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 구십 하고도 거시기 두살인가 세살인가 헌디도 까막눈 아녀, 젓가락을 요로코롬 놔도 뭔 자인지 모른당께. 그냥 작대기여 헌디, 할멈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수술받는다고 병달이 놈 손 잡고 올라갔잖여, 병달이가 무신 일 있으믄 편지 쓰라고 봉투에다가 주소는 적어두고 갔는디, 나가 글씨가 뭔지 오치게 알어, 기냥 알았어,라고만 했지. 그때는 산 넘어가야 전화가 있을랑 말랑 혔어 암만,
어찌어찌 보름이 지났는디 이 할멈이 오지를 않는겨, 저짝에서 소쩍새가 소쩌럭 소쩌 여러날 우는디 환장허겄데, 혼자 사는 노인네들은 어찌 사나 몰러, 그나저나 수술받다 죽었으믄 연락이라도 올 텐디 꿩 궈 먹은 소식이더라고,
병달이가 써준 봉투 생각이 나서 종이 꺼내놓고 뭐라 쓰야겄는디, 뭐라 쓰야 헐지 몰라서 고민허다가 에라 모르겄다, 허고는 소 다섯마리 그려 보냈당께, 근디 할멈이 용케 알아보고 열흘 만에 왔더만, 나가 글씨보단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걸 그때 알았당께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4.10.06. -
구십이 넘은 문맹의 충청도 할아버지는 어느 날 할머니가 수술받는다고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떠나자 혼자 남겨졌다. 여러 날이 지나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글자를 전혀 모르던 할아버지가 고민 끝에 보낸 편지에는 소 다섯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다섯이라는 숫자 ‘5’와 ‘소’를 “오소”로 “용케 알아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시를 읽고 한글을 처음 배운 칠곡 할머니들이 삐뚤빼뚤 쓴 시가 떠올랐다. 문맹의 할머니들이 기역, 니은, 디귿, 리을을 받아쓰다가 한 글자 한 글자씩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은 기적 같은 일일 것이다. 문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언어 바깥의 직관적인 경험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수수께끼 같은 시는 우리를 문자 이전의 기호화된 상상력의 세계로 데려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