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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3부 - 내 안에 조성된 첫 번째 창조에 속한 것들의 허물어짐
세 번째 글을 쓰기 시작하는 저의 마음은 너무도 부끄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이유는 주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까지 형편없이 살았던 것에 대해 그동안 무엇이 죄인줄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변명으로 약간은 덮을 수 있겠지만 주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을 덧 입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기까지 했지만 저의 현실의 삶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지난날을 더듬어 기억을 끌어올리기 조차 싫고 부끄러운 죄악들을 생산해냈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감출 수 있겠지만 주님은 다 보셨고,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주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흘리신 피의 효능을 생각하며 밖으로 밀어낼 수 있는 용기 만큼만 글을 써봅니다.
아내를 설득하여 옮긴 교회는 2대째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다가 목사님은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하기 전 일하며 저축해 놓았던 재산을 다 털어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던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자금을 초과해 건물 설계를 하고 시작을 했던 까닭에 콘크리트 골조를 마치고 내부공사에 들어가면서 예상했던 어려움을 만나 겨우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상태로 공사는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함께 동역하던 10여명의 성도들의 경제력은 뒷바침 되지 못했고 환경은 어수선했습니다.
그곳에서 새롭게 교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담임 목사님과 자주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로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에 대한 의문을 주제로 질문을 던졌지만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대답을 들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십입조"에 관한 권면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목사님의 현실적 필요가 담겨진 것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아! 늦게나마 기억나는 또 하나의 권면은 저의 의문이 담긴 질문들에 대하여 자신이 대답해 줄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저보고 신학을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의 꿈꾸었던 교회생활은 중단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 역시 예배당 건물을 팔고 함께하던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해결된다"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여기저기 쇼핑하듯 돌아다녀 보았지만 제게는 모두 마치 '신기루' 같았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던 숲은 보기에 좋았지만 막상 숲 안으로 들어가면 썩고 냄새나는 낙엽들의 무덤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길을 찾았다가 다시 길 위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와중에 1995년 6월 25일 둘째 아이 아들(근무)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첫째 아이(국화)를 낳고 10년 가까이 둘째 자녀에 대한 생각을 감히 갖지 못했습니다. 삶이 안정되지 못했고 부모로써의 책임감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저희 바로 앞집에는 자신도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집을 세얻어 다른 장애인들을 보살피고 돕는(일명 : 천사의 집) 일을 하며 척수장애를 가진 갸냘픈 몸의 여성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장애를 갖지 않은 정상적인 아이 한 명이 그곳에 입양이 되어 왔던가 봅니다. 하지만 갓난 아이를 돌볼만한 여력이 부족했는지 (천사의 집)원장이 저의 아내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며 잠깐만이라도 아이를 돌봐줄 수 없겠느냐? 부탁을 해왔고 아내는 흔쾌히 수락을 하였습니다. 저의 집에서 우유를 먹여가며 양육을 하던 중 하루는 아내 품에서 우유병을 빨고 있는 아이를 옆에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저의 고지식(?)했던 생각(둘째 아이를 갖지 않고자 했던 마음)이 무너지면서 하나님께서는 제게 두 번째 아이를 갖고자 하는 소망을 주셨고 이후에 아들 근무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한 가지도 없었던 탓에 어느 정도 여유있는 경제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동생의 집을 담보로 약간의 돈을 마련해 조그마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여동생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나름 공부해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간호사로 취업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 역시 동아건설 중기사업소에서 중직으로 일하다 그만둔 고종사촌형과 힘을 합해 광주에 위치한 기아자동차 본사에 생산부 인력지원과 자동차 부품을 하청받아 생산하는 공장 등 회사 전무직을 하시며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 여동생 앞으로 아파트 한 채를 사주었는데 제가 아버지하고는 상의도 없이 여동생에게만 부탁해 일을 벌였습니다.
