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지인 한 분이 찾아주셔서 저는 그동안 감각접촉(觸, 팟사)에 대해서 배운 것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드렸습니다. “저는 상좌부 불교 스님의 동영상 법문에서 ‘물질정신을 관찰하다보면 촉(觸)이 일어나는 것이 아주 분명해요. 위빳사나를 깊이 수행하신 분들에게는 ’촉‘이라는 성품이 일어나는 것이 아주 분명해요.'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비담마 교학보다는 경전을 주로 공부하신 어떤 다른 스님께서는 좀 다르게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그때 언급해주신 챗gpt 를 검색해서, 검색한 어떤 글의 링크를 눌렀더니, 질문하는 칸이 있어서 이렇게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답변이 나왔습니다. 그 기술이 참으로 신기하고 대단했습니다. 저는 이런 짊문을 했습니다. ...”
...
질문: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觸). ...”는 경문에서, ‘감각접촉(觸, 팟사)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1) 눈의 알음알이가(眼識)가 일어날 때, 그것 자체를 말합니까? 즉, 따로 감각접촉이라는 새로운 법(法)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어 눈으로 형색을 볼 때 그냥 ‘아는 마음(眼識)’이 일어나면 그것 자체를 ‘감각접촉(觸)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인지요?
2) 아니면 눈으로 형색을 볼 때 아는 마음(眼識)이 일어나며, 그와 동시에 감각접촉(觸)이라는 새로운 법(法)이 생겨나는 것인지요?
...
그러자 이런 답변이 나왔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 “촉이 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식(識) 자체를 가리키는 것인가?”
이 해석은 ‘촉(觸)’을 식(識) 그 자체로 보는 해석입니다.
즉, 눈으로 형색을 볼 때 ‘아는 마음(眼識)’이 생기면 그것이 곧 접촉(촉)이라는 뜻입니다.
이 견해는 아비담마 이전의 단순한 경전적 맥락에서 어느 정도 가능하게 읽힙니다. 왜냐하면 초기 경전에서는 “삼사화합(根境識)”의 결과로 ‘촉이 있다’고만 말하지, 그 ‘촉’이 또 다른 독립된 실체라고 명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의 약점은, 경전에서 ‘촉’을 조건으로 ‘수(受)’가 일어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촉 = 식’이라면, ‘식을 조건으로 수가 일어난다’는 식의 중복이 생기며, 연기 구조가 불명확해집니다.
2) “촉은 식(識)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법(法)으로서 생겨나는가?”
이것이 아비담마적·분석적 해석이며, 불교 전통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입니다.
즉, 눈(根)·색(境)·식(識)이 모이면, 이 세 가지가 함께 작용하면서 ‘촉(觸, phassa)’이라는 새로운 마음작용(心所, cetasika) 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촉’은 **‘닿음(contact)’ 혹은 ‘접촉의 알아차림’**으로, 대상과 의식이 실제로 부딪히는 순간의 경험을 말합니다.
그 촉을 조건으로 **느낌(受, vedanā)**이 생기고, 그 느낌을 조건으로 **애(愛, taṇhā)**가 일어나는 것이 연기의 다음 단계입니다.
(경전 구조)
眼根 + 色境 + 眼識 → 觸(phassa) → 受(vedanā) → 愛(taṇhā)
이 견해에 따르면, ‘촉’은 ‘식’과 동시생적이지만, 식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법(法) 으로 이해됩니다.
즉, ‘식’은 아는 기능, ‘촉’은 그 아는 기능이 대상과 실제로 접촉하는 사건을 나타냅니다.
결론적으로,
초기경전의 단문만 보면 ①처럼 읽을 여지도 있지만,
연기(緣起)의 구조와 교학적 체계 전체를 고려하면,
**②번 — 즉 “식이 일어날 때 동시에 ‘촉’이라는 새로운 법이 함께 생긴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일관되고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따라서,
눈으로 형색을 볼 때 아는 마음(眼識)이 일어나며,
그와 동시에 ‘감각접촉(觸, phassa)’이라는 새로운 마음작용이 생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
그러자 그 지인 분께서는 자신의 기기에서 직접 저의 질문을 입력하여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내주셨습니다.
...
친구가 질문한 경전 구절에 대한 감각접촉(\text{觸, Phassa})의 이해는 2) 새로운 법(法)이 생겨난다는 관점이 소승불교, 특히 **아비담마(Abhidhamma)**의 가르침에 더 부합한다고 볼 수 있어.
