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화학 분야 권위자
이 필 호(52회) 강원대학교 자연과학대학 교수
- 지역대학 어려움 딛고 세계적 연구성과 창출
- 독창적인 촉매 짝지음 반응으로 2019년 대한민국학술원상 수상
- "우리나라 차세대 화학자 양성이 가장 큰 보람"
대학에서 가장 많은 이공계 학생들이 듣는 수업 중의 하나가 ‘유기화학’이다. 화학과나 화학교육과, 화학공학과, 고분자공학과 등은 물론이고, 의과대학, 약학대학, 생물학 등 의·생명과학계열과 농업생명과학대학 등 농학계열 학생들도 기초 학문으로서 유기화학을 공부한다. 그만큼 유기화학은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산업 발달과 신약 개발 등에 이바지하며 많은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전문 인력, 연구비, 기자재 등이 충분히 갖춰져야 하기에 과학기술 선진국들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필호(52회) 강원대학교 화학과 교수는 광활하고 치열한 유기화학의 세계에서 굳건히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유기인듐을 이용한 짝지음 반응 개발, 탄소(C)-수소(H) 활성화 반응, 붕소(B)-수소(H) 활성화 반응 등으로 미국화학회지(JACS) 등 세계적 저널에 논문을 수차례 발표해 주목을 받았고, 2019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했다. 해당 영역에서 실용성과 범용성을 인정받아 널리 쓰일 때 개발자 이름이 붙는, 일명 이름 반응(Named Reaction)을 개발하는 데 지금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우수한 연구성과와 함께 그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그의 연구지이다. 그는 학위 취득 등을 위한 유학 기간을 제외하곤 그의 고향, 강원도를 지켰다. 지역대학이 갖는 어려움을 안고도 국가지정연구실과 창의적연구사업 촉매유기반응연구단 등을 유치해 성공리에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30년 간 고향의 인재 양성을 위해 헌신했다. 2017년, 강원대학교가 개교 70주년을 맞이하여 선정한 ‘강원대학교를 빛낸 70인’에 포함된 것은 그가 보람을 느끼는 일 중 하나다.
“연구생태계의 선순환을 지탱하는 축은 연구인력, 연구비, 연구장비로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지역마다 고르게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차세대 화학자가 활약할 토대를 잘 다져 놓는다면, 한국 유기화학이 세계에서 두각을 드러낼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그의 눈길이 실험실 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국 유기화학의 기틀을 세운 선도자이자 그를 화학자의 길로 이끈 스승들의 사진이 자랑스레 걸려 있었다.
그 명맥에 가치를 더하고 싶다는 이필호 교수가 스승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춘천고등학교와 강원대학교를 거쳐 화학자가 된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선친을 보며, 어렴풋이 저 또한 교단에 서서 학생을 바르게 이끌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어요. 이 같은 동경은 지역 명문인 춘천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과정에서 더욱 또렷해졌지요. 물론 꿈을 이루는 일반적인 방법은 사범대학 입학이었지만, 강원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들어가서 교직을 이수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80학번인데 당시 신입생은 대학에 계열별로 입학한 다음, 2학년 때 학과를 정하는 방식이었어요. 생물학과를 염두에 두고 실험 수업을 들었는데 원하는 방향과 다르더라고요.마침 주위에서 영역이 다양하고 전도가 유망하다며 화학과를 추천했고, 거듭 고민한 끝에 진로를 전환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바꾼 셈이죠.(웃음) 화학과에선 역량과 열정을 두루 갖춘 교수진이 멘토를 자처했고, KAIST 출신 젊은 선생님들이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뜻 맞는 동기들과 스터디 그룹을 꾸려서 학습에 매진했고 결국 KAIST 대학원에 합격했죠. 오늘날 저를 완성한 기반은 강원도, 그리고 강원대학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KAIST 대학원 석·박사 학위 취득 후 미국 스탠포드대학교에서 유기화학 분야 권위자인 배리트로스트 교수 지도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KAIST는 시설과 기자재 등에서 단연 월등했고, 양질의 논문을 지속해서 발표하던 터라 5년 동안 알차게 배웠습니다. 게다가 운명처럼 김성각 교수님(이학부 종신회원)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유기화학의 한 획을 그은 분이셔서 지도 교수로 모시려는 경쟁이 치열했는데 운 좋게 기회를 얻었어요. 트로스트 교수님 연구실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신 것도 김 교수님입니다.다트로스트 교수님은 당시 관련 분야에서 압도적 성과를 일궈낸 세계적인 권위자였는데, 한국인 박사후연구원은 제가 처음이었어요.
다양한 영입 제안이 있었을 텐데, 1991년 다시 모교로 돌아오셨습니다.
