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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2부 - 군 생활을 마치고...
1983년 6월 12일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3년 가까이 군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였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머니 역시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큰형님은 당시 동아건설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있던 고종사촌형의 도움으로 동아건설 콘크리트 배차프랜트 운전 기사로 취업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 약 삼 년간 해외 노동자로 출국해 있었습니다. 큰형님은 자신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해외근무를 마치고 국내에 다시 복귀할 때까지 큰형수님과 조카들을 경상남도 사천에 있는 '고모'집 근처에 살도록 했습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저는 직장을 얻고 독립할 기회를 얻기까지 잠시 도움을 받기 위하여 그곳에 내려가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사천읍내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정자에서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가질 생각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정자에 왠 보따리 같은 것이 놓여져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고 그 곁에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서로 눈이 마추쳤는데 보니 저보다 두세살 어려보이는 여성이었습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손숙임'이란 이름을 가진 자매였고 부산에 직장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천읍 시장 노점에서 과일을 팔며 살고 계시는 어머니를 매주 찾아 뵈로 오는데 그날 우연찮게 저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잠시 서로 멋쩍다 느낄 틈도 없이 제 눈에 그녀의 성경책이 들어왔고 저는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알고 싶다면서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그 자매 역시 머뭇거리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십자가 그림을 그려가며 에덴 동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먼저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 교회생활을 시작할 것을 권면해 주었습니다.
저는 손숙임 자매와 헤어진 후 곧바로 그녀의 권면을 따라 사천읍 장로교회를 방문했고 청년부에 속하여 난생 처음으로 아주 잠깐이었지만 교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회 청년부에는 근처에 위치한 사천 공군부대에 근무하던 직업군인 부사관 몇 명을 포함해 대략 10여 명이 함께 섞여 지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문제는 제가 그곳에서 교회생활을 가졌지만 정작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복음을 처음 들려준 손숙임 자매만이 한번은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 "형제님! 형제님이 만약 오늘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갖고 계신가요?" 질문을 던졌던 기억 외에는 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필요였던 "생명얻는 구원"에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내던중 큰형님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삼 년의 근무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왔고 직장을 타도시로 옮기는 바람에 저는 경남 사천읍에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물론 고모부와 고모 내외 분과 사촌 여동생과는 이웃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크게 일상의 변화없이 지내던 가운데 1984년 12월 25일 저와 가장 친했던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는데 아내 역시 친구 신부의 절친이었던 인연으로 인하여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가정을 이루어 1985년 첫 딸 '국화'를 낳았습니다.
경남 진주에서 이렇게 아내와 어린 딸과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던 중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어머니가 어떻게 수소문해 알게 되었는지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때가 1987년 11월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 생각해보니 이때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제 삶의 환경 안으로 은혜의 손길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시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서울 생활에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나름 적성에 맞는 여러 종류의 일을 배우고자 노력했지만 안정된 직장을 잡지 못하고 살던 와중에 큰형님께서 어머니와 제가 살고 있던 서울 은평구 수색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형수님을 통해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어보니 큰형님께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근무를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 동아건설에 재취업해 지내던 중 동료들 간에 회식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다가 동료 한 사람이 차에 치어 불상사를 당하는 사고가 있었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회사에서 퇴직을 당한 큰형님은 매일매일을 술로 지내며 돈과 건강을 다 잃어버렸고 결국 서울에 사는 어머니를 의지해 재기해 볼 생각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서울에서 다시 만난 큰형님의 몸골은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알콜 의존증으로 인하여 양손은 마치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심하게 떨고 있었고 마음 상태 역시 심각하게 느껴질 정도로 황폐화 되어 보였습니다. 거의 10년 만에 만난 자식들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저의 어머니의 속마음은 밖으로 그다지 표현은 안 하셨지만 아마도 비참하게 느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큰형님은 술로 인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생명에 대한 위기감을 스스로 감지해 깨닫고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 있는 국립 정신병원 알콜중독 치료센타를 찾아갔지만 이미 의학적인 도움의 굴레를 벗어날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른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병원 생활에 의지한채 알콜과의 단절로 인해 몸이 조금 좋아지면 퇴원했다가 다시 술에 빠져 한계에 부딪히면 알콜중독치료센타에 재입소하고 이렇듯 거의 10년만에 다시 만나 한 배를 탄듯 어머니와 더불어 저와 큰 형님의 가정은 희망없이 흔들리며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990년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며 "아들아 나랑 같이 교회에 나가면 어떻겠니?"