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구 수필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구의 수필을 연 선구자를 찾아보는 글을 올리면서, 여러 자료도 모우려는 것이 목적이다.
오늘의 시각에서는 그들의 글이 미흡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대구수필의 문을 연 위대한 선구자이다.
먼저 이화진의 글을 보기로 하자.
경경록(耿耿錄)
이화진
가을밤이다.
밤을 지새우며 귀뚜라미가 울어댄다.
귀뚜리는 귀뚤뀌뚤 우는 것이 아니라 분명 ‘경, 경, 경, 경, 경.’하고 우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끝없이 경(耿)자로 읊어대는 것이다.
옥편(玉篇)에는 경(耿)의 해(解)를 달기를 ‘소명(小明)-반짝거릴 경, 광야(光也-빛날 경, 불안(不安-마음이 편치 않을 경 개야(介也-깨끗할 경, 우양(憂也-근심할 경, 등으로 되어 있다.
또 경경하다의 뜻을 국어 사전에서는 근심하다. 걱정하다. 잊어지지 않는다.. 빛이 밝다, 등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귀뚜리란 놈은 참으로 유식하고, 슬기로운 미물(微物)이다.
가을 밤 애달픈 정서나 잊어지지 않는 그리움, 그리고 천만 가지 근심과 마음속을 보채는 시름 등 심지어 빛 밝은 영혼의 비상(飛翔)까지도 온통 한데 묶어 밤이 새도록 경(耿)자를 읊어대니 말이다.
밤새워 읊어대는 저 ’경경경 경경‘ 소리 ------. 진실로 가을밤은 귀꾸리의 경경한 울음소리로 깊어가고, 가라앉고, 아득히 흐른다.
밤이 깊다.
비록 시지프스의 비극적 숙명에 허덕거려야 할 인간일지라도 이런 밤엔 저 경경한 귀뚜라미 울음소리 와 더불어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시름겨워할 자유는 있으리라.
가을밤, 끝없는 귀뚜리의 울음을 헤아리면 나의 영혼은 그제야 반쯤 실눈을 비빈다. 피로한 육신의 허물 밖으로 두리번 거리며 나오는 자유로운 넑이 오랜 움추림을 펴고 비로소 툭툭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다. 부드럽고 아늑한 어둠 속을 반딧불처럼 가녀린 빛을 명멸하면서 외운 순례자가 되어 날아가는 나의 지성의 나비,
땀내와 소음과 허기진 욕망 속에서 군침을 흘리며 잠이 든 어설픈 인생의 머리 위로, KBS의 층대 밑에서 거적을 깔고도 세상 모르게 코를 고는 어린 고아들의 때 묻은 옷섶, 또는 온갖 인간사의 고달픔에 깊이 주름진 곤비(困憊)한 농부의 투박하고 어두운 이맛전을 스치며, 그리고 코스모스가 나란히 서서 지키는 고아원 창문을 기웃거리며 나의 나비는 날아 다닌다.
저기 ’말테의 수기‘를 엮은 릴케의 고적한 하숙집 등불이여,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난만한 지역을 지나 성당 촛대 아래 흐느끼는 아리시의 괴로운 기구(祈求)여, 라스콜리코프(죄와벌에 나오는 법대 휴학생으로 주인공이다. 主)에게 정깊고, 애절하게 호소하는 목멘 소냐의 목소리, 밤세워 ’팡세‘를 쓰는 생각하는 갈대 파스칼, ’맹수와 원시림은 악이 지극힉건강하는 것, 그리고 신체를 찬란히 발달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어!‘ 정신병원의 창문 아래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의 목소리는 열에 떨고 있다. 카츄사를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고 쓸쓸히 흰 턱 수염을 쓰다듬는 굳은 표정의 톨스토이, 그의 서재엔 지금 치카에 불이 지펴 있을지------.
나의 나비를 불안에 떨지 말게 해 다오. 중동의 포성이여, 아프리카의 살육이여, 메콩 델타의 시취(屍臭)여 전란의 초토에서 울부짖는 저 일그러진 표정들, 울려 퍼지는 통곡의 단장의 절망의 비통의 합창이여. 나의 나비는 울먹이며 다시 자리를 뜬다.
지중해의 감청색 바다 위로 멋스런 요트, 순풍을 한 아름 안고 화살처럼 나는 듯 떠가는 흰돛 아래를 눈 아랠 흘기며 방자하게 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친구는 누구인가. 고명하고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소트라테스, 오아시스와 그의 부인일까.
오직 빛 밝은 태양과 정욕과 자신과 황금을, 그리고 허세를 과시하는 곳, 지중해 그 검정색 바다, 인류의 영광과 부화(浮華)가 함께 놀아나는 지중해엔 지금도 황금빛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위대를 자칭하는 현대의 영웅과 존귀와 부유가 미끄러지는 요트에 삶을 구가하고, 과시하고 만족하는 동시에 멀리 아득히 사라져가는 ’산타 루치아‘의 애조(哀調), 인간의 애달픈 정회와 소박한 슬픔이 밀리고 쫓겨 가는 나폴리와 밀라노의 창문엔 다만 형이하학적인 환영만이 얼씬거리는데, 나의 나비는 그만 지친 날개를 접으며 힘없이 육신으로 되돌아 온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아아 다정한 동기, 슬픈 인간들, 그러나 끝내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혈연들이여, 암야(暗夜)의 의미 없는 사유의 비상을 자재로 허용하는 은총을 베풀 것일진데, 이 밤의 축복된 은혜를 옳게 누리지 못하는 불행한 갈대들이여
그러나 인간은 이 불행한 반려 때문에 자랑스러운 고전(古典)을 낳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분만키 위해 또한 오늘을 진통하는 것이다.
밤은 조용하고, 깊고 어둡다.
나의 내부를 흔들며 종횡으로 소용돌이치는 이 걷잡을 수 없는 사념의 분수, 갈망의 노래, 밤을 방황하는 영혼의 순례, 소란한 사유의 지그재그, 이것들은 모두 밤의 것이고, 내일의 태양을 위한 것이고, 낯선 미래의 탄생을 예시하는 것이다.
이제야 말로 깊이 잠들자. 밤의 은총으로 내 시지프스의 숙명을 겪게 하자.
창 너머로 지성처럼 싸늘한 밤하늘, 암시하듯이 깜박이는 별, 한밤에도 매무새를 풀지 않는 흰 코스모스의 청정한 눈매, 귀뚜리는 쉼 없이 ’경경경 경경‘ 밤을 읊는다.
참으로 경경히 세월은 가고, 인간도 그리움도 슬픔도 노여움도 잊히지 않는 인간사의 그 모든 것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간다. 하여 누누리는 경경히 영원으로 회귀를 거듭할 것이 아닌가.
귀뚜리는 이것을 밤이 지새도록 경경히 읊어대는 것이다.
-1970. 12. 수필문학 2집에-
-이화진 수필집. ’잔화(殘火)의 장(章)‘에서-
(잔화의 장. 그루.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