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7세의 심장이랍니다;; 갠적으로 아이슈타인 뇌공개보다 더충격 밑엔 그에 관한 이야기
'루이17세 미스테리' DNA로 풀었다
프랑스 대혁명 와중에 숨진 ‘비운의 왕자’ 루이17세의 심장이 200여년만에 프랑스 왕실 묘인 생-드니 성당에 안치됐다.프랑스는 8일 유럽 왕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열고 루이 17세의 것이라고 인정된 심장을 파리 교외에 있는 왕실 묘인 생-드니 성당에 안치했다. 돌처럼 딱딱해진 이 심장은 수정병 속에 넣어진 채 프랑스 왕실의 상징이었던 백합으로 장식된 마차에 실려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 왕비의 묘소 옆에 안치됐다. 이 심장은 여러 명의 손을 거쳐 오늘날까지 보관돼 오다가 최근 디옥시리보핵산(DNA) 분석 결과 이 심장의 주인과 마리-앙투아네트 왕비 사이의 혈연관계가 입증돼 루이 17세의 것으로 인정받았다. 루이 17세는 감옥서 사망불구 '탈옥했다' '시신 바꿔쳤다' 라며 200여년 풍문으로 전해져 왔다. 루이 17세는 1785년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에 태어났다. 그러나 1789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나이어린 루이 17세의 삶을 일거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는 '혁명의 전리품'을 원하는 인민들의 환호 속에서 단두대의 칼날에 처연하게 떨어져 나갔다. 루이 17세는 간신히 처형을 면했지만 차가운 냉기가 감도는 독방에 갇히고 말았다. 독방에 갇힌 이후 온몸에 소름돋듯 퍼지는 종기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1795년 10살의 나이에 한 맺힌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 역사책은 1793년부터 95년까지 직함뿐인 프랑스 국왕을 역임한 그의 사인(死因)을 폐결핵이라고 적고 있다. 루이 17세의 미스터리가 생겨난 것은 이때부터다. 그가 주위의 도움을 받아 감방을 탈출했고 시신은 다른 아이의 것이었다는 풍문이 꼬리를 물었다. 혁명의 불길이 점차 가라앉자 "내가 루이 17세다"라며 왕위계승을 주장하는 사람이 100여명에 달했을 정도다 특히 독일에서 자란 샤를 쥘라메 난돌프란 인물은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1833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내가 부르봉 왕조의 후계자이며 왕가 재산의 정당한 상속인"이라고 주장했다. 난돌프는 그 증거로 베르사유 궁정 생활에 대한 시시콜콜한 기억까지 열거해 프랑스인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은 이미 굴러간 역사의 수레 바퀴를 되돌리기를 거부했다. 결국 그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됐고 네덜란드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아직도 "프랑스의 왕, 여기 잠들다"라는 글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루이 17세의 심장은 DNA감식에 의한 친자확인 방법이 채택됐다. 루이 17세의 것이라고 알려진 심장조직 일부를 떼어내어 프랑스 당국이 보존하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머리카락 DNA구조와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번엔 남겨진 루이 17세의 심장이 과연 진짜냐라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루이 17세의 심장은 프랑스 바실리카 성당 지하에 있는 프랑스 왕가 묘소에 바짝 건조된 상태로 수정(水晶)용기에 담겨져 있다. 이 심장 조각은 루이 17세의 운명만큼이나 우여곡절을 겪었다. 루이 17세의 부검에 참여했던 의사 필립 장 펠레탕은 동료들의 눈을 피해 심장을 떼어내 손수건에 싸서 집에 가져온 뒤 용기에 보관했다. 한때 펠레타의 조수가 이 용기를 훔쳐 자신의 집에 숨겼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낀 조수의 부인이 되돌려 주었다. 펠레탕은 1815년 왕정이 회복되자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루이 17세의 삼촌인 당시 국왕 루이 18세에게 이 용기를 바쳤다. 그러나 국왕은 이를 외면했고 이 심장조각은 파리 대주교가 대신 관리했다. 1830년 7월혁명 직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이 17세의 심장은 다시 수난을 겪는다. 1831년 일부 폭도들에 의해 성당이 약탈당하는 과정에서 심장을 안전한 곳에 옮기려던 성당 소속 화가가 용기를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 이후 펠레탕의 아들은 이 화가의 도움으로 깨어진 잔해 속에서 가까스로 심장조각을 수거했다. 펠레탕의 아들은 이후 "(심장을) 프랑스 왕가에 다시 돌려주라"는 유언을 남긴 채 숨을 거뒀다. 이후 프랑스 왕족이 넘겨받아 보관해 오다 1975년에야 왕가묘소에 기증됐다. 따라서 펠레탕이 루이 17세의 진짜 심장을 떼어냈다고 해도 운반, 파손, 수거 과정 등에서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바뀌지 않았다해도 과연 DNA 비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온전히 보전돼 있을지도 의문이다
후담 :루이 17의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말 개념없는분으로 유명하시다;;
예를들어 시민들이 빵을달라!! 고하니 빵이없으면 고기를먹으면 될꺼아냐? 라고도하고 ㅋㅋ(사실 오늘 세계사 시간에 선생이 이이야기를 첨들었는대 웃겼다 ㅋㅋ)
또 자신의 어린아들 8살과 섹스를 했다거나...