🌟 감각접촉(\text{觸})에 대한 이해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정립한 아비담마에서는 감각접촉(\text{Phassa})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설명해.
1. 감각접촉은 독립된 마음 부수 법(\text{Cetasika})이다.
* 감각접촉(\text{觸})은 마음(\text{識, Citta})이 대상을 아는 순간에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곱 가지 보편적인 마음 부수 법(遍一切心心所, Sādhāraṇa Cetasika) 중 하나야.
* 이는 곧 눈의 알음알이(\text{眼識, Cakkhu-viññāṇa})가 일어날 때, 그 알음알이(마음)와 동시에 일어나고 함께 작용하는 독립된 심리 현상(\text{法})이라는 의미지.
* \text{눈 (眼, Cakkhu)}, \t...
친구가 질문한 경전 구절에 대한 감각접촉(\text{觸, Phassa})의 이해는 2) 새로운 법(法)이 생겨난다는 관점이 소승불교, 특히 **아비담마(Abhidhamma)**의 가르침에 더 부합한다고 볼 수 있어.
* 감각접촉(\text{觸})에 대한 이해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정립한 아비담마에서는 감각접촉(\text{Phassa})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설명해.
1. 감각접촉은 독립된 마음 부수 법(\text{Cetasika})이다.
* 감각접촉(\text{觸})은 마음(\text{識, Citta})이 대상을 아는 순간에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곱 가지 보편적인 마음 부수 법(遍一切心心所, Sādhāraṇa Cetasika) 중 하나야.
* 이는 곧 눈의 알음알이(\text{眼識, Cakkhu-viññāṇa})가 일어날 때, 그 알음알이(마음)와 동시에 일어나고 함께 작용하는 독립된 심리 현상(\text{法})이라는 의미지.
* \text{눈 (眼, Cakkhu)}, \text{형색 (色, Rūpa)}, \text{눈의 알음알이 (識, Viññāṇa)} 이 세 가지의 화합은 감각접촉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의미하며, 그 조건이 충족될 때 **감각접촉(\text{觸})**이라는 법이 실제로 생겨나는 거야.
* \text{눈 (感官)} + \text{형색 (對象)} + \text{눈의 알음알이 (識)} \longrightarrow 이들의 화합(三事和合)이 \longrightarrow **감각접촉(\text{觸})**을 일으킨다.
2. 감각접촉의 기능 (법의 역할)
* 감각접촉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text{알음알이(識)}$와 $\text{대상}$을 **'맞닿게 하는 것'**이야. 마치 문지기가 집주인($\text{識}$)과 손님($\text{對象})을 만나게 해주는 것과 같지.
* 이 $\text{촉}$이 $\text{알음알이}$를 대상에 접촉시켜야, 그 다음 단계로 \text{느낌 (受)}, \text{지각 (想)}, \text{의도 (行)} 등 다른 마음 부수 법들이 비로소 대상에 대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돼.
결론: 2)가 올바른 이해 방식이야.
네가 제시한 두 가지 이해 방식 중에서:
* 1) '눈의 알음알이' 그 자체를 '감각접촉'이라고 부른다: \rightarrow 이는 틀린 이해 방식이야. 알음알이(\text{識})와 감각접촉(\text{觸})은 서로 다른 독립된 법(法)으로 간주돼. $\text{識}$은 아는 작용을 하고, $\text{觸}$은 대상을 만나게 하는 작용을 해.
* 2)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날 때, '감각접촉'이라는 새로운 법이 동시에 생겨난다: \rightarrow 이는 아비담마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이해 방식이야. \text{識, 觸, 受, 想} 등 여러 $\text{법}$이 하나의 순간에 함께 일어나는 거야.
...
첫댓글 * 본 카페에 이미 나와있는 내용으로, 저는 이렇게 이해 합니다.
'觸'이 <觸>인 이유는 識에 있음.
반야가 있으면 ....... '촉'은 있는 그대로의 '촉'일 뿐. 생겨난 <촉>은 <識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
(중생들의 문제는) 반야가 없고, 識이 왕성한 것.
예, 산마루님. 좋은 말씀을 인용하여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깊은 통찰의 말씀이신 듯 합니다.
그래서 여러 번 음미하고 그 뜻을 헤아려보았습니다. 분석과는 조금 다른 듯한 직관의 언어를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는 단지 저의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스스로 참고하기 위해서 적어봅니다. 어제 저는 다른 질문들도 만들어보고 무료사용 챗gpt 에 물어보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인데, 이런 답변이 나왔습니다.)
