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진 론
이화진은 양반 고을 안동에서 태어난 규수이다. 퇴계 집안의 후손답게 늘 한복차림으로 고전적인 한국미를 머금은 조선의 여인이었다. 올림머리까지 한 단아한 자태는 뭇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화진은 대구에서 아직 수필이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기 이전에 한 발 앞서 수필에 관심을 기울인 선구자이다. 피난 시절 대구의 향촌동은 서울의 문인들이 피난와서 모여들던 곳이다. 그때 이화진도 최정희 서정희 장덕조 등 당시의 한국 여류 문학을 이끌던 분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현대문학에 심취하였다.
1968년에 이화진 님은 대구 수필계에 아주 큰 일을 해냈다. 대구 수필을 위해서 여사가 한 일은 그의 작품집 첫 머리에 실린 김시헌 수필가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968년 어느날, 직장으로 전화가 왔다.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 터이니 양지다실로 나오시라는 이화진의 전화였다. 그때 만난 사람이 장인문씨 이다. 세 사람은 그 뒤에 여사님이 경영하시는 양지다방에서 가끔 만났다. 수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내 수필동인회를 조직하자는데까지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 경상북도에서 발간하는 유일한 월간지인 도정월보를 수십 권 구해서 일일이 수필란을 뒤졌다. 수필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글을 5회 이상 발표한 사람을 10여 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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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2월에 영남일보사 앞에 있는 양지다방에서 경북수필동인회(오늘의 영남수필문학회의 전신이다.) 창립총회를 가졌다, 인원은 10여 명 이었다.’수필의 문학성을 높이자.‘를 창립의 첫 목표로 내세웠다.
이때는 ’수필도 문학이냐‘는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나오던 때였다. 따라서 문학이 수필성은 가장 큰 과제였다. 그 이듬해에 동인지 수필문학(隨筆文學)의 첫 발간이 있었다.”
김시헌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대구수필의 태동기에 관한 역사를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대구의 수필이 문학으로 발돋움 하는데는 여사의 역할이 아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화진 여사의 수필 이외에도 최근에 내방가사를 읽어 볼 기회가 있었다. 수필보다는 가사문학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다. 90년 대에 대구의 수필문단에 처음으로 이름을 등록한 나는 이화진님을 까많게 모르고 있었다. 대구 수필가의 자료를 모우는 과정에서 우리 후학들이 선각자를 너무 모르고, 소홀하게 대접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흘러 나왔다.
김시헌의 소개글에서 보면 이화진이야말로 대구수필이 태동하는데 최고의 공헌을 했다. 대구수필사에서 이화진님이야말로 여류 수필가 중에서는 최고의 윗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화진님을 통해서 대구수필사를 처음으로 연 김시헌님, 장인문님이 태어나셨다.
김시헌의 글을 조금 더 보자.
“이화진님의 수필은 문장이 투명하다. 가을의 넓은 공간처럼 맑고 맑다. 가까운 곳에서 소재를 택하면서도 가고 있는 곳은 높고, 멀고, 깊은 곳으로 목적이 확대되었다. 20년 전에 대구일보에 실린 그의 명작의 고향은 신문사의 청탁을 받고 직접 답사를 거쳐서 창작한 작품으로 그 당시 많은 독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나는 대구의 수필가에 실린 그의 작품에서 문장이 보여주는 외연 뿐아니라 상당히 깊은 사색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오늘의 수필가들이 너무 표피적이고,서정적인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보았다.
2006년에 매일신문의 조항래 기자가 ‘문단 야사’라는 기사를 시리즈로 실었다. 그 중에 간간히 이화진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깊이 있는 작품의 이야기라든지, 그의 위치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야사의 수준이다. 그래도 워낙 자료가 없기 때문에 조금은 도움이 되리라 싶어서, 여기에 발췌하여 소개해 본다.
수필가 이화진(86)은 다방을 경영하면서 문인들에게 쉼터를 제고앴다. 임도순은 ‘개화기의 신여성 같은 분위기의 이화진은 퇴계 집안의 후손답게 한복 차람에 단아한 모습이었다.
이화진은 도정월보에 작품 발표를 했다.
후일 55-70년 대에 발표한 글을 모하 고희 기념문집 ’잔화(殘火)의 장(章)을 출간했다.
(1991년, 그루사 출판으로 알려지고 있다. 책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의시면 참고하고 싶습니다.)
매일신문의 문단야사 기사에는 소설가 이수남이 쓴 글도 있다.
이화진이 운영한 다방 이름을 춘추다방(?)이라고 하여 (다방 이름의)진위 여부가 의심스럽고
*** 내가 대구의 수필가를 쓸 때 가장 힘드는 일이 작가의 자료를 구하는 일이었다; 서부 도서관에 향토작가 작품을 많이 보관함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했지만, 작가의 자료는 여전히 미흡했다. 그런 중에서도 자료 구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작가가 이화진이다. 이화진의 자료는 김시헌님의 글이 전부라 해도 관언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작품집도 구하고, 수학 등 사적인 자료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자료 구하기가 어렵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1991년에 그루사에서 출판한 ‘잔화의 장’을 구하고 싶습니다.)
이화진을 개인적으로나 (출신사항들, 학교수학 결혼 교유 등등) 작품으로나 나는 무지하다. 많은 분이 자료를 올려주시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