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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드 대학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홀리요크 센터 옆을 지나칠라치면 어느 할머니가 말을 걸어온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꽃분홍 민소매 원피스에긴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귀는 물론이고 코와 혀에까지 가느다란 금고리를 단 이 할머니는 한 일흔 살쯤 되었을까.
지나가는 행인에게 바람처럼 나타나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어제 저녁 소나기 지난 뒤 그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았냐거나, 오늘 아침은 제법 쌀쌀한데 찰스강 가을이 기대되지 않느냐거나, 발레 연습하는 우리 딸 발모양이 얼마나 예쁜지 보여주고 싶다는 등 높은 소프라노 목소리로 극적인 제스처를 섞어가며 사뭇 시적으로 말한다. 이 할머니가 어제는‘보스턴 글로브’지 한 면을 접어들고 오늘 이 신문에‘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신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게 참 이상해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 "CANADIAN INTERIOR" /CORNELIUS KRIEGHOFF)
무슨 충격적인 일로 아예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할머니 말이지만, 새삼 생각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신문에 온갖 말이 다 나와도‘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예는 별로 없는 듯하다.
특히 이번 여름 어느 외국인이 한국에서 신문으로만 우리말을 배웠다면, 한국어에는 아마도 ‘사랑', ‘희망', ‘가능성', ‘조화', ‘평화’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마지막 문화 칼럼을 신문에서는 획기적인 일, 즉‘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짧은 메시지를 독자와 함께 나누며 마무리하고 싶다.
서강대학교에 계시다가 모국인 필리핀으로 돌아가신 페페 신부님은 작년에 파킨슨병에 걸려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선고를 받았다. 가끔씩 좋은 글이나 이야기를 발견하면 내게 주시는 신부님이 며칠 전에는 인터넷에서 떠도는‘내가 이제야 깨닫는 것은…’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 오셨다.
(: The Artist's Mother,” / James McNeill Whistler)
“내가 이제야 깨닫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 기적은 정말 일어난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숨길 수 없다는 것,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교실은 노인의 발치라는 것,‘하룻밤 사이의 성공’은 보통 15년이 걸린다는 것, 어렸을 때 여름날 밤 아버지와 함께 동네를 걷던 추억은 일생의 지주가 된다는 것, 삶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아서 끝으로 갈수록 더욱 빨리 사라진다는 것, 돈으로 인간의 품격을 살 수는 없다는 것,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작은 일들 때문이라는 것, 하느님도 여러 날 걸린 일을 우리는 하루 걸려 하려 든다는 것,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영원한 한이 된다는 것, 우리 모두는 다 산꼭대기에서 살고 싶어 하지만, 행복은 그 산을 올라갈 때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페페 신부님은 덧붙였다.
(The Singing Butler /Jack Vettriano)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모든 진리를 삶을 다 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너무나 쉽고 간단한데, 진정한 삶은 늘 해답이 뻔한데, 왜 우리는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일까?”
지상에서 삶을 정돈하는 노사제가 보낸 글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 깊게 들렸을까. 진정한 삶의 해답이 무엇인지 나는 반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요새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 ‘권력', ‘부', ‘재테크', ‘대권’ 등 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사랑으 로 감사드립니다. -------------------------------------------------------------------------------
(고 장영희 교수께서 미국 캠브리지 계실 때 기고한 글입니다.) | |
첫댓글 그래서... 어른들을 존경합니다...^^
아름다운 글입니다. 나를 성장하게 하는 글입니다.
귀한 메세지군요. 그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