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이씨(古阜李氏) 시조 고려때 문하평장사 이경조
고부(古阜)는 전라북도(全羅北道) 정읍군(井邑郡)에 속해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 때의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을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고부로 고쳤다. 고려는 이 지방을 다스리던 후 백제가 망한 936년(태조 19), 이를 영주(瀛州)라 칭하고 관찰사(觀察使)를 두었으며, 광종(光宗) 때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는 등 중요한 행정 구역의 하나를 이루었다. 현종(顯宗) 때에 이르러서는 고부군으로 그 이름을 다시 고치고, 충렬왕(忠烈王) 때 잠시 영광군(靈光郡)에 병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1914년 백산면(白山面)·거마면(巨麻面)·덕림면 (德林面)은 부안군에 속하고 나머지 지역은 정읍군에 병합되어 그 일부 지역만 고부면으로 남아 있다.
고부 이씨(古阜李氏)의 시조(始祖) 이경조(李敬祖)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최 충(崔 沖)이 설립한 사학(私學)의 효시인 구재학당(九齋學堂) 출신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그는 1071년(문종 25) 김 제(金 悌)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송(宋)나라에 다녀왔으며, 문종(文宗)에서 숙종조(肅宗朝)에 이르기까지 5대(代)를 섬긴 공(功)으로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여산군(礖山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고부(古阜)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조(敬祖)의 손자인 양빈(陽賓)이 서북 병마사(西北兵馬使)로서 예종(睿宗) 때 윤 관(尹 瓘)과 함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討伐)했으며, 그의 동생 양승(陽升)은 고려 명종(明宗) 때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연주(延州)에 침입한 거란병(契丹兵)을 격파하고 위주성(渭州城)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대장군(大將軍) 의(儀)는 경조(敬祖)의 5세손이며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시경(時卿)의 아들로 고려 강종(康宗) 때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지냈으며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그밖에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쳐 감찰대부(監察大夫)를 겸한 연종(衍宗)은 공민왕(恭愍王) 때 직간(直諫)으로 왕의 위신(威信)을 바로 잡았으며 학자 원곤(源坤)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병구원을 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부 이씨(古阜李氏)는 남한에 총 4,474가구, 18,6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고부이씨(古阜李氏) 시조 고려때 문하평장사 이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