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고구려 위치를 잘못 잡으니까 옥저가 한반도 동해로 나오는 오류를 범해 버렸다.
고구려도 북경을 위주로 땅을 갖고 있었음을 기준으로 본다.
바다가 아니라 황하강을 오해하면 또 오류가 된다.
서안평 압록수 국내성 모두 북경과 가까이 그 밑에 존재한다.
출처: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34633
(해주) 본 옥저국의 땅으로 고구리 때 사비성 혹은 비사성이라 했고, 발해 때 남경남해부라 불렀고, 요나라 때 해주남해군을 설치했다. 금나라 때 등주로 이름을 바꿨다가 원나라 때 주와 현이 모두 폐지됐고 명나라 때 해주위가 설치됐다.
(海州) 本沃沮国地,高丽为沙卑城,亦曰卑沙城,或讹为卑奢城,渤海号南京产南海府,都督沃晴椒三州,辽置海州南海军,又置临溟县为州治,金改澄州,元州县皆废,明置海州卫于此,即今辽宁省海城县治。
(해성) 주나라와 진나라 때 조선에 속했고, 한나라 때는 현토에 속했다가 후에 낙랑으로 바꿔 속했다. 동한 때 도위를 설치해 옥저에 봉했다.(이하 해주의 연혁과 유사)
(海城) 周秦属朝鲜,汉属玄菟,后改属乐浪,东汉置都尉,以封沃沮,魏属牟州,晋及隋属高名骊,唐平高玉,。属盖州,入渤海为南海府,辽置海州南海军。金改澄州,元属辽阳路,明置少州卫,隶辽东都指挥使司,清顺治间置海城县,属辽阳府,寻改属奉天府,民国因之,属辽宁省辽沈道。
『삼국지』동이열전에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濱大海而居). 북쪽은 읍루·부여,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해 있다”는 기록과 “예는 남쪽으로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리·옥저와 접했고, 동쪽으로는 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는 기록으로부터 옥저 땅, 즉 해주가 어디였는지를 추적할 수가 있다.
출처:http://egloos.zum.com/ragwangfal/v/1955946
고구려현 문제부터 짚어보죠.
삼국지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을 보면 기원전 107년 현토군이 설치될 때 고구려는 현縣이 되어
고구려 군장들이 정기적으로 현토군에 가서 태수님께 인사하고 공물 바치면 중국 관모 관복을 하사받는 시스템이
세워져있었다고 나오죠.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의 동옥저편 동예편을 보면 현토군은 본래 옥저성에 있다가 고구려로 옮겨갔고, 그후 또 언제인지 정확히 특정하지않은 시기에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이사갔다고 나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왕본기를 보면 서기 1세기 초 그러니까 중국 황제 왕망이 현토군 고구려현에게 명령해 고구려인들을 강제징병해서
흉노와의 요서 북쪽 전장터로 데리고 가라 명합니다. 근데 가다가 탈영한 고구려인들이 요서에서 도적질 했죠.
그 책임을 물어 고구려 왕 '추'의 목을 따버려서 중국 수도 장안으로 배송되었습니다.
이때 고구려 장수 연비도 같이 참살당했고
이에 개빡친 고구려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고구려현을 불살라버렸다고 적혀있습니다.
연비가 죽었다는 말 빼곤 나머지는 전부 삼국지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의 고구려편의 기록과 100% 일치합니다.
왕망은 이민족 왕이 무슨 왕이냐 후侯(제후)라고 제대로 고쳐 부르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고구려 왕 추는 고구려 후侯 추라고 삼국지 동이전 , 후한서 동이전에 적혀있죠.
자.. 그래서 대략 서기 12년경에 현토군의 고구려현은 고구려에서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이사갔습니다.
근데 서기 2세기 전반 쯤 고구려 계루부 정권 수장(궁宮=태조왕)에게 쳐맞아서 또 활활 불타버려서 영영 못 쓰는 성이 됐죠.
태조왕에게 불탄 성은 삼국지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에 "현재 고구려의 서북쪽에 있는 옛 부가 바로 그곳이다."라는 이름으로
남게되고
현토군은 마지막으로 요동군 양평현 옆의 무순시로 이사갑니다.