이와같은이야기는 전부 구라 라고한다. 얼핏 찾아보니 과격 개혁파가 왕족을 모함하기 위해 만든말
이라더군요, 사실 그녀가 낭비가 심했던것도 분명 사실이겠지만
그녀는 사냥에서 실수로 다치게한 백성을 일일이 챙겨줄정도로 착한왕비였고
또 그녀의 사치가 심해진것도 전부 루이 16세의 탓 이라고합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정치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었는대 그당시 프랑스인들은 여인이 정치에나서는걸 굉장히 실어해서 왕은 그녀의
관심을 돌리기위해 파티를 열었다...가 아마 대부분의 대답이더군요 그렇지만 그정도의 낭비는 태양왕 루이14세도 별반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14세는 시대를 잘만난거겠지..
또 죽을때도 울선생은 죽음의 공포에떨어 머리까지 하얗게 변했다고 했지만
그녀는 죽을때까지 담담했고, 평민의 발을 밝고도 사과한후 기요틴에 올랐다고 합니다. 비운의 왕비 마리앙투아네트 .......어쩌면................. 내이상형이다 ㅋㅋ 죽음압에서 담담한다는게 얼마나 힘든걸까.
울세계사선생은 마리앙투에네트에게 악감정이라도 있나보다..(마리앙투에네트에게 미x년 이라고 하던게 기역난다 ㅋㅋㅋ 본인은 웃고넘겼지만..) 뭐 어짜피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내결론은 그녀는 역사의 희생물 정도가 될까요
첫댓글 갠적으로 저심장--.. 산삼뿌리같지않은가?;
아참 , 프랑스 영화로 마리앙투아네트가 영화로 나온다고 합니다. 대충예고편을 봤는대 우리 세계사의 입장에서의 마리앙투아네트같더이다. 발랄한게 이쁘긴하더라
커스틴 던스트 주연이죠. 오오~~~ 자연발광피부여~~~!!!
루이16세는 똑똑하고 인자한 국왕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마누라 잘못만나서 인생꼴아박았죠
뭐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러움도 그전 왕비들에비해 크게 다를바없었다더군요. 근데 상황 안좋고하니까 외국인왕비가 아니꼬와보였고 그래서 이전왕비와 똑같이 사치스러워도 더 사치스러워보였던거같아요
흠 루이 16세도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죠. 적어도 평화로운 시기에 왕이되었으면 성군이 되었을 인물이었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좀 사치스러웠긴 했지만, 단두대에 처형당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뭐 시대 변화의 희생양이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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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눈따가워 =ㅈ=!!!