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당시 저는 왠지 모르게 어머님의 그런 요청에 대하여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의 화답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요 어머니! 저도 좋습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를 가면 좋겠습니까?" 여쭈자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요즘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가 소문이 자자하더라 거기를 가자꾸나" 하시는 것이 아마도 저에게 말을 꺼내기 전부터 미리 생각해 두셨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은평대교구 수색지역 남성구역에 편성되어 '고성명 집사'님 구역에 배정되었고 교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와 말씀드릴 수 있지만 저의 신앙과 믿음과 삶에 있어서 보혜사이신 성령의 인도와 통제와 다스림이 이때부터 분명하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구역장이었던 '고성명' 집사님을 찾아가서 "구역장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제가 지난 시절 술을 잘못 배웠습니다. 그런 탓에 술을 절제해 보려고 노력를 해보았지만 제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술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만 제가 술을 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구역장님께 부탁을 드린 후 저의 집으로 대여섯분 교우들이 찾아왔습니다. 구역장님의 광고를 전해듣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줄 의향을 가진 교우들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저를 가운데 눞히고 함께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몇 날이 지났을까, 저는 태양빛이 뜨겁게 내리 쬐는 설비시공현장에 있었습니다. 땀이 흐르고 목이 말라 가던 중에 습관을 쫓아 알루미늄 캔에 담긴 시원한 술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마음 깊은곳으로부터 술을 마시고 싶은 이 충동을 거절해야한다는 느낌이 생겨났고 저는 "하나님! 술을 마시고 싶은 이 충동으로부터 저를 건져내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마치는 순간 제 마음 안에서 한 편의 영상이 펼쳐졌습니다. 수면 위로 시야를 가리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그런데 어디로부턴가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안개가 바람에 밀려 사라져 가면서 밝게 시야가 트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마음 깊은속에서 올라오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함께 잠시 전까지 제 안에서 술을 찾던 그 충동이 소멸되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손뼉을 치면서 "아! 지금까지 나의 삶을 저주하고 훼방하는 세력의 꼬리를 잡았다!"고 나도 모르게 크게 외쳤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작이었습니다. 이같은 영적인 체험이 있은 후 성경에서 찾아 암송한 구절이 바로 아래의 말씀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3~5).
하루는 밖에서 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큰형수님으로부터 '삐삐(무선호출기)'로 연락이 왔습니다. 큰형님이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는데 감당이 안 되니 와서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그리 멀리 있지 않았던 탓에 급히 달려와보니 큰형님은 초여름 뙤약볕 아래 깊은 숨을 몰아쉬면서 정신을 못차리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마침 어떤 나이드신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을 이런 상태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숨을 거둘 수도 있다"면서 이렇게 심하게 숨을 몰아 쉬는것 봐서 매우 위험한 상태로 보인다며 "빨리 병원으로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주머니의 재촉을 듣고 곧바로 112센타로 연락을 했지만 경찰은 술에 취한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면서 다른 방법을 알아보라며 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전화를 연결해 지금 매우 위급한 상황인 것을 이야기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해 겨우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동공 반응 등을 해보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신촌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이 현재 환자가 "급성알콜중독"에 의한 쇼크 상태에 빠졌는데 회복이 안 되어 쇼크사 할 수도 있고 깨어나더라도 심각한 휴유증이 동반될듯 보인다는 소견을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큰형님은 겨우 회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큰형수님은 시동생인 제게 "더이상은 형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겠다"는 말과 함께 이러한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저역시 이미 알콜중독자의 가정의 말로가 지옥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형수님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겨우겨우 위험했던 상황과 시기를 잘 넘기고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또다시 큰형님께서 심각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중증 말기알콜중독 상태에 빠지면 보통 15일에서 한 달 가까이 장기 음주 상태에 빠지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환청, 환시를 경험하다가 끝내는 생명을 잃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저의 큰형님 역시 그 과정을 가고 있었습니다.
형수님과 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직감했고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안에 같은 수색지역에 살고 계시던 '정 훈' 집사님이 형수님과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이분은 앞전에도 저의 집에 찾아 오셔서 저의 필요(?)를 위하여 함께 기도해주셨던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저의 큰형님(탁봉춘)을 한 번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고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해보지 않겠느냐? 권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다른 길에 와있었던 형수님과 저는 '정 훈' 집사님께 "그렇게만 해주실 수 있다면, 또 그렇게 해서 저의 큰형님이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될 수만 있다면 참으로 감사하겠다" 말씀을 드렸고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을 작정하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하는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저녁 뜻을 같이한 교우들이 모였고 말씀을 읽고 함께 큰 목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형님은 저녁 기도모임 시간이 되면 밖으로 도망을 가서 다시 데려다가 진정을 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술을 마시도록 기회를 주면서까지 처음 약정했던 일주일이 다 되었습니다.