그러면 유리왕 때 불살라진 그러니까 서기 12년 이전의 현토군 고구려현은 아마도 오녀산성과 태자하 상류 그 사이에 있었으리라고
추정해볼 수 있는데.
그런 추정을 더 뒷받침 해주는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유리왕의 장군 오이 마리가 현토군의 고구려현을 불사를 때 연이어
양맥국도 학살하는게 나오는게 나옵니다.
양맥국은 양수의 상류에 사는 맥족입니다.
양수는 한서지리지,신당서 고구려전에도 나오듯 요동군의 양평현의 근방에 있는 강물인데 바로 태자하입니다.
태자하의 상류와 오녀산성의 중간에 초기 현토군의 고구려현이 있었을겁니다.
자 그러면 고구려현 문제는 이쯤으로 마무리 짓고
현토군의 서개마현에 대해 말해봅시다.
한서지리지를 보면 현토군의 서개마현 근처에 마자수라는 강물이 흐르는데. 서북쪽으로 흐르는게 있고, 또 염난수와 합류되어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요동군 서안평현에 이르러 바다로 풍덩 빠지는 강물이 있습니다. 이 강물은 2개의 군을 거쳐 흐른다고 되어있는데.
2개의 군이란 현토군의 서개마현과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말합니다.
이는 두만강,송화강,압록강을 말하는 것으로
송화강은 백두산에서부터 서북쪽으로 흘러 만주의 부여 땅을 적시며 백두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서남쪽으로 흘러 압록강과 합류해
서남쪽으로 계속 흐르다 신의주,단둥에 이르러 바다로 빠집니다.
신의주,단둥이 바로 요동군의 서안평현입니다.
그러면 현토군의 서개마현은 삼국지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에 고구려의 남쪽에 있는 '개마대산'이라 나오는. 즉
개마고원의 서쪽에 있던 현토군의 속현을 말하는겁니다.
후한서 동이전 동예편을 보면 기원전 82년에 진번군 임둔군을 폐지해서 낙랑군 현토군에 통합시켰는데.
후한서 삼국지 동이전의 동예 동옥저편 전부 읽어보면
낙랑군과 옥저,동예 사이엔 단단대령이란 산맥이 있고, 고구려의 남쪽엔 개마대산이란 산이 있고 예맥이란 부족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다고 나옵니다.
개마대산의 동쪽에 옥저가 있다고 나옵니다.
단단대령의 동쪽으로 옥저,동예가 있는데. 동옥저,동예는 낙랑군의 7개 현들이 되고 동부도위가 설치됩니다.
이 때 개마고원의 서쪽의 예맥 부락은 현토군의 서개마현의 통치를 받게됩니다.
근데 이 현토군의 서개마현은 고구려 대무신왕이 서기 26년에 개마국을 정벌해 복속시킬 때 서개마현도 파괴되어서
요동 쪽으로 도주했다 보면 됩니다.
그러나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왕본기를 보면 고구려 대무신왕이 개마국을 정벌해 그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한 후 그 땅을 노략질하지않고 단지 군현으로 삼았다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母校勘 001虜掠, 但以其地爲郡縣.라고 적고있는데. 여기서 군현은 고구려의 땅으로 삼았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현토군의 서개마현으로 편입시켜 현토군에 공물을 바칠 수 있게 빨대를 꽂을 식민지 삥뜯는 곳을 설치했다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성城이나 부락이라면 모를까. 군현을 설치할만큼의 통치 시스템이 발달하진 않았습니다.
우린 뭐 고구려와 현토군은 항상 대립하는 존재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고구려가 현토군에 깝치게되는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연맹 수장권이 넘어가는 태조왕 시절이지.
태조왕 이전엔 소노부(동부여)가 고구려 연맹의 수장 즉 회장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소노부 시절 고구려는 현토군 고구려현에 깝친건 단지 유리왕 시절일 뿐
대무신왕 때 현토군에 깝쳤단 소리는 없습니다.