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단은 그 구조가 특이해서 보통 4각의 돌을 이용한 데 비해
여기에서는 8각 모양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8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단의 맨 윗돌에는 위층 기단을 괴기 위한높직한 8각의 괴임돌이 놓여 있는데,
이곳에는 연꽃무늬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위층 기단은 매우 높으나 각 면에 꾸밈이 없다.
다만, 기단의 맨 윗돌 아랫면에 다소 두툼한 느낌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둘러놓았다.
탑신과 닿는 곳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을 두어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기단의 꾸밈새는 석탑의 기법이라기보다는 불상의 기단 기법으로 보이며,
덮개돌 윗면의 높은 괴임 형식은 9세기 통일신라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수법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에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 2·3층은 3단인데,
조각이 얕아서 다소 무거워 보이긴 하나,
네 귀퉁이가 한껏 위로 들려 있어 아름다운 모습이다.
기단의 꾸밈새에서 보이는 특이한 양식,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탑을 만든 시기는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절을 건립할 당시
불상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문화재 지정: 국보 제63호조성: 신라 경문왕(景文王) 5년 (875년)
이 불상은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 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 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지권인(智拳印)은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의 수인으로 보리인(菩提印), 각승인(覺勝印)이라고도 한다.
이 수인은 금강정경(金剛頂經)에 기초를 둔 것으로
주로 밀교계의 대일여래가 취하는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지권인은 오른손이 왼손 검지를 감싸고 있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도 있다.
전자를 우권인이라 하고 후자를 좌권인으로 분리한다.
자세한 것은 비로자나불 수인에 대해 후술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 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 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신중탱
범종과 법고
첫댓글 성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