삿법이 없는 세계를 생각해보시오. 그런 일이 없을 건데, 이 도시 문명이 장사문명이야, 이게! 인더스트리얼 시빌리제이션(industrial civilization), 기업 문명이기 때문에 말이야, 장삿꾼놈들이 그저 마구로 우리의 정신적인, 물질적인 걸 마구 세계를 빼앗아가잖아?
그런데 이런 점은 생각을 해서 깨달아가면 좀 고칠 수 있습니다. 노력을 하면. 그건 이제 여담입니다만, “병은,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야”, 이건 놀라운 말이야! 누가 감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래 첫째 놀람은 예수님이 뚫러 보신 겁니다. 죽을 병인지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참 명의지! 어이 저~ 그러나 이건 뭐 의사 노릇을 하느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근데 병 중에 죽을 수 있는 병이 있구 죽지 않을 병이 있구 그래요. 구경(究竟)엔, 마지막엔 다 주검에 이르지, 다 이르지만 직접으로 본다면 죽을 병 아닐 병.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보니까 남들 보기에는 이번에 죽는데, 그 병 때문에 죽는데, 예수님 보는 병엔 안~ 죽어! 자기가 있다가, 그러구 나면 어느 의미론 예수님은 그건 뭐라고 그럴까요? 좀, 좀 나쁜 말이 됩니다만 이제, 요 나 잘 아는 우리 친구 의사에게 그럽니다 의사, 뭐 정직한 의사니까, “뭐 의사가 고치나요? 병은 저절로 낫는 건데 의사는 괜히 돈을 받아먹는 겁니다”, 그래 인제 그런 의미로 보면, 나사로는 저절로 살 사람이 돼서 살았는데, 예수님이 살린 것처럼 돼 있지. 내가 참 고약한 말 내가 합니다.(웃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니라, 거길 아는 데가, 거기를 들여다보고 죽지 않을 병인 줄 아는 데가 그 정말 생명의 주인이 되는,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또 그 뿐만 아니라, 이것은 나사로의 그 병이, 그 병이 그때에 죽지 않을 병이라구 하는 그것만이 아니라, 도대체 병은 죽자는 거 아니다, 그렇게까지 보아야 옳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말
도대체 병이라는 건, 사람은 병 나면 죽는다, 그래서 세간을 팔아서라도 약을 사먹어야 된다고, 어떻게든지 나이 많아 가면 보약을 아뭏게두 먹어야 된다고 하는 건, “어이 죽으면 단데 뭐뭐”. 세상에 미운 놈도 많구 슬픈 일도 많다구 그래두 그래두 부득부득 살아야겠다 그러는 건,(웃음) 사는 것만 하는 삶의 지상(至上)이지. 그러느니, 그러는 인생이 아니야, 그것과 다른 인생 아니예요?
그런데 그건 왜 그런고 하니, “죽으면 다”라고 생각하니까, 죽는 걸로 모든 게 결정이나. 그런데 죽는 길이 뭐냐 하면, 앓아 앓아서 죽어. 앓아서 죽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 때 그 병만이 아니라, 이 일을 넓혀가면 어떤고 하니, 도대체 병이라는 건 죽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그래. “그럼 뭐이요?” 그건 저번에 소경 고칠 때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닌 쉬운 말 같지만, 굉장한 혁명을 일으킨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내게……”, 이 말 때문에 얼마나 인간의 정신에 밝음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이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 병에, 병만이 그러겠어요? 일체 모든 것의 구경 뜻이 다 뭔고 하니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거요.
그런데 그거를 한 교리로 외우라면 누구든지 외와요. “인생이 살아가는 목적이 뭐죠?” “하나님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그래 그렇게 하면 세례 문답에 합격이 됐으니까 그건 할 수가 있겠지만, 그래 그걸 얼마큼 알았나? 어느 만큼 내가 체험해 알았나가 문제가 돼! 그런데 종교 이거는 남이, 다른 사람이 그 말 할 때 그 사람은 예수님이 이 말씀한 건 그건 참 깊은 체험에서 나온 말인데 말예요, 그걸 교리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이 그러더라. 그러니까 그래 그 말이 옳은 줄 안다”, 이러기만 하면 그것이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해독이 돼! 이게 걱정이 돼! 애가 소화될 능력이 없는, 할 수 없는 물건을 먹으면 양분이 못될 뿐만 아니라 죽어! 그걸로 인해. 여기 들어가면 그게 생명에 해독이 되잖아? 그런 모양으로 남이 체험한 진리를 그 뜻을 내가 해석을 못하고 그대로 통으로 생키면 그걸로 인해 죽는단 말야. 말에도, 음식에도 체하지만 말씀에는 더 체해! 이 교리, 종교 말씀은 더 체해. 체해 버려서 죽고 말어. 그러니깐 이게 참 어려운 일이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 이 이런 말을 “이대로 돼” “하나님의 영광 돌리기 위해서요”, 그러는 말을 그대로 외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우리가 다 그거 하구 있잖아요?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만 빠지지 않아요. 얼마나 많으냐 그 말예요. 이걸 될수록은 씹어서 씹어서 그래 “아, 그렇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니 그런 거 아니라, 참 생각을 해보니까 그렇다” 그러고.