귀국하고 자리를 알아보던 중 강원대에서 교수 채용 공고가 나왔고, 합격하면서 그리운 고향으로 왔죠. 그때가 29세였는데, 시간이란 참 쏜살같아서 어느덧 30년이네요. 돌이켜 보면 꿈같은 나날이었어요. 물론 더 좋은 환경에서 오는 제안도 있었지만, 모교에서 후배이자 제자인 학생을 화학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 제게 더 중요했습니다. 강원대 학부 시절, 많은 은사님들이 심어준 꿈과 용기를 자양분으로 성장해 온 만큼 충실하게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연구성과를 내셨지만, 과정에서 고충이 적지 않았을 듯한데요.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강원대에 부임했을 때 열의는 가득했지만,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게다가 실험실, 기자재 등이 충분치 않아서 김성각 교수님 양해를 받아 홍릉에 위치한 KAIST에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어요. 5년간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다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배우고자 1996년 연구교수로 미국 몬타나주립대학교에 가서 연구에 몰두했어요. 아내와 아이를 두고 홀로 갔으니 절실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연구에 다시 몰입하는 것밖에 답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전이금속 촉매를 이용한 유기 반응 연구에 매진하고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원자번호가 49번인 인듐(In)을 유기 반응에 적용하니 새로운 반응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이구연 강원대 생명건강공학과 교수가 우수한 논문을 많이 낼 수 있도록 열심히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결국 대표과제 즉, 유기 인듐을 이용한 짝지음 반응 개발은 2006년 국가지정연구실로 지정받아 5년간 활동하는 자양분으로 작용했습니다. 여담이지만, 해당 연구를 함께한 이구연 교수는 제가 배출한 박사 1호랍니다. 지역 대학에서 성과를 내고자 심혈을 기울이니 화학계의 많은 스승님들과 선배 교수님들이 격려와 응원을 해주셨는데 그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지역 대학 최초로 창의적연구사업(현 리더연구)에 선정되었습니다. 촉매유기반응연구단을 꾸려서 9년 동안 전이금속을 촉매로 이용한 유기 반응 연구를 수행한 시기는 참으로 보람 있었어요.
유기화학 분야에서 국가경쟁력의 기반으로 작용할 기술을 다수 확보했는데 가장 보람 있는 성과를 손꼽는다면요.
평생을 바쳐 연구했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취는 크게 세 가지예요. 우선 초창기에 성공한 유기 인듐을 이용한 짝지음 반응 개발입니다. 짝지음 반응이란, 탄소-탄소 결합을 형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존엔 팔라듐을 촉매로 붕소, 주석, 아연, 지르코늄, 실리콘 화합물 등이 사용되었는데 우리 연구실은 인듐 화합물을 사용하여 기존 방법을 개선하고 새로운 짝지음 반응을 개발하려고 했죠. 그러나 지난 2010년 짝지음 반응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리처드 헤크 델라웨어대학교 교수, 아키라 스즈키 훗카이도대학교 교수, 에이이치 네기시 퍼듀대학교 교수가 각각 개발한 반응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따라서 독창성이 있는 이름 반응을 찾아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고요. 탄소-수소 결합활성화 반응에선 포스포릴 그룹을 지향기로 이용해 탄소와 수소 간 결합을 활성화하여 인이 고리에 들어간 신규한 화합물들을 합성했습니다. 아울러 붕소-수소 활성화 반응을 통한 카보레인 합성법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최근 몰두 중인 연구는 무엇입니까.
3년 전부터 붕소(B)-수소(H) 활성화 반응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대한민국에선 관련 연구를 시도한 사례가 없고, 세계적인 추세 역시 태동기와 성숙기 사이로 보고 있어요. 또 조사해 봤더니 다들 무기화학 바탕이어서 유기화학적 관점으로 접근하면 신선하겠더라고요. 2020년 5월 관련 연구결과를 JACS에 발표했고, 현재 이 분야 연구를 집중해서 수행하고 있어요. 주기율표에서 붕소와 탄소는 자기와 다양하게 결합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는 원소입니다. 붕소는 이십면체 모양의 분자를 형성할 수 있는데 구조를 보면 면이 20개, 자연히 모서리끼리 만나는 꼭짓점은 12개죠. 이중 2개를 탄소, 나머지 10개를 붕소로 구성하면 일명 카보레인(carborane) 화합물이 됩니다. 우리 연구는 해당 붕소 뭉치 화합물에서 붕소 꼭짓점에 다른 작용기를 얼마나 손쉽게 도입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합성 시 물성이 어떻게 바뀌는지 연구합니다. 최근 이러한 화합물들을 이용한 붕소 중성자 포획요법(BNCT)은 실제 암 치료에도 활용되고 있어요.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역 대학 연구 환경이 더 나아지려면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할까요.
저는 크게 세 가지를 손꼽습니다. 연구 인력, 연구비, 연구 장비입니다. 여기서 어느 하나를 제외할 순 없습니다. 각 요소는 연구 진행의 선순환을 지탱하는 축이거든요. 이 중에서도 ‘사람’이 제일 중요합니다.즉 수도권에 집중해 있는 인재들이 지역에 머무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합니다. 인구 감소 현상이 심화하는 최근엔 지역 거점 국립대조차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어요. 제가 하는 연구가 이구연 교수를 포함한 제자 130여 명을 양성하며 이룬 결실이기에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또한, 학교는 학생이 동기부여를 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북돋워야 하고, 대학원에서 축적한 연구역량을 잘 쓸 수 있는 회사나 연구소와 연결해 사회에 나아가게끔 뒷받침해야겠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차세대회원심사위원장으로 3년간 봉사한 만큼, 소회가 각별할 듯합니다.
3년 동안 느낀 소감이요?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름만 ‘차세대’일 뿐 한림원 명성과 견줬을 때 손색없는 실력을 갖춘 젊은 과학자들이 선발되었으니 장래가 참 밝습니다. 한편으로는 후보자 모두가 충분히 훌륭한 데 다 선정할 수 없으니 안타까웠어요. 그러나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연구와 실험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기에, 차세대회원이 지금 제 연배쯤에 도달한다면 대한민국 과학 부문 노벨상 수상을 실현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와 계획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화학자로서 화학의 세계는 알수록 광활하고 개척 가능성이 많은 영역이에요. 연구와 실험에서 예측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 이전보다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30년 동안 펼쳐 놓은 연구를 잘 정리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작업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약 130명에 이르는 제자와 실험하고 연구를 하다 보니, 아직 마무리가 안된 크고 작은 과제들이 있어서 해야 할 일이 상당해요.(웃음) 그러나 이러한 미완성 과제들을 잘 마무리해서 유기화학 분야에 조금이나마 공헌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더불어 제가 개발한 유기 반응들이 신약 개발 등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