루이 14세가 나라를 빚덩이로 만들어서 그 뒤의 왕들은 빚갚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절대왕정을 유지할려면 밑에 애들이 가난해야 잘되니까 맨날 파티열고 귀족들은 그거보고 와 멋지네 나도해야지 하면서 따라하고 근데 왕은 돈이 떨어지니까 여기저기서 돈 좀 빌려다 쓰는거죠
루이16세는 왕으로서의 자격이 충분치 않았죠. 정치를 제대로 했다면 빵을 달라고 여성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겠죠. 튈르리 궁을 폭도들이 난입했을때 그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는.. 그래도 군주라면 과감성과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너무 마음 좋은 아저씨였죠. 왕의 기질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정사보다는 사냥에 열중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왜냐 정치에 별 맘을 못붙였기 때문이죠. 차라리 왕이 아닌 다른 직업이었다면 성공했을 타입입니다. 그가 죽은건 물론 시대의 대세이긴 하지만 그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봅니다. 그는 도망가다 잡히죠. 그가 결단력있고 자신있게 행동했다면 결코 비참한 최후가 되진 않았을 겁니다..
니콜라이2세 같은... 당시 궁전을 향해 몰려오는 군중들의 모습을 본 나폴레옹은 루이가 말을 타고 앞장섰다면 왕좌를 지켰을 거라 말했죠. 훗날 1795년 국민공회에 대한 폭동이 일어났을때 나폴레옹은 폭동을 주도하는 군중들을 향해 망설임없이 직사정거리에서 포도탄을 발사합니다;;
나폴레옹이야말로 왕의 자격이 있다는 말이군요..
나폴레옹이 왕의 자격이 있다 글쎄요, 그정도 인물이면 자격은 있다 봅니다. 왜냐 모름지기 백성을 책임지는 왕은 마음만 착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과감성과 결단력을 갖추고 그러면서도 성군정치를 하는 것이지 결단력없는자가 어떻게 왕의 자격이 있겠습니까? 당시 왕은 곧 신과 같은 존재였구 따라서 당당하고 대범성을 갖추었어야 된다 봅니다. 루이는 아쉽게도 그런면이 없습니다. 물론 그도 삼부회를 개최하고 일종의 노력을 시도하지만 만약 그가 좀더 대담하고 당당했다면 왕정이 무너질수가 없었을 겁니다. 고로 혁명의 발단에서 그의 책임은 단지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묵과되서는 안됩니다. 전 그런 유약한 자가 루이14의 혈육인게
의문시도 됩니다. 이건 가정이지만 나폴레옹이 왕이 안되었다면 그는 군대에서 제거대상 1호였을 겁니다. 왜냐 당시 총재정부는 그를 시기하고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이집트원정에 찬성했었죠. 총재정부는 로베스피에르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자 무능과 부패정치를 일삼았습니다. 외적으로 외침에 열세였구 내적으로 재정붕괴였구요. 그런 외침을 막고 재정을 확보한게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첨부터 나폴레옹이 왕이 될 생각을 한건 아닙니다. 그는 가난과 역경을 많이 겪었구 어찌보면 19세기 흐름이 된 셈이었죠. 1815년 당시 워털루에서 지구나서도 그는 다시한번 쿠데타를 일으킬수 있었습니다. 만약 정권에 눈이 뒤집힌자라면
내전을 거쳐 정권을 탈취할수도 있었을 겁니다만 나폴레옹은 갈수도 있었던 미국으로 망명도 거부하고 그자신이 영국군에 뛰어듭니다. 시저와 비교하자면 시저도 만약 내전전쟁을 안치루었다면 그는 제거당했을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도 숙청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당시 왕은 군대를 지휘하는 통수권자이구 따라서 단지 착하기만 하면 안되는 겁니다. 결단력없이 무슨 군대를 통솔합니까? 당시 스위스병사들만 애궂은 죽음을 당했죠. 또한 정치를 똑바로 했다면 혁명이 일어날수는 없는 것이었죠. 따라서 제가 강조하는건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루이의 잘못을 덮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공과사는 명백히 구별해야죠..
그리고 나폴레옹이 포도탄사격을 하기전 그 민중들은 서민이 아닌 일종의 왕당파들인데요, 그들도 대포를 확보하기위해 노력했지만 나폴레옹이 선수쳐서 주위의 대포를 끌어 모았죠. 즉 대포생각은 서로 했지만 먼저 행동에 옮긴건 나폴레옹이었다는 겁니다. 그 사격으로 인해 왕당파는 와해되고 공화국은 유지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도 당시 궁중에 난입한 폭도들을 목격하고 평생 민중들의 봉기를 맘속으로 두려워해 일종의 강압정치를 했던건 사실이구 이건 오점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