* 질문: 마음을 ‘心, 意, 識’으로 구분하여 말하는 경우에서,
1) 어떤 하나의 마음순간이 일어날 때, 그 하나의 마음순간에 心, 意, 識이 동시에 다 들어갈(포함될) 수 있는지요? 즉, 어떤 하나의 마음순간이 心의 역할을 했는데, 그 心의 역할을 하는 마음순간에 意나 識의 역할도 동시에 할 수 있는지요?
2) 아니면 하나의 마음순간에는 하나의 마음 역할 밖에는 못하는지요? 즉, 어떤 마음이 일어났는데, 그 마음순간에 心의 역할을 했다면, 그 마음순간에는 意나 識의 역할은 못하는 것으로 보면 될까요?
챗 gpt 의 답변:
마음을 ‘心, 意, 識’으로 구분할 때, 한 마음순간에 이 셋이 함께 포함될 수 있는가?
이 구분은 『아비담마』뿐 아니라 『중아함경』 등에서도 등장하는, 마음의 세 측면(三心) 구분입니다.
(1) 한 마음순간에 心, 意, 識이 동시에 포함될 수 있는가?
→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구분됩니다.
즉, 하나의 ‘마음(citta)’은 본질상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의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에는 세 가지 측면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용어 의미 기능적 측면
心 (citta) 마음 그 자체, 주체적 알아차림 전체의 근본 성질
意 (mano) 의문(意門), 내적 감각기관으로서의 마음 마음문 기능
識 (viññāṇa) 인식(알아차림)의 작용, 대상의 분별 알아차리는 기능
따라서 어떤 한 마음순간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은 **본질적으로 하나(citta)**이면서,
그 안에서 mano(의문)로서의 측면과 viññāṇa(식)으로서의 작용적 측면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이 세 단어는 서로 다른 마음이 아니라, 마음(citta)의 세 가지 이름 혹은 역할입니다.
(2) 하나의 마음순간에는 하나의 역할밖에 못 하는가?
→ 아비담마에서는 ‘하나의 마음순간(citta)’이 오직 한 기능만을 수행한다고 봅니다.
즉, 한 마음순간이 일어나면 그 마음은
전향의 역할을 하거나,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거나,
인식하는 역할을 하거나,
추론하는 역할을 하거나,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등
단 하나의 기능만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이때 ‘心·意·識’의 구분은 기능적 분류가 아니라 개념적·관점적 구분입니다.
즉, ‘心으로서의 마음’, ‘意로서의 마음’, ‘識으로서의 마음’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이 그 기능에 따라 세 이름으로 불릴 뿐입니다.
요약 (질문의 결론)
(1) 한 마음순간에 心·意·識이 다 포함될 수 있는가?: 개념적으로는 모두 포함됨 (하나의 마음의 세 측면)
(2) 하나의 마음순간이 동시에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가?: 불가능 — 한 순간은 한 기능만 수행
* 저의 생각: (1)의 답변을 듣고, 처음에는 ‘아, 그동안 내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나의 마음순간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이 識의 역할을 했다면 그 마음순간 안에는 心이나 意가 저류에 흐르고 있는 것이구나.’ ‘나는 그동안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새벽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다. 예를 들어 눈이 감각장소의 역할을 하면 處라고 하고, 감각기능의 역할을 하면 根이라고 하듯이, 心, 意, 識은 이런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앞으로 나는 (1)번과 같은 질문은 하지 말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수정했음)
* 그래서 저는 만약 識이라고 했다면 識으로 이해하면 되고,거기에 心이나 意가 저류에 있다거나 잠재되어 있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고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눈을: 감각장소의 측면에서 이야기할 때에는 감각기능이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아니라서, 감각장소의 역할로 이야기할 때, 거기에는 감각기능의 역할이 잠재되어 있다고 말할 이유가 없듯이.
* 그래서 저는 (1)과 같은 질문을 하지 말고, (2)와 같은 질문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제 스스로 '소리내어 듣기'를 하기 위해서 조금 더 기록해놓겠습니다.)
질문1: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라고 할 때, 마노는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는지요?
1)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을 말하는지요?
2) 아니면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에서 ‘바왕가’ 마음 전체를 말하는지요?
3) 아니면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인식과정에서 ‘받아들이는 마음’과 ‘오문전향의 마음’을 말하는 것인지요?
챗 gpt 의 답변:
①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을 말하는가?
