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중 미국에서 돌아온 ‘석양의 무법자’ ‘연애계의 황태자’ 이호연이 나타난 것이다. 호연은 서울 광진구에 있는 워커힐호텔 피자 동산(pizza hill)지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자신은 미국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LA에서 조그만 로펌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작은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에 6개월 가있고, 한국에 6개월 머문다고 했다. 유럽에도 6개월 가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계산하면 이상하게도 일년이 18개월은 넘는 것 같았다.
말끔하게 신사복을 빼입고, 명품 넥타이에 까띠에 손목시계를 찼다. 진한 프랑스 향수를 뿌렸는지 3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향기가 진동했다. 손에는 작은 손가방이 들려있었다. 남자들은 손가방에 무엇을 넣고 다니는지 궁금했지만 명숙은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혼자서 막연하게 아마 콘돔이나 현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도 미국제품이었는데 멋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필요해서 만났다. 비즈니스를 상의하고, 외로울 때 합방을 했다. 맨날 바람만 피고 밖에 나가서 정력을 자랑했지, 집에 들어와서는 부인이 힘들까봐 에너지를 아끼고 있었던 죽은 남편 때문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자신의 여성이 다 끝난 줄 알고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호연의 파워풀한 테크닉에 의해 명숙은 곧 바로 옛날의 청춘으로 돌아왔다.
그 때문에 명숙은 호연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으로 변신했다. 그러면서 노예의 작은 행복을 만끽했다. 호연은 클럽을 인수하겠다는 계획을 세상에 발표했다. 너무 갑자기 대규모 프로젝트를 공개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하노이 회담 발표 때보다 더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명숙에게도 자금을 투자하면 떼돈을 번다고 허풍을 떨었다. 실제 사회생활을 직접 해보지 않고 있었던 명숙은 호연의 국제적 비즈니스 감각을 믿고, 미국 변호사가 오죽 잘 알아서 하려니 하고 돈을 일부 투자했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5억원을 투자했다. 5억원은 명숙에게는 너무 가벼워 한동안은 자신이 ‘데스 밸리(death valley)’에 투자한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호연은 명숙 뿐 아니라, 강남의 돈 있는 남자와 여자들로부터 돈을 모아 ‘데스 밸리’ 클럽을 인수했다.
그러나 클럽을 인수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서 동업자끼리 분쟁이 생겼고, 결국 호연을 비롯한 운영자들은 하늘천주식회사 맹을성 사장에게 클럽의 경영권을 넘겼다. 이 과정에서도 호연은 얼마나 재주가 좋은지 자신이 투자한 돈과 명숙이 투자한 돈은 모두 건졌고, 다른 투자자들만 골탕 먹게 만들었다.
하늘천주식회사의 박천순 상무는 55살이었다. 젊었을 때 어느 항공사의 스튜어디스를 지냈다. 외모로 봐서는 분명히 그랬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제복을 입은 사진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수많은 사진들은 모두 동남아 여행갈 때 비행기 탑승계단 입구나 공항 구내 푸드코트 테이블에서 찍은 것인데, 승무원복장이 아닌 일반 복장이었다.
사람들이 승무원복장 사진을 보여달라고 하면, 앨범을 도둑이 모두 훔쳐갔다고 말을 돌렸다.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도둑놈이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왔으면 현금이나 패물 등 값나가는 물건을 가져가지, 여자 앨범은 왜 들고 갔나?’ “도둑이 시간이 남아서 구경하다가 너무 미인이라 사진을 모셔간 것이 아닐까?”, ‘세상이 하도 이상하다보니 그런 정신 나간 도둑도 있네.’라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은 현대판 임꺽정이라고 그 절도범을 칭송하기도 했다. 미모의 여자 앨범을 훔쳐다가 여자 구경을 한번도 못하고 죽음에 임박한 독거노인에게 기증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정치적인 날카로운 평론을 했다.
약간의 의문은 남지만, 박 상무가 무용담을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승무원을 잠시 동안이라도 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승무원만이 알 수 있는 직업적 전문용어를 거침없이 쓸 수 없었다.