경험도 자본도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 일은 빚만 남기고 끝을 냈습니다.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집에는 빨간색의 압류 딱지가 붙여졌고 여동생 문제는 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셔야만 되기까지 이제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에까지 어려움을 주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은행의 빚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신용불량자가 되어 빈손이 되었지만 어떻게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이일저일 가리지 않고 살다가 누군가로부터 귀동냥으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밤에 서울에서 손님을 태우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택시들을 상대로 즉석 짜장/우동을 팔면 괜찮게 돈이 될거라는 말을 듣고 마침 서울 도봉구에 살면서 중화요리집을 하던 작은집 사촌동생에게 부탁해 짜장면과 우동 만드는 법을 말 그대로 후다닥 두세시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선 라보 트럭 짐칸을 이용해 비닐로 대충 포장을 치고 손님을 태우고 고양시 일산에 왔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택시들을 상대로 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벼락에 콩볶듯 배운 기술로 만든 짜장면과 우동맛은 뻔했습니다. 어쨌든 밤을 새워가며 겨우겨우 살 수는 있을만큼은 팔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음주 단속에 걸려 운전면허가 취소되었습니다. 음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차로 실어 옮겨야 했지만 면허를 취소당했으니 어쩔 수 없이 포장마차 앞을 오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해야만 하는 힘든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다행히도 때마침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의한 사면으로 또 한 고비 넘기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포장마차로 경찰관 두 명이 찾아왔습니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벌금을 내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경찰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지역 관할 경찰들이 분명 오가며 보았을 터이고 방문해서 저의 사정하는 이야기와 더불어 자기들이 보고 판단하기에도 형편이 뻔해 보이는 것을 알았는지 "열심히 사십시오" 말만 하고 돌아들 가더군요. 하지만 언젠가는 해결해야할 문제였기에 살고있던 집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방 보증금을 빼내 음주운전 벌금을 해결했습니다.
하루는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이발소를 갔습니다. 이발을 하던 도중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잠깐 정신을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가 바로 정신이 되돌아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분명 뭔가 몸에 심상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이같은 일이 있기 전까지 저는 나이도 이제 갓 30대 후반이었기에 건강에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고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생활환경이 낮에서 밤으로 바뀌었던 탓에 일을 하다가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일이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그럴때면 콜라와 빵을 옆에 두고 먹어가며 상황을 넘겼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예기치 않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감정 조절이 안 될 정도로 짜증이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체중도 심하게 빠져 목에 힘줄이 완연히 들어나 있었습니다. 그럴때마다 사는 환경이 이러니 그러나보다 하고 넘겨왔는데 그날 이발소에서 혼절하기 직전 상태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병원 의사가 제가 병원을 찾기 전의 상태 등을 다 듣고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라는 병명과 진찰 결과를 말해 주었습니다. 진작 병원을 찼아왔어야 했는데 무엇보다 그동안 지나친 감상선 호르몬의 작용으로 심장에 무리가 크게 온 것으로 보여 주사를 놓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약으로만 처방을 내주었습니다. 항갑상선제 약을 복용하면서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시 행정지도원이 일하는 포장마차를 찾아왔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이곳 포장마차에 대한 민원이 들어왔다면서 자진 철거해달라는 통보를 했습니다.
- 2부 끝 -
간증 1부의 글은 사람으로서 한 가정에 태어나 자아가 형성될 시기에 부모나 학교, 이웃 등 환경 안에서 도움을 못받고 사회에 적응해 나갈 수 있는 기회 역시 충분히 얻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환경에서 그동안의 위로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기에 과정은 힘들었지만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간증 2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고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양심이 살아남으로 성령 안에서 감격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된 영원미래에 대한 소망을 잉태한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간증 2부를 쓰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긴증 3부...하나님에 대하여 죽어있던 양심으로 살았을 때는 비록 삶은 힘들었지만 범했던 죄가 양심을 그토록 고통스럽게까지 찌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간증 3부를 쓰기 전부터 저는 솔직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서두에 고백했던 것처럼 지난날을 더듬어 기억을 끌어올리기 조차 싫고 부끄러운 죄악들을 생산해냈던 시기였고 또 어느 부분까지 나의 죄악에 대하여 밖으로 들어내야 하는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증 3부의 시기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영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신 뒤부터 생산해낸 육체의 죄와 모든 행위의 열매와 쓴맛을 사랑의 징계를 통해 경험하면서 "매맞은 영의 어떠함"이 형성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저로 하여금 한 사람이 거듭난 후 곧바로 철저한 구원으로까지 이어지는 배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깊이깊이 깨닫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웅지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이신 교회를 아는 사람을 통하여 보고 배운다는 것이 어떠한 축복인지!
간증 4부 -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워치만 니의 사역을 만나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