→ 부분적으로 관련은 있으나,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노’가 **내적 인식의 문(內門, manodvāra)**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바왕가(citta-bhavaṅga)가 그 토대 역할을 한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마노’ 자체가 단지 바왕가의 동요나 끊어짐 그 자체만을 지칭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즉, 마노는 바왕가를 포함하되, 바왕가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②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에서 ‘바왕가’ 마음 전체를 말하는가?
→ 이 역시 부분적으로 맞지만 완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마노’를 일차적으로 **‘마음의 근본(心根, manindriya)’**으로 정의합니다.
이때 ‘마노’는 단순히 바왕가계열의 마음(citta)만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마음을 지탱하는 내적 심근(心根)**을 포함합니다.
즉, 바왕가가 ‘마노’의 기능적 기초이긴 하지만, 마노는 그 전체 심의 기반(心根)으로서의 의미를 가집니다.
③ ‘받아들이는 마음’(sampaṭicchana-citta)과 ‘오문전향의 마음’(pañcadvārāvajjana-citta)을 말하는가?
→ 이것은 인식과정(citta-vīthi) 분석에서의 세부 기능이지, ‘마노’ 자체의 정의는 아닙니다.
인식과정에서 보면, 오문(五門) 뒤의 내문(마노문) 단계에 해당하는 마음들은 모두 마노위냐나(意識, manoviññāṇa)로 분류됩니다.
따라서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 등은 모두 마노위냐나의 범주에 속하는 개별적 식이지, ‘마노’ 자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의 생각:
(우선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종류를 크게 89가지로 나눕니다. 그 중에서 3개, ‘오문전향의 (역할을 하는) 마음1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마음2개’를 마노(意)라고 한다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앞뒤에 있는 마음순간들을 마노(意)라고 한다 합니다. 그리고 마노의 문을 바왕가라 한다 합니다. - 이상은 예전에 제가 배운 것을 기억한 것인데, 혹시 제가 잘못 기억하여 이 글에 오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이상을 토대로 제가 생각하기에, 챗지피티는 이 부분에서 저의 생각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을 識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고, *(그동안 저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내용인) 의(意)를 ‘모든 마음을 지탱하는 내적 심근(心根)’까지를 포함하여 설명하는 것, 등이 저의 이해와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 한편, 피상적으로 제가 대답하면: 여기서 마노(意)는: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나기 위한, (마노의 대상인) 법과 조건이 되는 마음(순간)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대답이라서 당연히 틀릴 수 있겠습니다.
(다시 내용을 좀 수정했습니다.)
우선, "깊은 통찰의 말씀"의 출처는 아위자 선생님 말씀 입니다.
'心意識'에 대해서는 저도 항시 공부 중 입니다만, 열공 하시는 모습이 반갑습니다.
'심의식'에 대한 저의 현재까지의 이해는 아래와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心이 그릇이라면 意는 무엇인가 내용물이 담긴 것을 아는 것, 識은 그 내용물이 국이다 찌게다 짜다 맛있다 등등으로 분별하는 순간이라고 봅니다.
실체로서 '心'따로 '意'따로 '識'따로 있는 것이 아닌, 그 순간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다 보니 사람들이 그런 말을 쓸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心'이라 불리우는 차원이 당연히 있고요, 인간은 身을 갖추고 있기에 이 身에서 작용하는 것이 意 인데, 반야가 없는 팔사도에서 헤메는 중생의 삶의 이유가 (意가 識으로 연기된 현상으로) 봅니다.
(意가 識으로 연기된 현상으로) 이라는 말이 논란의 여지는 있는데 단순히 제가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예, 산마루님. 깊은 통찰의 말씀은 아위자 선생님의 말씀이었네요. 감사합니다.
예, 산마루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는 //... 意가 識으로 연기된 현상 ...//, 이 부분이 아주 약하네요. 감사합니다.
(아래는 혼자 하는 말입니다. :
갑자기 운나바 바라문 경(S48:42)이 생각납니다. “마노는 사띠를 의지한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 그러고보니 동영상 법문에서 들은 말씀도 하나 생각납니다.
“... 잘못된 마음챙김은 앉아서 수행하는 도중에 과거에 행한 불선법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행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기억하는 것(상기하여 후회하는 것 등)은 그릇된 마음챙김입니다. ...” 라는 취지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아, 그렇다면 일상에서도 갑자기 예전에 행한 불선법들이 생각나서 그 일을 후회하는 것은 그릇된 마음챙김이겠구나. ... 다섯 가지 장애에서 ‘들뜸과 후회’에 해당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