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북한군개입을 부정하는 엉성한 논리
–조갑제의
현대사강연(2013.5.25 부산일보강당)에서 누락·부정·왜곡된
사실
본 글은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고 22일부터 지역 원로와 유지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무기회수를 결정함에 따라 북한특수군도 작전실패를 인지하고 23일부터 비밀리에 철수하였다.
즉 북한군과 관련된 모든 작전이 사실상
종료된 23일에야 당시 국제신문의 조갑제 기자는 광주에 잠입하여
27일까지
머무르는 동안 북한군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며, 5·18의 대규모 북한군개입을 전면 부정하는 그의
지론에
대한 반론이다.
(A)누락된
사실
1) 사망자 193명 외의 행방불명자 66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
←이들 중 다수는 몇 차례 있었을, 사망한 북한군의 암매장에
동원된 후 함께 매장된 억울한 사람들이 아닐까?
2) 5월 23일 광주세무서 지하의 불에 거슬린 여러 구의 시체
←윤영규의 증언(『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제17권 69~95쪽「살육의 낮과 밤」)
3) 23일 도청 민원실강당에서 무기반납을 거부하며 일사불란한 행동을 보인 정체불명의 36인조
←초대 전교조
위원장 윤영규의 증언(위에
기술된 책자)
4) 21일 오전 8시 광주에 진입하는 20사단 지휘부를
300명이 매복 습격해서 탈취한 지휘차량 14대를
이용,
곧 바로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장갑차 4대와 차량 300여 대를 충돌 없이 탈취
5) 21일 정오부터 4시간만에 전남 17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에서 약 5천4백여 정의 총기와 화순광업소
에서 TNT 8톤을 동시다발적으로 탈취
6) 21일 오후 4시 계엄군의 광주시내 철수 후,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300명과 연합하여 총
600명이 6차에 걸쳐
광주교도소(교외에
위치한 재소자 2,700명 중 미전향 좌익수 170명)를 공격
7)
22일
오후 3시, 도청 앞에서 거행된 ”연고대생600명을 위한 환영식”에서, 서울에서 왔다고 소개된 대부분
복면을 쓴 이들 ‘연고대생600명’의 존재(『역사로서의 5·18』제2권 180~220쪽)
←이제까지 소위 ‘연고대생600명’ 중 한
사람도 정체가 밝혀지거나 5·18유공자로 된 자가 없음
8) 도청 지하실에서 TNT 8톤과 뇌관을 연결하여 계엄군 협박
9)『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 수록된 북한특수군개입에 대한 탈북자 36명의 증언
10) 5월 21일 새벽 2시 목포에 상륙해서
광주에서 작전 후 육로 귀환한
탈북자(가명, 김명국)의 증언
11) 북한에서 매년 5·18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북한에서 최고인 것들에 5·18칭호를 부여하고,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에는 5·18이 대남공작의 최고봉이라고 극찬(『솔로몬 앞에 선 5·18』참조)
12) 경찰관 15명을 인질로 삼아서 2억 원의 보상금을 탄 5·18민주화 유공자 윤기권의 월북(1991.3) 동기와
과정
13) 광주5·18재단에서 유네스코에 제출한 80만 쪽의 자료를 근거로 재미 역사학자 김대령 박사가 저술한 4권의
『역사로서의 5·18』
제2권에서 밝힌 북한특수군 600명 개입에 관련된 수많은
정황적 증거
14) 광주5·18의 수많은 사진 속에 목이나 머리에 흰 천을 두른 무장한 민간인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들은 대개
복면을 하고 그들의 걸음걸이는 북한식 거위걸음으로 남한의 군인이나 시민들과는 확연히 구분됨.
(B) 사실의
부정
1) 처녀의 유방과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다는 사실들을 유언비어로 단정
←5월 23일 광주세무서 지하에서 목격된 유방·음부·얼굴이 난자된 여학생의 시체 (윤영규의 증언)
2) 청진시에 있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묘’의 비석에는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 158명의 명단과 ‘죽은 날’
이 1980년 6월 19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 종결일로, 그들의 사망일을 이
날짜에
맞췄다는 북한인권운동가
김주호 박사의 증언
(2012.10.6 뉴데일리
기사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4632)을 “광주5·18과 무관한 수많은
추모비들 중 하나”라는 국정원의 조사 결과로써
부정함
←5·18의
북한군개입을 은폐하려고 이제까지 탈북자들에게 갖은 협박을 한 국정원의 조사는 신빙성이 없으며,
1980.6.19은 북한이 광주5·18작전을 공식적으로 종결한
날이라는 것은 탈북자들의 증언과 일치(『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참조)
(C) 사실의 왜곡
1) 총상으로 사망한 민간인 116명 중 69%가 칼빈 총상인데 모두 시민군끼리의 오발사고로 단정
←시민들의 감정을 폭발시키기 위해 북한특수군이 쏜 총상이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됨
2) 비상계엄하에 해안과 광주외곽의 경비가 철통 같아 대규모 북한특수군 잠입불가라는 주장
←기나긴 해안선의 경비는 언제나 철저할 수 없고, 당시 전남에는 치안부재상태로
광주진입도로조차 통제안 됨
(김동문
당시 전남매일 기자의 증언), 50인조로 5월 21일 새벽 2시 목표에 상륙해서 광주에 진입한 탈북자(가명,
김명국)의 증언
및 21일 오후 전남 17개 시·군의 38개 무기고를 동시에 탈취해서 광주로 복귀함
3)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전에 이미 북한특수부대는 계획된 광주봉기를 위해 수십 명 단위로 침투퇴고
있었는데도,
마치 특수군 600명이 한꺼번에 잠입한 것처럼 왜곡.
←3월 28일자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일본의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한 기사 참조
4) 6차례의 교도소 습격을 어느 민중봉기에서나 흔히 있는 순수 시민군의 행위라고 주장.
5)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광주5.18사태의 주원인이라고
주장
←5월 21일 이전의 과잉진압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 제시 없이 왜곡
6)
평소 자신이 중시한 탈북자들의 증언과 팩트를 무시하고 “그것을 원하는 자들이 그리로 몰아가고 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 “광신자를 이기려면 광신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같은 엉뚱한 궤변으로 ‘5·18의 북한군
개입’을 부정함.
쌓이는 사실(fact)을 부정하지 말고 공개토론으로 광주5·18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첫댓글 잔인한 살육이 우리 국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해야 광주민주화운동이 성립되고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한 사실이 탈북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오늘 날에도
그런 참혹한 살육을 북한특수군이 저질렀다고 하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죽습니까?
역사란 사실대로 기록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왜 사실을 두려워하고 피하려 합니까?
북한군이 개입한 것은 한 것이고 군부독재에 반대한 광주인들의 투쟁은 투쟁이지 않습니까?
저 역시 이런 글이 이 카페의 취지에 안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의 현대사에 너무나 터무니없는 거짓을 사실로 믿는 데 대한
저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제공하는 팁(tip)인데 여러분의 심심한 이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