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42. 상상 테마41 - 역설적 상상력으로 시 쓰기
@ 역설을 상상에 적용할 땐
잘 알려진 대로 역설이란 언술 된 겉의 의미가 모순을 일으키지만, 그 속에 진실, 본질,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아아, 나의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와 같은 표현은 역설이다. 사람이 떠났는데, 사람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 논리로 판단하면 모순이다. 그러나 정서적 논리로 접근하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내 마음속엔 당신이 떠나지 않고 영원히 살고 있으니 나는 당신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라는 뜻이 된다. 이별 앞에서도 초연한 자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알 수 있게 하는 표현이다.
이처럼 역설은 과학적 논리와 객관성의 잣대로 보면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서적 논리로 보면 진실이나 본질, 진리에 부합하는 언술인 셈이다.
역설은 표현 자체가 궁금증을 유발하고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A는 B가 아니다’ ‘A 안엔 A가 없다’ ‘A가 갔지만(없지만) A는 있다’ 등의 표현에서 A 대신 다양한 단어를 넣어보면 모순된 문장으로부터 ‘왜 이런 표현을 썼지?’하는 궁금증이 발생하고, 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추리적 연상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머니 안엔 어머니가 없다’라고 표현하게 되면 어머니는 어머니가 가득 차 있는 존재인데 ‘왜 없다고 하지?’ 하는 궁금증이 1차적으로 발생한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독자들은 어머니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취합한다. 그런 고생만 한 어머니에게 주체적인 어머니가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해답을 찾으려고 발생시킨 연상 작용이 어머니의 본질적인 속성을 더욱더 문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이 발견한 본질성이나 근원성을 감각적인 언술로 드러내는 것이 시의 목적 중 하나이기에 역설법은 그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좋은 창작 도구가 된다. 그러니 자신만이 발견한 본질성과 근원성을 드러내고 싶을 땐 역설적인 사유를 자주 펼치고, 역설적인 문장을 바탕으로 개별화된 연상 작용이나 상상이 동원되도록 해야 한다.
필자의 시를 바탕으로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비상구에 대한 역설 / 하린
건물은 비상구를 전부 갖고 있는데 사람만 갖고 있지 않다
아니다 누구나 비상구가 있다 그저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스스로 폐쇄시키거나 열지 않는 사람들 그중에 한 명은 기필코 내 어머니다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처럼 어머니는 어머니를 끝까지 탈출시키지 않았다 평생 누군가의 비상구만 되어준 이력
어머니의 등엔 날개가 없었다 아니 펴지 않았다 마음속 비상구를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궁금했다 비상구가 처음으로 열린 걸까 마침내 닫힌 걸까 ― 《리토피아》 2021년 가을호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비상구에 대한 역설」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가 가진 본질과 근원성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각자만의 비상구가 있는데 화자의 어머니는 끝까지 비상구를 사용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평생 누군가의 비상구만 되어준” 어머니. 그 어머니의 본질성을 드러내기 위해 필자는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역설적 문장을 나열했다.
살아있는 자가 위기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것이 비상구인데, 어머니가 탈출을 위해 찾는 것은 ‘죽음’이다. 그 ‘죽음’이 오히려 어머니에겐 비상구가 아닐까 하는 역설적 사유로 인해, 고생만 하다 죽은 어머니의 안타까운 삶이 더욱더 부각되었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에 활용된 객관적 상관물은 비상구이다. 비상구가 어머니의 존재론적 의미를 더욱 명확히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생만 하면서 살고 있는 어머니 이미지는 너무나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무조건 뒤틀어서 ‘낯선’ 어머니(나쁜 어머니, 개성적인 어머니, 불편한 어머니, 예상치 못한 트라우마를 가진 어머니 등)로 만들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어머니를 표현하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어머니의 존재성을 세련되게, 선명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앞에서 필자는 역설적 사유 자체가 상상을 동반한 연상 작용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시를 쓸 때도 역설적 사유를 펼치면서 상상적 체험을 자동적으로 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겐 전부 비상구가 있다. 어머니도 사람이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비상구가 없다’와 같은 ‘논법’을 펼치면서 어머니의 삶을 연상을 통해 되돌아보았다. 어머니는 그 흔한 비상구 한번 사용하지 않고 일평생 타인의 비상구만 되어주다가 죽는 삶을 살았다. 비상구가 있으면서도 일부러 사용하지 않은 어머니. 그녀의 안쪽엔 무엇이 있었을까, 상상을 했다. 시커멓게 타들어간 애간장과 억눌린 자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만의 비상구를 만들어줬다.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비상구, ‘죽음’만이 어머니의 비상구였다.
* 또 다른 예문
공간의 역설 / 정숙자
바다일 필요는 없다 폭포나 강물일 필요도 없다 최소단위로 압축된 한 방울이면 족하다 그 한 방울의 초점을 열면 태양과의 합의로 이룬 도시가 한눈에 펼쳐진다 생명력 가득한 거리와 창문들, 신전, 정원··· 행인들까지가 옛 모습 그대로다 고통과 고뇌에 포위당한 날 촛불보다 먼저 꺼져버리고 싶은 날 밤조차 너무 희어, 눈감아지지 않는 날 내 아틀란티스 제1문의 열쇠는 비밀보다 단단히 여민 침묵과 눈물 그 중심에 있다 검붉은 그 슬픔 허물어- 허물어- 홀로 들어선 아틀란티스 그리운- 그리운- 그리운 하늘에 가라앉아버린 그러나 퇴색되지 않은, 그때 그대로의 아틀란티스 돌멩이도 새들도 내일로 달렸던 수레바퀴 소리도 씩씩하기만 했던 나의 아틀란티스 겨우 스물 무렵에 세··· 운··· 누군가의 뮤 제국도 거기 그대로 존재할 테지 누군가가 의식/ 기억하는 한 사막이든, 바다든 미래조차도 거기 있다지 절대로- 절대로- 시간은 사라지거나 구겨지지도 아니한다지 - 《불교문예》 2020년 여름호
유리창의 심리학 / 박남희
깨지고 싶지 않은 유리창은 없다
유리가 창틀을 붙잡고 있는 건 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삼손이 자신을 지탱하던 마지막 기둥을 허물어 장렬하게 전사했듯이
유리에는 늘 제 몸을 부수려는 욕망이 숨어있다 부서진 유리는 천개의 눈을 갖는다 천개의 세상을 다르게 보고 싶은 것이다
유리는 세상의 수많은 창틀이 붙잡고 있던 무관심과 안일과 위선을 버리고 제 안에 감추어둔 목소리를 꺼내어 쨍그랑, 관습의 오랜 잠을 깨우고 싶은 것이다
유리창은 깨어지고 싶은 날 눈먼 새를 부르며 자유로운 길의 기운을 느낀다 자신을 향하여 전 속력으로 달려오는 새에게 날개를 버리고 바람이 되라고 주문을 외운다
유리창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대기권으로 뛰어드는 별똥별처럼, 불안한 허공에 한 획을 그어 스스로 반짝이는 목소리를 얻고 싶은 것이다 - 《문예연구》 2020년 봄호
쥐약 / 신미균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삼성문학상 공초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오늘의작가상 이상문학상 동서문학상 백석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맛있다 - 《문학과 창작》 2014년 가을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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