조금씩 약을 주면서 돈을 뽑아 먹는 모양으로
그러니까. 예수님이 저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다구 하는 건 괜찮은데, ‘밖’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게 아니라 ‘속’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라 그 말이에요. 예수님이 ‘밖’에 있는 한까지는 예수님이 내 주님이 ‘아니’라 그 말이에요. 여기 내 ‘속’에서 발견이 될 때 비로소 내, 내 생명의 주(主)가 되지. ‘속’에서 그러는 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것도 모르겠으면 그만 두라! 거기를 한 것처럼 하는 데가 협잡이라 그 말이야. ‘속’에서 예수님 보는 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런데 다 잘못이야. 찾는 사람도 그러고, 종교에 지도한다는 사람도 그러고 게까지 가려고 하지 않아! 지도하는 사람도 그 사람이 제가 깨닫게끔 해줘야 하는데 그럭 하려고 안해. 나쁜 의사가 병을 병대로 쓰윽 둬 두고 조금씩 조금씩 약을 주면서 돈을 뽑아 먹는 모양으로 말이야, 이 세상에 종교 지도자가 그거야! 병은 병대로 두고, 약은 이렇게 하는 것처럼 하면서 이렇게 자기가 돈을 버는……. 이 세상에 정치 지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의 지도라는 것도 그런 거 아냐? 정말 그러면 그 사람이 뿌리가 빠지도록 둬야 돼! 뿌리가 빠지는 건 ‘밖’에서는 못 뺀다 그 말이야. ‘속’에서 내가 빼야지! 이제 이게 생명의 원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절대 강제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도대체 강제 않는데 아니 정말 밖에서 뺄 수 있는 거 같으면 말아야지 마지막절에라야 가롯 유다 붙잡고 말이야. 눈물이라고 짭짤하게 제발 그러지 말아주려마. 그랬을 거야 안그러지 않았어요. “너하는 대로 해라. 너하고 싶은걸 어서 해라.” 알아들으니 만큼 말하곤 제가 하길 기다리지말이야 붙잡고 “야 네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네가 날 판단 말이냐 이 자식아 이게 무슨 일이냐 내가 다 안다 네가 팔 생각하고 있지” 그러고 그렇게 안한다. 왜 안그랬을까 몰라 그랬을까 이거 죽을병인지 아닌 병인지 아는 사람이 그걸 모른단말요. 알긴 알고도 안그러지 않았어요. 왜 그랬어. 잔인해 그랬어요, 그런건, 살아 생명의 원리가 그럴 수밖에 없어 그건 내가 친구데 대접할 수 있는 내 친군데 친구로 대접할수록 강제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일수록 일일수록 내가 억제로 할 수가 없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 잔이 내게서 떠나면 좋겠습니다.” 이 잔이 네게서 떠난다 그럴 때 아마 유다 생각을 그 가운데 제일 많이 했을거예요. 그러지 않았을까요 제일 괴로웠을, 하지만 뭐 아버지의 뜻이라면 할 수 없지 받게 해주시오. 그런데 이게 생명이란 사랑으로 되는 거기 때문에 강요 없어 어디 가서 스스로 자발해서 그러는 게 이게 대단히 중요한 건데.
근데 그 점을 자꾸 생각을 안하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외국손님들이 다 와서 한국의 기독교 굉장하다고 그래요. 우리가 보기에는 뭣이 굉장해 한국의 기독교 이렇게 된다면 대가가 요거냐 남북이 갈려가지고 정치 이 꼴 되는 요것이 과연 이게 그러면 뭐냐 만일 종교하고 문화하고 상관함수관계가 없다면 모르지만 있다고 그런다면 한국에 기독교를 칭찬을 할수록 이건 기독교 못쓸거 아녜요. 그럼 뭐여 다른 나라가 동양의 나라 중에서 가장 제일 기독교가 강한 나라라고 했는데, 정치는 제일 경제도 제일 더러운 나라니 말이야. (녹음10, 3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