박 상무는 빼어난 미모 때문에 주로 First Class를 담당했고, 그것도 뉴욕이나 파리 같은 노선만을 맡았다고 했다. 동남아 노선이나 국내선에 대해서는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치 지구 상에는 유럽과 북아메리카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박 상무를 만날 때마다 항공사 이야기와 자신이 손님으로 모셨던 유명 인사 이야기, 스튜어디스들의 애환을 들었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수없이 외국을 드나든 것처럼 착각에 빠졌다. 박 상무의 말을 요약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최상급 손님들은 우아하고 품위가 있다. 요금이 이코노미 클래스의 4배 가까이 되니까 보통 사람들은 평생 가야 한번도 탈 수 없다. 죽어서도 탈 수 없다. 장례식은 리무진으로 하지 비행기로 하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었다. 바이킹 해적들은 배를 타고 시신을 운반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이야기다.
비즈니스석은 이코노미 승객이 탈 때 지나가면서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할 기회가 있다. 퍼스트 클래스석은 차단되어 있다. 들어가고 나가는 입구와 출구 자체가 구별되어 있다.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으면, 자연히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을 차별하게 되고,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박 상무도 승무원 때는 그랬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일을 하다가 이코노미 근무를 하는 부득이한 경우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짜증이 났다. 좁은 공간에서 빽빽하게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면, 아프리카 노예선에 노예들이 짐짝처럼 실려있는 것 같았다. 퍼스트는 조용한데, 이코노미는 시끄러웠다.
식사 시간에는 음식 냄새가 진동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근무시간에는 마스크를 쓰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서 꾀를 냈다. 식사 시간이 되면, 귀에 넣는 작은 귀막이를 콧구멍에 넣었다. 양쪽 코를 막아놓으면 덜 괴로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음식 냄새 때문에 토하다가 나중에는 직업병에 걸릴 것 같았다.
문제는 코마개의 색깔이었다. 처음에는 빨간색 귀마개를 그대로 사용했더니 승객들이 밑에서 위로 쳐다보고 스튜디어스가 과로 때문에 24시간 코피를 흘리는가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 여성 승객들은 항공사 사장에게 승무원 혹사시키는 악덕기업이라고 항의서한을 보냈다. 어떤 승객은 고용노동부, 국가인권위원회, 여성가족부에 여성차별 대우를 철폐해달라고 청원서를 내기도 했다.
어떤 승객은 박 상무가 코피를 흘리면서까지 카트를 끌면서 기내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을 보고, 몸도 약하게 생긴 체중 34킬로그램의 승무원이 너무 불쌍해서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먹다가 남긴 기내식을 옆에 앉은 120킬로그램의 역도선수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그래서 박상무는 그 후 코마개를 노란색으로 바꿨는데, 그랬더니 승객들은 박 상무 코에서 누런 고름덩어리가 나오지도 않고 양쪽에 고여있다고 비위가 상해서 먹은 기내식을 토하기도 했다. 박 상무는 하는 수 없이 살색 코마개를 특별히 주문했다.
박 상무는 미국 교포로부터 교도소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한국 교포가 법을 위반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가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제주도 사람이 서울구치소에 가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한달 동안이라도 미국 여행을 가면 구경하고 놀아서 좋은 점도 많지만, 일상 생활은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다. 먹는 것, 자는 것, 기타 편의시설에서 익숙했던 것에서 떠나 있는다는 것은 정말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한국 사람이 미국 교도소에 들어가면 가장 힘든 것은 언어도 문제지만 음식이다. 기본적으로 밥과 김치가 있어야 하는데, 미국 교도소는 모두 양식이다. 햄버거나 미국식 음식뿐이다. 그리고 우유를 준다. 이런 음식 냄새로 찌들은 교도소 구내식당이나 감방 안에서 24시간 생활하는 것은 지옥이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서 마지못해 먹지만, 보름만 지나면 지겨워서 그런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죄인(罪人) 주제에 김치와 고추장을 달라고 했다가는 그날로 독방에 감치된다. 아니면 같은 방에 있는 고참을 시켜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이빨을 세 개 부러뜨린다. 세 개를 부러뜨리는 이유는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하는 교도소 규칙 때문에 그렇다.