일주일 마지막 시간까지 함께 기도했던 교우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저만 홀로 형님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형님을 대신한 회개의 영이 저에게 임했습니다. 그렇게 통회자복하며 큰 목소리로 울면서 얼마의 시간을 부르짖던 순간 제 마음 깊은 속에서 큰 형님의 삶을 저주하고 훼방하는 악한 세력을 향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를 해야 한다" 느꼈고 그렇게 입을 열려는 순간 마치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사도행전 19장 16절의 상황과 비슷한 일이 저의 몸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저의 눈이 돌아가 물체가 여러개로 보이며 혀가 굳어지고 손과 발이 마비되며 몸이 위로 솟구치듯한 순간이 두렵게 엄습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분명 "악한 영이 훼방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심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영은 묶임을 받고 나의 큰형님에게서 떠나갈지어다!" 선포를 마치고 털석 주저 앉는 그순간, 방 한쪽 어두운 구석에 누워있던 저의 큰형님이 제 이름을 부르며 "봉주야! 내가 너의 기도를 다 듣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실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이러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가 큰형님의 가정과 저에게 임했고 큰 형님은 그렇게 '술'로부터 놓여남을 받았습니다. 약 35년이 지난 오늘까지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당시 저의 큰형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도해 주셨던 그 '정 훈' 집사님은 자신 역시 심한 당뇨병으로 인하여 매일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자신의 필요를 내려놓은 채 '탁봉춘' 형제를 위하여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해 주었기에 이와같은 축복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저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속한 사회사업선교회 총무실에서 봉사를 하며 교회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결혼해 대전에서 살고 있던 처제가 서울 저희 집에 놀러왔습니다. 당시 살던 집은 단칸 방이었지만 주방과 방 사이에 미닫이 문이 있어서 저는 주방 쪽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자려다가 낮에 교회에서 당시 매우 소문이 자자했던 '원종수 권사'의 간증(당신은 진정한 크리스챤인가?) 테이프를 소리를 낮추어 듣고 있었습니다. 간증 가운데 원종수 권사가 '방언'에 대하여 자신의 간증을 전하는 부분에서 저는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테이프를 다 듣고 자리에 눕기 전 짧게 기도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순간 저의 혀가 꼬이면서 방언이 터져나왔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구나! 생각하며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역동적인 감흥과 부흥을 느끼면서 저는 곧바로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여의도 순복음 교회 철야예배에 참석해 방언(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사람의 혀를 직접 지휘하시는 데 그것이 바로 방언이다.-W.Nee-)을 감상했습니다.
이처럼 주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과 전혀 다른 기쁨 속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 옥상을 거닐며 기도하던 중에 저는 하나님의 자녀로의 첫번째 부르심과는 다른 종류의 두번째 부르심을 영 안에서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같은 두번째 부르심은 사람의 필요가 아닌 하나님의 어떤 필요에 따른 부르심이었기에 저는 이같은 부르심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를 시험하고 분별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아내에게 말하고 이 부르심이 하나님께로부 온 것인가? 맞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시고 나를 부르셨는가? 를 분명하게 알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취할 것인가? 생각 끝에 금식하며 기도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냥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경기도 오산리에 있는 최자실 금식 기도원을 찾아가 3일을 작정하고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3일 간의 기도를 마치기 전 뭔가 부족하고 와닿지 않는다는 생각 끝에 기도를 일주일로 연장했지만 역시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마음 안에서 다니엘의 21일간의 기도가 생각이 났고 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간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금식하며 기도해본 적이 없었던 저는 앞으로 남은 2주일을 어머니께서 섬기고 계시던 군산 호렙산 기도원에서 마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21일간의 금식 기도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제게 두 가지의 이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시 저와 같은 두번째 부르심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회자의 길을 선택해 신학을 공부를 시작했지만 저는 이상하리만큼 그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상담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는데 그 상담하시던 전도사님은 제게 감리교 신학대학을 추천하였습니다. 한번은 은평대교구 수색지역을 담임하던 여성전도사님께 "신학교를 가고자 하니 추천 도장을 좀 찍어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더니 바로 대답하기를 "다 신학공부해서 목사가 되면 성도는 누가 합니까?" 이러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도 그분이 보시기에도 제가 신학을 공부하여 목회자가 될만한 영성(?)이 부족해 보였던가 봅니다.
어찌어찌해서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자체 운영하는 신학교에 합격을 했지만 역시 믿음의 확신이 서지를 않아 내려 놓았습니다. 그러던 중 성령께서 제게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교회생활이나 봉사하던 환경 안에 특별한 문제가 전혀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여의도 순복음 교회, 교회생활이 성경과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성령 안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속 복음서에서 보여주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일게 된 것은 결코 사람에게서의 가르침이 아니였습니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이 주도하는 예배시간이 되면 교회 문 밖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목사님의 예배시간이 끝나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가장 앞자리에 가서 앉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은 "이것은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성경속 복음서에서 보았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함께 동거동락하며 12명이었지만 지극히 예수님과 직접적이며 개인적이었습니다. 저는 끝내 이같은 환경을 만나려면 개척교회에 가서 목회자와 가까이서 지내며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 최선이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아내를 설득하여 옆 동네에서 교회 성도가 약 20명에 미치지 못하는 개척교회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있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을 찾아 내딛는 첫번째 걸음이자 시작이었습니다.
간증 3부 내 안에 조성된 첫번째 창조에 속한 것들의 허물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