감방 안에서 목숨을 걸고 독하게 대들면,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죄수들이 신참의 눈을 아예 멀게 해버린다. 어느 집단에나 시간이 지나면 영웅이 탄생한다. 체격이 약한 죄수가 자신보다 두배나 거구인 죄수의 급소를 공격해서 뻗게 하든가. 포크로 자신을 괴롭히는 죄수의 눈을 찔러 멀게 하면 그는 교도소에서 영웅이 된다. 그런 사실은 교도소에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서 신참들은 고참들을 하늘처럼 우러러 받들게 된다. 교도관은 점잖게 있어도 규율이 저절로 잡힌다.
박 상무는 한국에서도 있었다고 하는 교도소 이야기를 들은 사실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인간 사회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어떤 미국 시민권자가 한국에 와서 한국법을 위반하여 지방에 있는 어느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영어를 제대로 하는 교도관이 없었다. 그 미국인이 처음 들어와서 교도소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관식을 주었더니 통 먹지를 못했다. 배가 고파도 아예 밥그릇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교도관이 물었다. “What do you want to eat?” 물론 그 교도관은 그렇게 정확하게 문법적으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발음도 native speaker 가 아니고 혼자 배운 것이라 엉터리로 했다.
“What eat you?” 한국식으로 아는 단어를 열거한 것인데 ‘do’나 ‘want' 같은 단어는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미국 죄인은 떠듬떠듬 하는 교도관의 말에 ‘여기는 한국 교도소인데, 외국인인 주제에 교도소 규칙을 어기고 단식투쟁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로, 교도관이 자신을 식인종처럼 먹어치우겠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교도관이 자기 입에 숟가락을 대고 무언가 의사표시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Ah, That guy is trying to ask me what I want to eat instead of korean rice and kimchi.’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어차피 길게 말해봤자 그 교도관은 영어를 못알아 들을 것 같아서 그냥, ‘Chicken and milk'라고 말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났어도 불쌍한 미국 사람을 날로 먹어치우지는 않게 해달라고 신의 가호를 빌었다.
그랬더니 그 교도관은 신이 났다. 자신이 생전 처음으로 외국 사람에게 써먹은 영어 실력으로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오케이, 치킨, 밀크.’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 ‘Thank you very much.’를 이를 악물고 강하게 발음했다. ‘땡큐, 빼리 망치.’ 미국 죄인은 자신이 부탁을 하고 있는데, 왜 교도관이 고맙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한국은 역시 소문대로 미국과는 다른 나라구나! 미국에서는 죄인이 교도관에게 꼼짝 못하는데,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 교도관이 죄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교도소에 영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물어볼 곳이 없었다.
그 후 미국인에게는 매일 통닭 한 마리와 우유 1,000cc 짜리 큰 팩 하나가 넣어졌다. 독방에 수감되어 있는 그 사람은 처음에는 신이 나서 먹었는데, 3일째부터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교도관이 저녁 시간에 교도소 앞에 있는 통닭집에서 새로 구운 통닭 한 마리를 큰 우유 한 팩과 같이 넣어주면 세끼에 걸쳐서 나누어 먹어야 한다.
그 다음 날 아침 식사는 식은 통닭이라 기름끼가 가득 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우유도 두껑을 따놓았고, 냉장고도 없었기 때문에 맛이 변했다. 미국 시민권자는 마침내 굻어죽지 않기 위해 비장한 결심을 했다. 자신의 출신 주의 상원의원에게 호소문을 써서 보냈다.
“저는 지금 한국 교도소에 수감중인데, 매일 통닭 한 마리와 우유 한 팩만 넣어주고 있습니다. 벌써 두달 째인데 곧 영양실조에 걸려 죽을 것 같습니다. 존경하는 상원의원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이 불쌍한 죄수가 어둡고 추운 감방 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써서 보낸 편지를 받아본 미국 상원의원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법이! 세상에 이런 야만 국가가!’ 하마터면 상원의원은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질 뻔했다. 그는 즉시 난리를 쳤다. 미국 국무부를 통해 한국에 있는 주한미국대사관으로 연락을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에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박 상무가 듣지 못했다. 박 상무는 지금도 그 미국인이 한국 교도소에서 굶어죽었는지, 살아서 미국으로 돌아갔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